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선수.

김용희 선수.ⓒ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단 한 번도 3할을 넘긴 적이 없는 8년간의 프로생활. 그동안 기록한 .270의 통산타율과 한 해 평균 열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61개의 통산홈런과 볼넷보다 훨씬 많았던 통산 삼진 수까지.

원년의 '미스터 롯데' 김용희가 남긴 기록들은 우리의 기억과는 꽤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는 그 시절, 가장 당당하고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던 강타자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김용희가 타석에 등장하면 관중석은 항상 술렁거렸다. 180㎝를 넘는 선수도 드물었던 그 시절, 190㎝의 큰 키에 한껏 길게 뽑아 쥐어 곧추세운 방망이의 위압감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대한 방망이가 시원스럽게 원을 그리면, 마치 골프를 치듯 거침없이 걷어 올려진 공은 까마득하게 하늘 속으로 사라졌고, 그러면 홈이건 원정이건 관중석에서는 ‘이야’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곤 했었다.

프로 원년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참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꺽다리' '안타제조기' '거포', '아시아 최고의 3루수' '하라를 능가하는 3루수'까지.

1973년 청룡기 대회. 그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부정선수로 찍혀 낙마한 에이스 하기룡의 몫까지 떠안느라 5일 연속등판해 697구를 던졌던 배재고의 이광은이었지만, 그 대회 MVP로 선정된 것은 타격과 타점 부문을 휩쓸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경남고의 4번 타자 김용희였다.

이미 그 때 190㎝의 장신으로 성장해있던 그는 리틀야구 무대에 등장한 성인처럼 독보적인 존재였고, 누가 보더라도 한국야구를 이끌 거목으로 손꼽혔다.

키가 컸지만 3루수와 유격수로 주로 기용될 만큼 민첩했고, 타격 또한 커다란 원심력만큼의 비거리에 덧붙여 크고 작은 대회에서 홈런보다는 타격과 타점 타이틀을 더 많이 차지했을 만큼 정교함과 결정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프로 원년 최장신의 거포

고려대를 거쳐 육군 경리단과 포항제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간 그가 다시 한 번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79년 '야구대제전'이었다. 침체해가는 성인야구에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선수들이 출신 고교의 유니폼을 입고 대결하도록 해 신·구 고교야구 팬들과 지역팬들을 야구장으로 끌어 모은 그 대회는 훗날 출범하는 프로야구의 중요한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 대회에서 졸업한 지 6년 만에 경남고 유니폼을 입고 나선 김용희는 3년 후배 최동원과 함께 팀을 이끌었고, 결국 경북고·군산상고·선린상고 같은 쟁쟁한 우승후보들을 제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그 대회에서 김용희는 19타수에서 11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최다안타상과 타격상 그리고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을 야구팬들의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야구대제전에서 강한 인상을 심은 덕에 그는 이듬해 일본 동경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실업무대에서 강타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조그만 해외 초청대회 국가대표로 두어 번 발탁된 적은 있었지만, 김봉연·김일권·김재박·김인식·배대웅 등이 자리를 다투던 내야진에 끼어들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최고 권위의 야구 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 주전 3루수로 출전한 김용희는 높은 타구와 낮은 타구를 모두 걸러내는 거미손 수비로 큰 키와 순발력의 효용을 십분 과시했고, 절대강자 쿠바에 이어 준우승을 다투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역전에 쐐기를 박는 적시타를 터뜨리는 등 긴요한 공격지원으로 그 대회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뽑는 '베스트 9'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명단이 발표되자 머쓱해진 것은 자타 공인 '아시아 최고의 3루수'로 불렸던 일본의 하라 다쓰노리였다.

이듬해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 1순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전설적인 4번 타자로서 한 세대를 지냈고, 다시 지금은 감독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그가 국제무대에서 한 번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이 김용희였던 셈이다. 그 덕에 김용희에게는 '하라를 능가하는, 아시아 최고의 3루수'라는 훈장이 하나 더해지게 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3루수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김용희.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김용희.ⓒ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러나 두 해 뒤, '단군 이래 이 땅에서 치러지는 최대의 국제 스포츠행사'인데다가 최강국 쿠바의 출전 포기로 우승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던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 개최) 대표선수 명단에는 김용희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대신 그는 같은 해 출범하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멤버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청룡으로 간 하기룡의 마운드, 해태로 간 김봉연의 1루와 더불어 그가 채웠어야 할 3루. 결과적으로 선동열과 한대화가 하기룡과 김용희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우기는 했지만, 대회 전까지 그 세 곳은 대표팀 전력의 가장 큰 구멍이었다.

반대로,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에게는 최동원·심재원·유두열이라는 세 명의 핵심선수가 대표팀으로 묶여있는 상황에서도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김용희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희의 프로행은 당시 프로팀 중 가장 많은 선수들을 국가대표에 양보하고 있던 자이언츠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완전치 못한 몸 상태를 감안한 결정이기도 했다.

큰 키와 체계적이지 못한 운동은 지속적으로 허리에 무리를 쌓아올리고 있었고, 81년 실업팀간 경기 중 입은 부상은 '무리'를 디스크라는 이름의 '병'으로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야구인생에서 절정기란 그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던 79년과 80년에 이미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82년 3월 28일, 롯데 자이언츠는 업계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와 역사적인 개막전을 치렀고, 김용희가 이끈 롯데 타선은 해태 선발 방수원을 1회부터 5안타로 두들겨 7점을 뽑는 등 14-2의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OB와 삼미를 만난 2, 3차전 역시 천창호와 노상수의 완봉승으로 잡아내며 세 경기에서 26득점과 2실점, 3승 무패로 달려나간 롯데 자이언츠는 개막전에서 청룡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국가대표 OB팀' 삼성 라이온즈를 대신해 일거에 우승 후보로 올라서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구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노상수와 천창호의 공은 경기가 거듭되면서 간파되기 시작했고 '촌놈 마라톤하듯' 했던 자이언츠의 페이스도 무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장기 레이스를 견뎌내지 못하고 한 경기 폭발하고 두 세 경기 잦아들다가 한 경기를 걸러야만 했던 중심타자 김용희의 허리가 문제였다.

5월 말, 져서는 안 될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일격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된 8연패는 결정적으로 자이언츠의 기를 꺾어 하위그룹으로 잠가 넣었고, 후기리그에 다시 6연패와 5연패를 당하며 전설적인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 바로 위의 5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김용희가 쓰러질 때마다 팀은 연패의 수렁에서 헤맸고, 파스 냄새 진동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후배 김용철의 뒤를 받쳤을 때 간신히 감격의 1승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는 무리한 기대를 뿌렸던 약체 팀의 피곤한 버팀목이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를 악물어야 했던 투혼의 주인공이었다.

미스터 롯데, 미스터 올스타

 84년 올스타전에서 두 번째로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된 김용희.

84년 올스타전에서 두 번째로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된 김용희.ⓒ 한국야구위원회

그러나 김용희의 82년이 통째로 부진과 실망의 해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며칠의 휴식 끝에라도 완전히 충전된 상태로 경기장에 나선 날이면, 그는 그야말로 폭발했다.

10월 1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정규경기 최초로 한 경기 3홈런을 폭발시키기도 했고, 3차전까지 이어졌던 원년의 올스타전에서는 2차전에 두 개의 홈런을 때린 데 이어 3차전에는 올스타전 유일의 만루홈런까지 작렬했다.

그 만루홈런 한 방으로 2차전 3홈런의 주인공인 팀 후배 김용철로 기울었던 원년 올스타전 MVP는 김용희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두 해 뒤 84년 올스타전에서도 2차전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MVP를 가져간 그는 지금껏 그 뒤로도 롯데 자이언츠에서만 되풀이 배출되고 있는 '미스터 올스타 2연패'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뒤로도 일곱 해, 그는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고 그동안 한 번도 3할 이상의 타율을, 스무 개 이상의 홈런을, 심지어는 단 한 번 개근조차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꼭 한 개의 타점을 갈망하는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고, 기왕 흥이 올라 '부산 갈매기'가 울려 퍼지는 객석에 쐐기 축포 한 방을 날려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미 소진된 몸으로 임했던 프로무대였지만 필요할 때 터졌던 '한 방'.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만원관중 앞에서 더 크게 폭발했던 스타성. 그것은 지금껏 치러진 스물여섯 번의 올스타전에서 열 번이나 MVP를 배출했고, 일단 포스트시즌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이기든 지든 폭발해 온통 그라운드와 관중석을 하얀 재만 남도록 불살라버리는 '축제야구'의 화신 자이언츠의 원형이었다.

그런 강렬한 불꽃의 기억은 보잘 것 없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스터 올스타', 그리고 '미스터 롯데'로 기억하게 하며 영원한 '안타제조기'이며 '거포'로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기록을 두고 너무 멀리 달려와 버린 기억 속의 영웅. 김용희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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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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