5·18에 북한이 개입한 증거가 없는데도, 김진태·지만원 등은 북한 개입설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치적 의도로 그러는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로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북한 개입설을 철석 같이 믿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설의 근거가 되는 정보가 전두환 집단한테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6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전두환 부인인 이순자는 "지금 그 말(북한 개입설)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라고 했고, 전두환은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두환 본인의 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전두환 집단이 광주와 북한을 연결지었다는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두환 집단의 통제를 받는 언론들은 5·18 기간 중에 광주에 대한 북한의 선동전을 조작해서 보도했고, 광주 현지에서 체포된 일반 시민들이 남파 간첩으로 둔갑되는 일도 있었다. 또 진짜 간첩이기는 하지만 5·18 기간에 체포되는 바람에 광주 특파 간첩으로 둔갑된 이창용 같은 사람도 있었다.

5·18 기간 중인 1980년 5월 22일(미국 시각)과 23일 미국은 국무부 대변인 성명과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 발언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경고의 뜻을 표시했다. 전두환 집단의 학살행위로 상황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엉뚱하게 대북 경고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전두환 집단이 5·18과 북한을 연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능을 했다.

또 다른 행위자도 있었다. 바로 일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판 CIA, 그래서 JCIA라 부를 수 있는 내각정보조사실(내각조사실)이다.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에도 언급됐듯이, JCIA도 북한 개입설 확산에 원인을 제공했다.

수십 년 지나도록 1980년 5월에 머물러 있는 명희
 
 <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 무당벌레필름

 
박기복 감독의 2018년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중앙정보부의 폭력에 의해 운동권 남자친구 철수(전수현 분)를 잃은 미대생 명희(김채희·김부선 분)를 다룬 작품이다. 5·18 직전에 '임'을 잃은 명희는 5·18 기간에 철수의 시신을 지키며 전두환 반대 투쟁에 가담한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광주 하늘 아래서 명희는 임이자 동지인 철수의 뜻을 이어받아 진압군에 맞선다.

이때 명희는 진압군의 총알을 머리에 맞고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그때부터 2017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의식은 '1980년 5월 광주'에 그대로 머무른다. 가끔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거의 항상 그 시간대에 머물러 산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 가사처럼, 27년이란 세월 동안 그는 오로지 5·18만 알며, 5·18만 기억하고 산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철수(전수현 분)와 명희(김채희 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철수(전수현 분)와 명희(김채희 분).ⓒ 무당벌레필름

  
 명희의 중년 모습(김부선 분).

명희의 중년 모습(김부선 분).ⓒ 무당벌레필름

 
러닝타임 105분짜리인 이 영화가 54분을 경과하는 대목에서, 전두환이 주재하는 군부 대책회의가 나온다. 광주항쟁에 대한 진압을 논의하는 자리다.

장군 1 : 각하, 차지철이 말처럼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도 죽였다카던데, 이거 뭐 백만, 2백만 죽이는 거 아무 일도 아닙니다.
(중략)
장군 1 : 장관님, 거 미국애들 반응은 좀 어떻습니까?
장관 : 대한민국의 질서 회복을 위해선, 큰 틀에서 어느 정도는 무력 사용을 용인한다는 입장입니다.
장군 2 : 일본 내각조사실 첩보에 의하면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군 1 : 이번 기회에 우리 각하의 지도력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합니다.


'장군 2'가 말한 내각정보조사실이 JCIA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일본 국내외 정보뿐 아니라 산업정보까지 처리하는 곳이다. 내각관방 홈페이지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각정보조사실은 내각의 주요 정책에 관한 정보의 수집·분석 기타 조사에 관한 사무와 특수 비밀의 보호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며, 내각정보관 밑으로 차장과 총무부문·국내부문·국제부문·경제부문·내각정보집약센터 및 내각위성정보센터에 분담시켜 처리하고 있습니다."
 
 내각관방 홈페이지에 적힌 내각정보조사실 설명문.

내각관방 홈페이지에 적힌 내각정보조사실 설명문.ⓒ 내각관방

 
바로 이 JCIA가 5·18 북한 개입설에 원인을 제공했다. 이들의 공작은 5·18 전부터 있었다. 전두환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벌인 뒤부터 이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 침략설을 유포했다. 이들의 공작은, 한반도 위기감을 조장함으로써 전두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약화시키고 관심을 북한으로 돌리는 데 기여했다.

이런 상황이 5·18 기간에도 계속됐다. 국무부 및 주한미국대사관과 더불어, JCIA도 5·18 기간 중에 북한 개입설에 근거가 될 만한 정보들을 제공했던 것이다. 박선원 전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노무현 정부)이 연세대 연구교수 시절에 쓴 논문 '냉전기 한일협력의 국제정치: 1980년 신군부 등장과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가독성을 높이고자 번역문 속의 인명·지명을 일부 보충했다.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은 한반도담당 반장 에비스 겐지(夷子建治) 명의로 전두환 측에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제공했다. 한국 육군 정보참모부가 80년 5월 12일 작성한 '북괴 남침설 분석'에 따르면, 일본에서 온 첩보는 '북괴는 최근 한국 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 80.5.15~20 기간에 남침 결정, 김일성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소련 브레즈네프와 만났고, (브레즈네프와의 회담 때) 강경파 오진우 대동은 남침 계획 전제 추정'이라는 짧은 내용과 함께 '상기 첩보는 북경 당국이 일 방위청에 제보한 것으로 미국에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로 되어 있다."
- 한국국제정치학회가 2002년 발행한 <국제정치논총> 제42집 제3호에 수록.


5·18 기간과 겹치는 5월 15일~20일에 북한이 남침할 거라는 첩보가 중국 정부를 통해 일본 내각조사실에 전달되고 이것이 한국 정부에 제공됐다는 내용이다. 이로 인해 전두환 집단이 북한 남침설을 의식하고 있던 상황에서, 뜻밖의 상황이 광주에서 확산된 것이다. 5·18 북한 개입설이 전두환 집단에 의해 자체 조작된 측면이 크지만, 미국과 일본이 전두환을 그런 판단으로 몰아간 측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1979년 연말부터 1980년 5월까지 일본을 통해 들어온 북한 남침설. 박선원 논문에 수록.

1979년 연말부터 1980년 5월까지 일본을 통해 들어온 북한 남침설. 박선원 논문에 수록.ⓒ 박선원

 
그런데 육군 정보참모부는 '북한 남침설' 정보의 근원지가 중국 정부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이 정보에 관한 1980년 당시의 분석이 한반도 전문가인 다마키 모토이(玉城素)한테서 나왔다. 박선원 논문에 따르면, 다마키는 1980년 8월호 <코리아 평론(コリア評論)>에 기고한 '시련에 서 있는 한국(試鍊に立つ韓國)'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번역문을 약간 다듬었다.

"확실히 당시 북의 인민군이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개시할 거라는 정보가 도쿄에도 유포돼 있었다. 이 정보의 정확한 출처나 유포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일부 규명에 따르면, 우선 일본 정보 당국이 연초부터 전해지던 인민공화국 측의 군사정보를 종합해서 일종의 관측 정보로 중국 측에 흘려보내고 그것이 중국으로부터 역정보가 돼 일본에 건너온 후, 신빙성 있는 중국 정보라는 형태로 한국 측에 전달된 것 같다."

다마키의 분석처럼, 내각정보조사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불분명한 정보에 신빙성을 부여하고자 첩보를 중국 쪽에 흘려보내 중국이 유포하도록 만든 뒤, '중국발 첩보'라며 전두환 집단에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각조사실이 전해준 첩보는 전두환의 심리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수감돼 있을 때인 1996년에 검사 김상희와 피고 전두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검사 : "피고인이 주장하는 79년 12월과 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 외에도 일본 외무성의 79년말 80년초 남침설, 아시아친선교류협회의 80년 2~3월 남침설, 일본 공안조사처의 80년 5월 또는 가을 남침설, 80년 4월 자유중국 정보기관의 80년 5월 남침설 등 북한의 남침 첩보는 여러 차례 있지 않았나요?"

피고 : "당시 본인이 아는 것은 79년 12월, 80년 5월 1일(10일을 잘못 말한 듯) 내각조사실의 첩보뿐입니다. 따라서 이 첩보에 따라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학봉과 권정달에 입안을 지시했습니다."

 
 본문에 인용된 전두환의 진술. 1996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수록.

본문에 인용된 전두환의 진술. 1996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수록.ⓒ 경향신문

 
일본은 한국민들이 아니라 전두환 집단을 위해서 북한 남침설을 유포했다. 이 점은, 5·18 기간 중에 일본 정부가 보여준 특이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5월 21일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파견한 마에다 도시카츠 특사가 최규하 대통령은 안 만나고 전두환만 만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박선원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정부의 특명전권대사가 최규하 대통령은 만나지 않고 전두환을 만난 것은 5·17 쿠데타와 광주시민 학살로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사면초가였던 전두환 체제를 승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오히라 정권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지속을 위해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지원하였다.

(중략) 마에다의 파견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일은, 일본의 내각조사실이 80년 5월 25일경 2명의 간부를 서울 중앙정보부에 파견, 광주 상황을 주시하였고, 유명 정치학자를 평양에 파견, 북한의 동태를 확인케 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내각조사실과, 전두환 지배 하의 한국 중앙정보부 사이의 협력과 교류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입증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5·18 북한 개입설은 전두환 집단에 의해 조작된 측면도 컸지만, 미국과 더불어 일본 내각조사실의 정보 활동에 의해 확산된 측면도 없지 않다. 내각조사실은 북한의 남침이 5·18 기간에 있을 것이라며 전두환 집단을 부추겼고, 이런 속에서 전두환 집단은 나름의 근거를 갖고 광주와 북한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작된 북한 개입설이 김진태·지만원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거론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을 위한 행진곡> 속 명희의 의식은 가슴 아픈 사정 때문에 1980년 5월 광주에 고정돼 있다. 반면, 김진태·지만원 등의 의식은 '딱한' 사정 때문에 그해 5월 JCIA의 '헛 정보'에 고정돼 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데, 산천도 다 아는 사실을 29년이 되도록 그들만 아직도 모르는 것은 그런 헛 정보에 과도하게 휘둘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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