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6월, 동아일보에 실린 주인규 체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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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나운규는 다음 작품으로 <풍운아>를 만든다. 이 작품에서 주인규가 맡은 역은 기생 혜옥에게 빠져 부인 영자를 버리려다 영자가 쏜 총에 맞아죽는 안재덕 역이었다.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이은 성공에 나운규는 자만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인규를 비롯한 함흥출신 김태진, 이규설 등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떠났다. 주인규는 김태진과 함께 심훈과 강홍식이 있는 계림영화사로 옮겨갔다. 계림영화사에서는 주인규는 심훈이 연출하는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조부이며 당대 최고의 미남스타인 강홍식이었다. 주인규와 강홍식은 이 영화에서 함께 연기한 후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격변기를 함께 헤쳐 나가는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한다. <먼동이 틀 때>가 흥행에 실패하자 계림영화협회는 문을 닫았다. 주인규는 그 사이 극동영화사의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 출연했다. 이즈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하여 나운규프로덕션을 차려 나왔다. 나운규의 독선에 반대하여 회사를 나왔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이 다시 회사로 들어가 <뿔 빠진 황소>를 만들었지만 영화는 실패했고 회사는 후속작 제작을 포기했다. 1932년, 적색노조 활동으로 동생과 함께 체포돼 주인규는 아내와의 이혼 문제로 영화계를 떠나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는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시기로 특히 주인규의 고향 함흥은 중화학 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적색노조가 활발히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2년의 공백 후, 주인규는 <도적놈>이라는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계로 돌아왔다. 이 작품의 연출은 나운규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에 등을 돌린 윤봉춘이 맡았다. 대구의 부호 장두한이 투자한 대구 대동영화사에서 만든 이 영화는 계급문제를 다뤘으나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단, 주인규의 연기에 대해서는 카프 출신 윤기정이 조선일보에 실은 평에서 "고철수로 분한 주인규 동무는 이번에도 믿음성 있는 연기를 발휘하였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발달된 근육은 힘의 표현 같다. 노동자 역으로 적역이다"라는 찬사를 하였다. <도적놈> 출연 후, 주인규는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떠났지만 국경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와야 했다. 모스크바의 쏘브키노를 목표로 영화수업의 길을 떠난 것이었지만 실상은 공산당 간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소련으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흥질소회사에 위장 취업한 주인규는 육체노동자로 있으며 적색 노조활동을 했다. 또한 미국서 영화공부를 했다는 황운과 함께 함흥에 길 안든 영화사를 만들어 불합리한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을 그린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인 1932년 6월 19일, 흥남 적색노조의 수뇌 주인규와 그의 동생 주선규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적색노조사건이 터지자 신흥으로 몸을 피했지만 정사복 경찰관 10여명이 자동차를 타고 추적한 끝에 체포된 것이다. 1934년 10월 재판에서 주인규는 징역 3년, 주선규는 징역 5년이 언도됐다. 해방 직후, 함경도 검찰소 소장으로 활동 @BRI@1938년, 출소한 주인규는 영화배우로 다시 스크린에 나섰다. 고려영화협회의 <복지만리>에 출연한 것이다. 고려영화협회에는 예전의 친구들이 많았다. 제작자인 이창용은 과거 학생 신분으로 영화판을 기웃거렸던 인물로 주인규가 출연한 <아리랑>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촬영조수를 하다 일본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감독을 맡은 전창근 역시 상해로 떠나가기 전 주인규가 나온 영화에서 연구생으로 영화수업을 받던 젊은이였다.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오랜 추억이 있는 강홍식, 윤봉춘, 이규설 등이 이 작품에서 함께 했다. 1939년 2월, <복지만리>의 촬영에 참여했던 주인규, 박창환, 심영, 유현, 이재현 등이 중심이 되어 고려영화협회 직속 극단인 고협을 창단했다. 이들은 당대 거부 중 한 명인 한학수의 도움으로 경기도 고양에 고협촌을 만들어 집단생활을 했으며 산양목장을 운영, 산양유를 내다 팔아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 고협촌의 촌장은 주인규의 동생 주선규였고, 주인규는 경리를 맡았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통제가 극도로 달했던 일제 말기, 조선 내 모든 영화사는 총독부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영화사로 통합되었고 영화인들은 심사를 통해 이 회사에 입사하였다. 주인규는 사상범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통제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지만 영화출연 요청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규 또한 친일영화에 출연했다. 고려영화협회와 일본 동보영화사가 합작으로 만든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했고, 통제회사인 조선영화사에서 만든 방한준 연출의 <거경전>과 최인규 연출의 <태양의 아들들>에 출연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함경도에서는 소련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함흥은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투 끝에 해방시켰다. 적색노조가 활발히 활동하던 함경도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 된 직후, 청진감옥에서 풀려난 정치범들과 지하의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자치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태평양노조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주인규도 함흥 검찰소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남과 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아 1946년 주인규에게 북한영화의 건설이라는 큰 임무가 맡겨진다. 소군정의 도움으로 영화촬영소를 만들고 북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을 평양으로 모았다. 주인규는 1946년 10월 만들어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산하 영화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 건설이 시작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장이 되었고, 그해 문예총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주인규와 여러 영화에서 함께 출연했으며 깊은 우정을 나눴던 강홍식은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고향>을 연출하였다. 주인규도 1950년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을 연출한다.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개봉을 전후하여 전쟁이 터졌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3일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주인규와 강홍식은 서울의 영화인들을 소집하고 교육시켜 평양으로 데려가는 역할과 전선에 종군영화인들을 투입하여 전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민군을 위안하는 역할을 맡은 총 책임자였다. 서울에서 이러한 사업을 하던 중 전세는 역전되어 후퇴를 하게 되었다. 주인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951년 개편된 영화동맹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못하였다. 파국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적색노조 계열의 주인규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특히 1956년 '8월 종파사건'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함흥에 있으면서 자연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률, 기석복과 같은 소련출신 조선인들과 교분을 쌓았던 것이 그를 사지로 몰아갔다. 종파숙청이 한창이던 1956년 9월 주인규는 자살한다. 파란만장한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주인규의 마지막은 대부분의 영화와는 달리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운명이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비극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많은 영화에서처럼 비참한 죽음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하였다. 영화배우로, 혁명가로 북한영화의 건설자로 쉼 없이 달려왔지만 그는 이제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존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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