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82년 박철순은 팀의 56승 중 24승을 혼자 책임지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겨우 8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그가 던졌던 224.2 이닝은 팀이 치른 전체 이닝의 30.8%에 달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 해에는 그보다 더 많이 던진 투수도 있었다.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시즌 31승의 5위 팀 롯데의 14승 투수 노상수가 혼자 전체 이닝의 32.5%에 해당하는 232.1이닝을 던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몇 술 더 뜨는 투수가 나타났다. 바로 현해탄을 건너 온 괴인 장명부였다. 그는 그 해 427.1이닝을 던지면서 30승을 올렸는데,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7%와 57.7%에 달했다. 하지만 너무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장명부의 '보조투수' 쯤으로만 알려진 같은 팀의 임호균 역시 그 해 234.2이닝을 던지며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책임진 투수였다.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그 두 명의 투수를 제외한 7명의 투수가 던진 이닝을 모두 합해야 247이닝이었고 승수는 10에 불과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그 두 해의 경험이 각 구단의 수뇌부와 지도자들에게 심은 인식이란, '프로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에이스'의 존재'라는 점이었다.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진 한 명의 에이스는 국가대표 출신으로만 라인업을 가득 채운 자타공인의 강팀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승률 1할 대의 형편없는 약체팀도 한순간에 우승경쟁에 뛰어들 만큼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무기임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장명부와 김일융 일본 프로야구에서 개인타이틀을 따낸 적도 있었던 두 거물급 재일교포 투수는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장명부는 1983년 혼자 427.1이닝을 던지며 30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남겼고, 김일융 역시 1985년 226이닝을 던지며 25승을 기록해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거칠 필요도 없이 우승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 장명부와 김일융 일본 프로야구에서 개인타이틀을 따낸 적도 있었던 두 거물급 재일교포 투수는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장명부는 1983년 혼자 427.1이닝을 던지며 30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남겼고, 김일융 역시 1985년 226이닝을 던지며 25승을 기록해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거칠 필요도 없이 우승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사 200이닝의 시대

1984년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각 팀의 에이스들이 가장 처절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해였다. 팀당 10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무려 여섯 명의 투수들이 각 팀의 운명을 짊어지고 200이닝 이상을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200이닝 투구라는 것이 투수 혹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다. 오히려 200이닝을 소화한다는 것은 내구력과 안정성을 겸비한 완성형 선발투수, 즉 진정한 에이스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단면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2000년대 이후의 200이닝이란 온전히 선발투수로서 일정한 등판간격과 투구수 관리를 받으며 만들어내는 기록들이라는 점, 그리고 경기수가 130경기 안팎으로 늘어난 환경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30여 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도 한 시즌에 기껏 한 두 명이 200이닝을 던질 수 있을 뿐이며, 그나마 2007년 리오스(234.2)와 류현진(211) 이후 한 명도 나오고 있지 않은 고단한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4년, 200이닝을 넘겼던 여섯 명의 투수들은 선발등판경기의 절반 이상을 완투했음에도, 대개 선발로서 등판했던 경기의 수는 전체 출장경기수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길어야 사나흘에 한 번씩 마운드에 올라 별일 없으면 완투를 해야 했고, 쉬는 날에도 경기 흐름이 묘하다 싶으면 구원 등판해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 에이스의 역할이라는 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대의 이단아, OB 베어스

하지만 그 해 그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단적인 투수운용을 했던 팀이 있었다. 바로 OB 베어스다. 그해 라이벌 팀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1984년 베어스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였다. 

두 해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쉽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박철순 급'의 에이스란 훈련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어스는 원년 멤버 계형철, 박상열과 신예 장호연, 최일언, 김진욱 등 좋은 재목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박철순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김성근 감독은 결국 여러 명의 투수들이 각자 가장 강력한 순간만을 마운드 위에 설 수 있도록 치밀한 분업의 체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선발로 나서지 않으면서 전천후로 후방지원을 하는 투수'인 윤석환이었다.

마무리투수의 효시, 윤석환 마무리투수의 필요성에 눈뜬 것은 한국야구 발전의 중요한 한 대목이었다. 윤석환은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선발투수로 보냈고, 또 1984년에도 이기든 지든 경기 중반 아무 때나 등판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마무리 투수'와는 달랐다. 하지만 마운드의 크고작은 일들을 모두 에이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힌트를 던진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 마무리투수의 효시, 윤석환 마무리투수의 필요성에 눈뜬 것은 한국야구 발전의 중요한 한 대목이었다. 윤석환은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선발투수로 보냈고, 또 1984년에도 이기든 지든 경기 중반 아무 때나 등판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마무리 투수'와는 달랐다. 하지만 마운드의 크고작은 일들을 모두 에이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힌트를 던진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 김은식


선린상고 3학년이던 197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윤학길과 맞대결해 15대 1로 이겨 우승을 이끌며 주목을 끌었던 윤석환은 성균관대를 거쳐 그 해 처음 프로무대로 들어섰다. 좌투수로서 빠른 공과 안정된 제구력도 겸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낙천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선수였다. 신인으로서 연투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 약점이었지만, 짧은 이닝만 던지게 한다면 장점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강속구 투수 계형철과 김진욱,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포크볼을 던지던 최일언, 그리고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박상열과 장호연이 돌아가며 선발 마운드에 오르는 '로테이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든 경기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부상조하며 서로를 갉아먹는 대신 늘 대기하고 있던 윤석환에게 공을 넘기는 분업체계도 자리를 잡았다.

또다시 깨진 전망, 꼴찌 후보 OB와 롯데의 선두다툼

1984년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체로 일치했다. 전년도 한국시리즈 파트너였던 해태와 MBC, 그리고 삼성이 3강이었고 삼미와 롯데, OB가 3약이었다. 그중에서도 전년도에 멀찍한 밑바닥에서 탈꼴찌싸움을 벌였던 롯데와 OB로부터는 별다른 희망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특히 감독마저 버리고 떠난 팀 OB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시즌이 개막되자마자 OB 베어스는 4월 중순부터 거침없는 9연승 질주를 벌이며 7할 대를 넘는 승률로 단독선두로 치고 나갔다. 원년멤버 계형철과 박상열이 앞에서 이끌었고, 최일언, 김진욱, 장호연도 덩달아 연승행진의 신바람을 탔다.

하지만 초반 연승기간의 1등 공신은 역시 윤석환이었다. 4월 한 달 동안 윤석환은 1구원승과 9세이브를 수확하며 거의 매 경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그런 깔끔한 마무리는 선발투수들 전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연투가 없는 팀이고, 그래서 투수들의 체력소모가 적다보니 분위기를 한 번 타면 연승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해 OB 베어스는 장호연이 1.58의 평균자책점으로 그 부문 타이틀을 따낸 것을 비롯해 네 명의 투수들이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계형철, 최일언, 박상열, 윤석환), 가장 뒤처진 김진욱 조차도 3.05를 기록하는 단단한 투수진을 구축했다.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평균보다 0.74나 낮은 2.53에 불과했고, 바로 그것이 그 해 OB 베어스가 통합승률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 해 바로 그 '승률 1위 팀' OB 베어스는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 무대조차 밟아볼 수 없었다. 평준화된 다섯 명의 선발투수들로 시즌을 치른다는 것은 좋은 흐름일 때는 함께 순항할 수 있지만, 나쁜 흐름을 만났을 때 거슬러 오르는 힘을 가지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스 한 명의 체력소진으로 연승이 끊어질 염려도 적지만, 에이스 한 명이 없어 연패를 끊을 수 없을 때도 생기는 것이다. 

5월 1일과 2일, OB는 2위 팀 삼성을 대전 홈으로 불러들여 2연전을 가지게 된다. 두 경기를 모두 잡는다면 연승행진이 11로 늘어날 수 있었고, 두 팀의 격차는 4경기로 벌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찌감치 전기리그 우승의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고, 다른 팀들이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따기 위한 보다 현실적인 길로 후기리그 우승 쪽을 택하도록 밀어내면서 좀 더 수월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경기에서 OB는 삼성의 쌍두마차 에이스 김시진과 김일융에게 연달아 완투패당했고, 두 경기차의 간격을 모두 소진하며 공동선두를 허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열흘간의 혼전 끝에 다시 만난 5월 14일 대구 맞대결에서 또다시 김일융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단독선두마저 내주게 되고, 그 허탈감 때문인지 그 달 하순 내내 6연패를 당하며 전기리그 우승의 꿈을 깨야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전기리그 우승을 놓친 후유증은 후기리그까지 이어졌다. 후기리그에서는 슬슬 몸이 풀렸다는 듯 페이스를 끌어올린 최동원의 팀 롯데가 초반부터 연승행진을 달리며 선두로 달려 나갔고, 전기리그를 차지한 뒤 느긋하게 체력을 아끼던 삼성은 유독 OB전에만 전력을 쏟아 부으며 발목을 잡았다. 지난겨울 김영덕 감독이 OB에서 삼성으로 이적해오는 과정에서 깊어진 두 팀 사이의 감정의 골 때문이었다.

하지만 OB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끈질기게 추격하던 9월 15일과 16일, 드디어 1.5경기차로 꼬리를 문 채 선두 롯데와 부산에서 2연전을 치르게 됐던 것이다. 두 경기를 모두 잡는다면 0.5경기차 역전을 이룰 수 있었고, 그렇다면 후기리그 우승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날인 15일 최동원이 버틴 롯데를 7대 1로 제압하며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튿날 가장 믿었던 고참투수 계형철이 마지막 한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경기 초반부터 난타당하며 5실점을 하고 말았고, 롯데 마운드에는 이미 숨을 끊어두었다고 믿었던 전날의 패전투수 최동원이 다시 나타나 6이닝을 3안타로 OB 타선을 묶어버렸다. 결국 5대 1로 패배. 승차는 다시 1.5로 돌아갔다.

최동원과 임호균 최동원(왼쪽)은 시즌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4승을 따낸 1984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임호균(오른쪽) 역시 1983년에는 234.2이닝, 1984년에는 161.2이닝을 던지며 10승 이상을 거둔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지만, 장명부와 최동원이라는 거목에 가려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살아야 했다.

▲ 최동원과 임호균 최동원(왼쪽)은 시즌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4승을 따낸 1984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임호균(오른쪽) 역시 1983년에는 234.2이닝, 1984년에는 161.2이닝을 던지며 10승 이상을 거둔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지만, 장명부와 최동원이라는 거목에 가려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살아야 했다. ⓒ 김은식


삼성, '고의패전 경기'의 빌미를 주다

결국 후기리그 우승팀이 결정된 것은 9월 22일과 23일의 2연전을 통해서였다. 1경기차로 앞선 1위 롯데는 부산에서 삼성과 2연전을 가지게 돼 있었고, 2위 팀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역시 2연전을 가지게 돼 있었다.

물론 삼성과 해태 모두 우승이 좌절된 처지였기에 이를 악물고 달려들 이유는 없었고, 반대로 롯데와 OB는 한 경기라도 놓치면 안 될 절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이틀을 통해 시즌을 지배한 것은 또 다른 당사자인 삼성이었다. 이미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으로서는 한국시리즈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의 선택은 롯데였다. 롯데가 27승 투수 최동원 한 명만 봉쇄하면 되는 빈틈 많은 팀이었던 반면, OB는 약한 고리가 보이지 않는 단단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겨울 김영덕 감독의 이적 이후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며 시즌 내내 난투극을 벌여왔던 OB에 대한 막연한 알레르기도 있었다.

하지만 22일 경기에서 삼성은 진작에 주전급은 모두 제외시킨 라인업으로 임했음에도, 1회 초부터 6점을 선취하는, 후보들의 눈치 없는 선전 덕분에 경기는 예상치 못한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감독이 뜻밖의 호투호타를 선보이는 신예들을 다시 뒤로 물리고, 직접 '말귀를 알아 듣는' 멤버들을 투입하며 눈에 드러날 만큼 억지스런 '져주기'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첫 경기에서 삼성은 최소한 여섯 개 이상의 노골적인 주루사와 8개의 노골적인 도루허용, 그리고 이루 셀 수도 없는 고의적인 실책들을 '연기'하며 11대 9의 극적인 역전승을 적진에 선물했다. 그리고 그런 곤욕을 치른 보람도 없이 이튿날 또다시 1회 초부터 3점을 선취하는 꽉 막힌 선수들을 다독거리며 또다시 매 이닝 공을 흘려주고 패대기쳐주며 8대 15로 다시 한 번 역전패하는 꿋꿋함을 과시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OB 베어스는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쳤고, 삼성은 뜻대로 롯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다들 아는 바와 같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장면으로 꼽힐 만한 그 엄청난 사건을 벌여가며 삼성이 얻은 것은, 오히려 롯데 자이언츠에서 오직 '한 명뿐이던' 두려운 인물 최동원에게 고스란히 4승을 쓸어다 바치며 희대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뿐이었다.

마무리의 탄생, 하지만 아직은 에이스의 시대

본격적인 마무리 시대의 개척자, 김용수 김용수는 프로 2년차이던 1986년부터 전문마무리투수로 나섰고, 선수인생의 대부분을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청룡과 트윈스를 거치며 팀의 전력이 약할 때도 일정한 선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그는 트윈스가 경험한 두 번의 우승(90년, 94년) 때 모두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 본격적인 마무리 시대의 개척자, 김용수 김용수는 프로 2년차이던 1986년부터 전문마무리투수로 나섰고, 선수인생의 대부분을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청룡과 트윈스를 거치며 팀의 전력이 약할 때도 일정한 선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그는 트윈스가 경험한 두 번의 우승(90년, 94년) 때 모두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 LG 트윈스



그해 OB 베어스는 마무리투수라는 것을 선보이며 '에이스 없이 강팀이 되는 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공룡을 공격하는 쥐떼처럼, 에이스가 이끄는 팀들을 포위 공격해 한 경기 내주고 두 경기 뺏어내며 승률 1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우승자결정전은 김시진과 김일융 '투탑'의 팀 삼성과 최동원 '원탑'의 팀 롯데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그나마 왕좌에 오른 것은 '둘보다 더 강한 하나'를 가진 롯데였다. 그 해를 통해 한국야구가 얻은 것은, 엉뚱하게도 '역시 야구는 에이스 놀음'이라는 왜곡된 깨달음이었다.

한국야구가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껴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 해가 지난 뒤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의 김용수는 약체팀을 최약체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고, 90년대 초반의 송진우와 선동열은 강팀을 최강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또한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1984년에 OB 베어스가 조금 더 전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두 해라도 일찍 마무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한두 해라도 먼저 투수들을 '아낀다'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면,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숱한 영웅들의 이름 앞에서 적지 않은 '비운'의 딱지들이 지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김은식 마무리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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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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