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SF 액션물을 기대했다면 '범작'이고,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본다면 '수작'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정이>에 대한 나의 한 줄 평이다. AI(인공 지능)가 몰고 올 디스토피아를 특유의 영화적 상상력과 첨단 컴퓨터그래픽 기술로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 <지옥>과 <반도>, <부산행>을 통해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연상호 감독의 최신작이다.
 
영화 평론가들의 혹평 속에도 꿋꿋이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달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K 영화라 기대했는데, 알고 보니 신파'라는 조롱마저 들은 터다. 화려한 영상에 걸맞지 않게 이야기의 전개도 단순하고,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력도 엉성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여느 영화에 견줘 그다지 길지 않은 98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진다거나, 결말이 뻔히 예상될 만큼 서사가 식상하다며 흠잡는 경우도 여럿이다. 심지어 작년 타계한 고 강수연 배우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영화 <정이> 스틸 이미지.

영화 <정이>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결말 예상되는 뻔한 서사, 그러나
 
'AI 전투 용병 정이,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라'
 
솔직히 시청률 1위라는 숫자보다 홍보 포스터에 적힌 이 글귀에 꽂혔다. AI로 만들어진 로봇 인간이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설정이 이채로웠다. 지금껏 익히 보아온 플롯은 인간이 만든 로봇을 인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종국에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글귀 그대로라면, 주인공인 AI 전투 용병이 인간 세상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부추기는 내용이다. 등장하는 진짜 인간들과 AI 로봇 인간 대부분이 악당이고, 사실상 서현(강수연 분)과 정이(김현주 분) 단둘만이 '인간적 존재'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딸 서현과 AI 전투 용병이 된 엄마 정이의 '부비부비' 장면이 압권으로, 영화 전체를 매조지는 역할을 한다. 어릴 적 서현이 건넨 인형을 정이가 받아 손에 쥔 장면이 복선이 되어 영화를 이끈다. 권선징악의 신파적 요소일지언정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유다.
 
정작 어색한 장면은 따로 있다. 딸인 서현이 AI 전투 용병이 된 엄마를 전쟁터로 내모는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으로 부임한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시뮬레이션일지언정 팔이 잘리고, 무차별 총격을 받아 쓰러지는 엄마를 무심히 지켜보는 딸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결국 서현은 AI 엄마의 '퇴로'를 열어주게 된다. 직접적 계기는 전투 용병의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엄마가 성적 도구로 재활용되는 모습을 보고서다. 성적 도구로 전락하기 전에 전투 용병으로 남아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이다. 이는 AI가 지배하는 세상에 맞서라는 명령이다.
 
영화 속 '크로노이드'라는 연구소는 AI가 지배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영문 철자는 달라도, 복제 인간을 뜻하는 '클론'과 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를 이어붙인 단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연구는 곧 우리가 직면하게 될 현실의 메타포다.
 
하루아침에 전투 용병에서 성적 도구로 변용되는 장면은 AI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한다는 AI도 오로지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거다. 곧, AI는 인간이 아닌, 자본의 필요와 지시에 따라 조작된다는 의미다.
 
 영화 <정이> 스틸 이미지.

영화 <정이>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자본에 종속된 AI, '글쎄'
 
영화를 보는 내내 최근의 뉴스 한 꼭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전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 앞에서 2023년 올해를 교육개혁의 원년으로 삼아 디지털을 기반으로 교육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중 핵심은 이른바 '에듀테크 진흥방안'이다.
 
AI가 아이 한명 한명의 역량과 지식 정도를 파악해서 아이들에게 맞춤형 학습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발상이다. AI 기술에 기반해 학교 교육의 혁신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AI가 파악하고 제공한 콘텐츠를 학습한 아이들의 미래 모습이 궁금하던 차에 이 영화를 만난 셈이다.
 
영화에서 던진 메시지처럼, AI가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불 보듯 환하다. AI가 교육의 나침반이 된다는 건, 결국 아이들의 미래가 자본의 손에 맡겨진다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 아이들조차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지난해 교육부가 '교육 분야의 AI 개발과 활용에 대한 규범'을 내놓긴 했다. '인간의 성장을 지원하는 AI'라는 대원칙과 인간의 잠재성을 발현시킨다거나 공동체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한다는 등의 10대 세부 원칙을 세웠다. 사회 공공성 증진에 기여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를 AI 윤리교육과 교사들의 역량 강화 연수 자료로 활용하고, 관련 연구소와 기업 간의 협업 지침으로 삼겠다는 복안이다. 윤리 원칙은 교육 현장에 AI의 도입과 활용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연신 강조했다. AI가 가져올 부작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방패막이라는 뜻이다.
 
과연 AI의 윤리적 활용으로 인간은 성장하고 세상은 나아질까? 기실 이는 잘못된 질문이다. 영화에 과몰입된 탓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바꿔 물어야 할 듯싶다. '과연 AI는 윤리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라고. 더욱이 자본과 결합한 AI라면 윤리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혹일 뿐이다.
 
일찍이 우리는 경험했다. 지난 2016년 개발된 AI 챗봇 '테이(TAY)'가 성희롱과 사회적 약자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내면서 이내 서비스가 중단됐다. 하물며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현실에서 AI는 인류를 공격하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맞장구 칠 테지만, 전광석화처럼 빠른 SF 액션 장면 속에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어릴 적 서현이 입원한 병원의 이름과 자막이 올라가기 직전 부감법으로 표현한 마지막 영상이 그것이다. 이 두 꼭지만으로도 영화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영화 <정이>가 교사인 내게 던진 메시지는 간명하다. 윤리 의식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결여시키는 작금의 현실에서 AI를 학교 교육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건, 흉기를 아이들의 손에 쥐여주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언컨대, 교육에 있어 선후와 경중이 바뀌었다.
 
사회는 경제적 양극화로 신음하고, 학교는 각자도생의 전쟁터로 전락한 상황에서 AI는 참담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AI도 결국 인간이 구성한 산물이라면, 뒤틀린 사회 현실이 그대로 담길 수밖에 없어서다. 'AI라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 세상이 올까 두려울 뿐이다.
영화 <정이> 에듀테크 진흥방안 이주호 교육부 장관 연상호 감독 고 강수연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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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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