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한대화가 마침내 OB 베어스에 입단한다. 많은 기대와 주목 속에 입단한 까닭에 기자들은 그의 주위에 모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OB는 한대화를 3루수나 유격수로 기용할 방침이었다. 당시 3루수는 양세종, 유격수는 유지훤이 맡고 있었다. OB의 계산은 한대화가 3루나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유격수를 맡아 노쇠한 김우열과 윤동균을 대신해 팀의 파워히터가 돼주길 바랐다.

OB 베어스의 희망, 그러나 모두에게 절망이었던 3년

입단 첫 해. 한대화는 원년 해결사 양세종(82년 승리타점왕)을 대신해 3루수로 출장한다. 1982년 우승 당시 양세종은 기대치를 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OB가 한대화에게 거는 기대는 그 이상이었다.

출발은 '역시 한대화' 라는 평가였다. 데뷔전이었던 MBC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3점홈런 홈런을 터뜨렸다. 야구계와 팬들은 새로운 강타자의 출현에 환호성을 보냈고 OB팬들은 그가 원년우승을 재현해 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한대화는 그 해 88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2 홈런 5개 44타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OB나 한대화 본인, 그리고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던 팬들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기록이었다.

"기대와 부담감이 작용했던 탓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지요"

한국야구 전문가 임채왕의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해 성적은 한대화가 OB에 머문 3년간의 성적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1984년과 1985년은 그의 야구 이력에서 가위로 오려내고 싶을 만큼 매우 나쁜 성적을 남긴 해가 됐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영웅'이 이토록 참담한 성적을 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상과 악재가 겹쳤던 '트러블 크라운' 한대화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한대화에게는 간염이란 병마가 찾아왔다. 그리고 유격수를 원하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3루수를 종용하는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게다가 구단 프런트와의 관계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허리까지 좋지 않은 상태. 이 정도면 트러블 크라운(trouble crown)-트리플 크라운 triple crown 이 아니다!- 수상자 감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실망을 풀어내는 방법은 실타래처럼 얽히게 마련이다.
한대화는 불펜에 버려진 낡은 글러브처럼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야구 인생이 끝나리라 진단하는 전문가들이 하나 둘 늘고 있었다. 82년의 영광은 초등학교 참고서에서나 등장할 뿐 유행이 지난 노래와 같아 보였다.

해태로 트레이드 된 한대화. 선수생활 최대 위기를 맞다

86년 시즌을 바로 앞두고 전격적인 한대화 트레이드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상대는 해태 타이거즈. 황기선과 양승호를 OB에 넘겨주고 해태가 한대화를 건네 받는 방식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누구에게도 손해볼 것 없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 없는 트레이드라 평했다.

OB는 한대화라는 '만년 기대주'에 더 이상 희망을 거느니 과거 청소년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투수 황기선과 가능성이 엿보이던 양승호를 데려오는 게 전력강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해태는 신인거물 3루수 이순철과 확실한 유격수 서정환이 있었기에 한대화의 보직을 걱정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한대화는 화가 났다. 트레이드라면 자신의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 로 보내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85년 시즌 병마와 싸우고 있던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한 OB였다. 그는 긍지를 회복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OB에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대화의 뜻을 받아줄 상냥한 OB가 아니었다.

구단 역시 한대화에게 많은 실망과 낙담을 했던 터였고, 빙그레는 당장 현금밖에 없는 팀이라 선수수급이 급한 OB로서는 마땅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결국 한대화와 OB는 임의탈퇴라는 강수를 두며 끝까지 대립한다. 이 때 등장한 중재자가 다름 아닌 김인식(현 한화 이글스 감독) 해태 타이거즈 코치였다. 한대화에겐 동국대 은사였다. 김인식은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오직 해태에서 뛰는 길 뿐이라며 한대화를 설득했고, 결국 한대화는 빙그레 이적 요구를 철회한다.

병마와 부상, 게다가 의욕상실까지 겹쳐있던 만신창이 한대화. 어쩌면 이 때부터 향후 '재활 공장장' 이란 애칭을 달게 된 김인식의 행보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대화가 해태에 합류한 건 3월께. 스프링캠프를 거치며 선수들의 포지션 조정이 끝난 상태였다. 해태는 한대화의 활용여부가 애매했고, 한대화 자신에게도 해태란 팀은 생경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어쩌다 토끼 뒤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선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예정된 전설'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호남을 연고지로 창단한 구단으로 모기업은 제과업체로 유명했던 해태. 당초 호남 유력기업 '금호' 나 '삼양' 이 프로야구단 창단에 나서는 듯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해태가 프로야구단을 떠안게 됐다.

1983년 전기리그 우승 당시 해태 타이거즈 1983년 전기리그 우승 당시 해태 타이거즈
 1983년 전기리그 우승 당시 해태 타이거즈
ⓒ 해태

훗날 미국의 뉴욕 양키스나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한국의 최고 명문구단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기엔 재정 형편이 썩 좋지 않은 모기업에서 탄생한 타이거즈는 이미 예정된 전설이었다.

창단 멤버는 고작 14명(외야수 김일권이 중도 합류해 15명 완성). 따라서 그들에겐 하루 하루가 한국시리즈였다. 외야수 김일권이 포수를 보기도 했고, 3루수 김성한이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선수들에게 포지션은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의 메뉴처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6개팀 중 4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듬 해에 놀랍게도 한국 시리즈 우승. 1984~85년의 성적은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었다.

해태 전성시대의 주역들

감독은 초대 김동엽의 뒤를 이어 부임한 김응룡. 그는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회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올려 놓은 명장이기도 했다. 선수들의 면모도 감탄사를 늘어놓을 만큼 화려했다.

86년 해태의 투수진은 당대 최고였다.

한대화와 같은 학번인 이상윤과 공의 묵직함으로만 따진다면 선동렬을 능가했던 김용남, 김봉연이 대표하는 군산상고 계열에 맞서 광주일고 계열의 선봉이었던 제구력 투수 강만식, 광주일고 출신의 '영건' 문희수가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86년 입단한 신인 투수 4인방(김정수, 차동철, 김대현, 신동주)은 제 몫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재원들이었다. 물론 이 모든 투수들 뒤에는 '숨쉬는 전설' 선동렬이 버티고 있었다.

타선 역시 원색의 유니폼 만큼이나 강렬했다.

원년 홈런왕이자 불굴의 투지로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던 '촌놈' 김봉연, 배트란 일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눕혀 잡을 수도 있다란 사실을 일깨워 준 '오리궁둥이' 김성한, 검투사처럼 강인한 인상의 중심타자 김준환, 우타자들의 타격 교본이었던 원조 '노랑머리' 김종모, 해태의 발이었던 '대도' 김일권, 수비만은 삼성 배대웅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차영화, 한국 포수 수준을 한단계 높여준 재일동포 김무종 등이 있었다.

여기에 1985년 신인왕과 3루수 골든글러브를 동시 수상한 '슈퍼 루키' 이순철과 광주일고 출신의 강타자 김태업이 있었다.1986년 입단한 대학거포 장채근과 이건열도 눈여겨 볼 대상이었다.

바로 이들은 86년부터 시작될 해태 전설의 주역들이었다.

한대화는 바짝 긴장했고 이번이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에게 용기는 마지막 희망인 법. 한대화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훈련에 집중한다.

김응룡 감독은 이런 한대화의 자세에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간염을 의식해 훈련시간도 조정했고, 포지션도 3루로 결정해 준 것.

그렇게 한대화는 조금씩 회복세에 들어섰고, 이적 첫해에 그의 전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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