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률'만 놓고 본다면 '공부가 제일 쉽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리지 않다. 야구만 보더라도 60개쯤 되는 고교 팀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들만 뽑아서 30개쯤 되는 대학팀에 올라서고, 그 중에 다시 대단하다는 선수들만 8개 프로야구 팀 입단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주면 1군에 올라서게 되며, 그 중에서 다시 위치별로 '최고'로 인정받으면 주전이 되어 비로소 그라운드를 밟는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그라운드를 밟았다고 해도 다음해 또 다음해 들어오는 후배들 중에 더 나은 자가 있으면 금세 밀려나는 것이 프로무대이며, 그렇게 밀려난 이에게 두 번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팬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선수의 이름은 채 몇 개도 되지 못하며, '야구선수로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까마득하게 어려운 일이 된다.

그래서 프로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선수치고 학생 시절 '전설' 한두 개 남기지 못한 사람이 드물기는 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광은이라는 이름이 남긴 전설은 조금 독특하다. 그것은 아직 덜 걸러진 무대에서 이미 한참 벌어져있던 기량으로 아이 팔 비틀듯 얻을 수 있었던 어느 조숙아의 장기자랑이 아니며, 그가 자신의 삶에서 야구장을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숙연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닷새동안 매일 등판한, 사상 최강의 고무팔

배재고 시절의 이광은  73년 제28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5일 동안 59이닝을 역투한 배재고 투수 이광은

▲ 배재고 시절의 이광은 73년 제28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5일 동안 59이닝을 역투한 배재고 투수 이광은ⓒ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홈페이지


제28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던 1973년 초여름,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장효조가 이끌던 최강자 대구상고가 빠진 그 대회의 우승컵이 어느 팀으로 돌아갈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김용희와 천창호가 공수를 이끌던 경남고의 전력이 가장 안정되어 있었고, 김일권의 군산상고나 경북지역 예선에서 대구상고를 탈락시킨 권영호의 대건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응원을 받는 팀은 단연 배재고였다.

하기룡과 신언호의 강력한 배터리를 보유한 배재고도 충분히 우승후보로 꼽을 만한 전력이기는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서울 팀에 쏟아지는 여학생들의 환호성은 사소한 기술과 힘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이었기에 그것은 '이동 없이 편안한 안방에서 경기를 한다'는 홈팀의 물리적인 이로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배재고는 첫 경기에서 하기룡의 동점타와 역전 결승홈런으로 광주상고를 물리치며 무난한 출발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경기 직후, 광주상고가 부산고에서 전학해온 하기룡의 학적문제를 제기했고, 하기룡은 결국 부정선수로 찍혀 출장금지 처분을 받고 말았다. 배재고를 응원하던 소녀 팬들에게 최대의 비보였고, 이제 막 1회전을 끝낸 상황에서 에이스 겸 중심타자를 잃은 배재고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보였다.

배재가 대구의 복병 대건고와 맞붙은 둘째 날, 선발로 나선 것은 이광은이었다. '3총사'라고는 하지만 실력에서는 하기룡에, 인기에서는 신언호에 밀리던 그는 3인자였다. 그래서 이광은으로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결정적인 순간 하기룡을 투입한다는 것이 배재고 마운드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하기룡이 사라진 마운드에 기대를 걸어볼 것은 그나마 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날, 중앙고와 배재고는 9회까지 팽팽하게 맞섰지만 서로 단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고, 이튿날 이어진 경기는 12회에 가서야 끝이 났다. 이틀간에 걸친 이광은의 12이닝 무실점 완봉승. 첫 날 광주상고 전에서 이미 3이닝을 던졌던 그는 두 경기에서 이미 15이닝을 던진 셈이었다.

대회 셋째 날, 배재는 서울 라이벌 중앙고와 맞서야 했다. 이미 오전까지 이어진 연장게임에서 이광은마저 완전히 소모해버린 배재고가 어떤 투수를 마운드에 올릴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 날 배재고의 선발은 또다시 이광은이었다.

이광은은 그 날 중앙고전에서 무려 13이닝을 던졌다. 그리고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팀 타선 역시 단 한 점을 뽑아내지 못했고, 운명의 장난처럼 경기는 또다시 다음 날로 이어져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결국 연장 20회에 마무리된 경기는 4대 0. 중앙의 승리였고, 이틀 연속 등장한 이광은의 20이닝 완투패였다.

223명의 타자에게 697개 공을 던진 이광은

청룡 시절의 이광은

▲ 청룡 시절의 이광은ⓒ LG트윈스 홈펭지ㅣ

대회 개막 이후 나흘 동안 매일 등판해 34이닝을 연속 무실점으로 막아내다가 35번째 이닝에서 4실점을 하며 무너져 내린 투수. 그 불굴의 투혼과 신들린 듯한 호투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전날 끝내지 못한 경기의 남은 7이닝을 마저 싸워야 했던 그 날 오후에도 배재고는 또 한 경기를 치러내야 했다. 2회전에서 이미 맞붙은 바 있던 대건고와 '패자 준준결승'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항상 빠듯하게 어린 선수들을 닦달했던 고교야구대회였지만, 8강전부터 '패자부활전' 제도를 도입했던 그 해의 청룡기는 이미 탈락해 집으로 돌아가서 쉬었어야 할 선수들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쥐어짜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건고와의 경기에 배재고는 조선일을 선발로 내세웠다. 이광은이 이미 오전에 한계에 도달한 듯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조선일이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얻어맞자 곧바로 교체 투입되어 마운드에 오른 것은 또다시 이광은이었다. 그리고 이광은은 그 경기를 9회까지 혼자 책임지며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기어이 팀을 패자 준결승으로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이광은이라는 인물에게서 현실적인 존재감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제 그의 어깨와 몸을 걱정할 단계를 지나 신비로움마저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다음 날 열릴 군산상고와의 패자 준결승에도 역시 이광은이 나올 거라는 자포자기식의 예상을 내놓았고, 우습게도 그 예상은 적중해버렸다.

이광은은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발 등판했고, 연장 15회까지 공을 던졌다. 하기룡의 출장금지라는 놀랄 만한 불운과 이광은의 놀랄 만한 투혼 외에도 배재는 경기당 한 점도 채 뽑지 못하는 놀랄 만한 빈공에 허덕였다. 결국 결과는 3대 0 패배. 그 해 배재의 청룡기는 거기 까지였다. 그리고 상대와 관중들에게 승부의 짜릿함 대신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퇴장이었다.

이광은에게는 광주상고와 맞섰던 6월 14일부터 군산상고에 패퇴한 18일까지 5일 동안 연속등판해서 무려 59이닝을 던졌고, 223명의 타자에게 697개의 공을 던져 32안타와 7점을 내준 진저리나는 기록이 남았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그 대회 감투상 수상자가 이광은이었고, 타격, 타점, 최우수 선수의 3관왕으로 등극한 우승팀 경남고의 4번 타자 김용희보다도 훨씬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이광은이었다.

물론 변화구와 컨트롤 위주의 요령 있는 투구를 주특기로 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선수 보호의 필요성조차 공감되지 못했던 어느 시절의, 지금으로 보자면 몰상식한 대회진행과 코칭스테프가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오로지 승부라는 단순한 점을 향해 온전히 몰입해 몸과 마음을 날렸던 순수한 열정의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한 경지에 오른 인간이었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청룡에서 다시 뭉친 배재고 삼총사

배재고의 삼총사는 1982년, 프로야구 MBC 청룡에서 다시 뭉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실업 무대를 택했던 하기룡은 청룡 부동의 에이스였고, 고교시절 최고의 스타였던 포수 신언호는 외야수로 전업해 한국야구사상 최강으로까지 꼽히는 어깨를 과시하며 중계 플레이가 필요 없이 펜스 앞에서 홈까지 이어지는 빨랫줄 같은 송구의 쾌감을 선보였다.

군 입대가 늦었던 이광은도 조금 늦었지만 제대하는 대로 시즌 중반부터 투입되어 백인천, 이종도와 함께 청룡의 클린업트리오를 구축했다. 셋은 나란히 등에 32번(신언호), 33번(이광은), 34번(하기룡)을 달았다. 그리고 고교시절과 마찬가지로 역시 최강은 아니었지만 가장 사랑받는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보여준 팀 청룡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이광은은 더 이상 투수로는 나서지 않았다(행크 애런이 이끌고 왔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특별경기에 투수로 나서 승리를 따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어느 한 분야에서 리그 최고에 오른 선수도 아니었다. 따라서 팀의 운명을 홀로 걸머진 듯한 헌신을 보일 필요도 없었고, 두드러지게 주목을 받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청룡과 트윈스에서만 10년을 뛰며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남겨놓은 기록이나 업적이 두드러지는 선수는 아니다. 그는 청룡과 트윈스를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별다른 기억을 남기지 못한 선수다. 

그러나 그는 항상 팀을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다재다능하게 곳곳의 구멍을 막아내는 살림꾼이었다. 3루수로 한 번, 외야수로 세 번이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을 정도로 안정적이던 수비와 더불어 3할 안팎의 정확한 타격과 '잠실 홈런왕'으로까지 불렸던 묵직한 장타력, 게다가 해마다 20개 안팎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빠른 발까지 겸비한 그는 이상적인 3번 타자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트윈스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까지 지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처진 눈꼬리, 그리고 속으로는 독하다 못해 처절한 승부근성을 품고도 사람 대하는 데 모진 구석이 없는 순둥이였기에 그의 별명은 '온달'이었다. 바보 같은, 그러나 가슴에 칼날 하나는 품은, 그래서 진짜 무서운 사람.

험한 경쟁일수록 독해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정말 독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단단히 새겨두는 것을 의미하련만, 그래서 험한 난관이나 달콤한 유혹 앞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또렷함을 말하는 것이련만, 아마도 사소한 꼬투리에 바르르 떨며 제 몸이나 상하게 하다보니 이렇게 삶이 피곤하기만 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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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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