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옥이>는 몇 편의 단편을 선보였던 박정환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영화에 대한 꿈을 품은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결정적 분기점이 될 순간이 바로 첫 번째 장편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독이 자기 영화 인생에서 운명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타이밍과 본 작품의 핵심 소재인 고시생의 불안은 쌍생아처럼 맞물려 굴러가게 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마치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과도 같은 취업 문제를 통해 동 세대의 보편적 공감대 획득과 현 시기 한국 독립영화의 주 수요층에 어필하기 용이한 소재주의에 호소하려는 손쉬운 선택을 한 것일까? 일단 그렇게 의심부터 할 정도로 이 영화가 내세운 핵심 소재와 이야기 전개는 익숙하고 안전해 보인다.

이런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면 감독은 자신이 안일한 선택을 취했다는 혐의에 변론해야만 한다. 그런 증거물로 선보인 영화는 검증된 소재를 극한까지 활용해내는 방향으로 내달린다. 허투루 낭비하는 구석 없이 감독은 장편데뷔작을 세상에 선보이고픈 개인적인 열망과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오랜 지인의 실제 고시생 경험 소재를 버무려내 고도로 정밀하게 표현된 지형도를 펼쳐 보인다.
 
정교하게 구현된 신림동 고시생의 위태로운 일상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세상 사람들에게 명문대라 공인받는 커트라인, 속칭 'SKY' 출신 라엘은 행정고시 준비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에 입성한다. 언덕배기 한참 위에 자리한 작은 원룸계약을 위해 엄마와 방을 둘러보는 라엘에게 공인중개사는 이 방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시험에 붙어 나갔다며 '명당'임을 강조한다. 낡고 비좁은 방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엄마의 표정이 일순 바뀐다. 곧 이 '전망 좋은 방'은 라엘의 보금자리로 확정된다.
 
이제 고시생의 전형적인 일상이 전개된다. 라엘은 원룸과 독서실, 입시학원을 왕복하며 2년 내로 합격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원룸의 작은 냉장고엔 엄마가 챙겨다준 반찬과 먹을거리가 항상 그득하다. 고기를 구워 라엘은 늘 든든히 밥을 먹고 있다. 첫해 1차 시험도 가볍게 붙었다. 곧 좋은 터의 기운에 힘입어 고시생의 고행은 예정대로 단기간에 끝나리라 라엘과 엄마는 의심치 않는다. 라엘의 원룸 책상과 창문에는 의지를 북돋기 위한 좋은 생각과 긍정적 구호로 채워진 포스트잇 스티커가 마치 부적 마냥 늘어간다.
 
시간이 흘렀다. 라엘은 2차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N수생'이 되어 있다. 이상하게 점점 더 집중력은 떨어지고 실력은 정체된다.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며 고생하는 엄마에게 미안하고 자신에게 답답한 라엘은 부담감 때문에 더 평정을 잃어간다.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엄마도 속이 타는지 어느 날 이름이 문제라며 용한 스님에게 청해서 받은 새 이름을 지어온다. 지혜 '혜' 보배 '옥', '혜옥'이다. 이제 라엘은 개명절차를 거쳐 혜옥이 된다. 다시 굳게 결의를 다지며 고시생 탈출에 도전하는 라엘/혜옥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는 포스트잇 사용법
 
여기까지만 언급한다면 <혜옥이>는 주변에 널려 있는 취업준비생 잔혹사의 전형에 불과해 보인다. 취업절벽에 몸부림치는 청춘 잔혹 이야기는 신림동과 노량진까지 가지 않더라도 전국 방방곳곳 어디에서나 금방 목격할 수 있는 군상 아닌가. 감독이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소재를 어떻게 포장해 관객을 사로잡을 심산인지 궁금해질 상황이다.
 
감독의 해법은 하이퍼 리얼리즘 + 상징적 구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정교한 세밀화다. 영화 속에서 라엘이 경험하는 신림동 고시생 라이프는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밈'화될 정도로 익숙해진 내용의 총합과도 같다. 거의 재연영상 수준의 구현이다. 특히 홍보 포스터 등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던 포스트잇 스티커의 용도가 퍽 인상적이다. 수험생이라면 메모나 정리를 위해 필수품처럼 휴대하게 마련인 포스트잇은 영화에서 다양한 함의를 갖고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라엘/혜옥은 포스트잇에 '나는 최고다! 나는 일류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글귀를 써 부적처럼 책상 앞에 붙여둔다. 포스트잇 부적은 정리 안 된 컴퓨터 화면 폴더와 파일들 마냥 쌓여만 간다. 하지만 그렇게 양적으로 늘어갈수록 어째 신통력은 감퇴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반대로 늘어날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포스트잇이 존재한다. 주인공은 점점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신경성 기침이 발병한다. 그런데 다들 신경이 곤두선 독서실에서 라엘/혜옥의 잔기침은 만인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다. SNS 유머나 자유게시판에서 숱하게 변주되는 풍경, 익명의 항의가 곧 포스트잇에 실려 주인공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해당 묘사는 비슷한 경험을 겪어본 이들에게는 남의 일 아닌 것처럼 다가올 법하다.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이 포스트잇 활용법은 지극히 사적인 주인공의 일상을 순식간에 사회적 풍경으로 변모시킨다. '능력주의'와 '노력드립'의 전형처럼 묘사되던 주인공의 고시생 라이프는 상반되는 포스트잇의 활용법을 통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회적 풍속도를 환기한다.

나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라엘/혜옥은 청춘을 바치지만 결국 자리는 제한되어 있고 독서실과 입시학원의 숱한 개인들은 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들이다. 타인이 기침을 거듭해도 건강을 염려하기보단 자신의 공부 컨디션을 우선시하며 '판옵티콘'처럼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감시하는 독서실 풍경은 비좁게 꽉 막힌 공간 디자인 덕분에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며 다가온다. 적대적 '오지랍'이 팽배한 살풍경한 독서실은 미래를 준비하는 꿈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고문을 일삼는 감옥에 차라리 가까워 보인다.
 
1997년, IMF의 망령이 지배하는 '림보'의 현재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 한방이 더 필요하다. 여기에서 감독은 극중 주인공 개인의 잔혹사로 그치지 않고 세대적 정체성과 사회적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구조화를 선보인다. 라엘과 엄마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이들 모녀의 과거와 현재는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변화 양상과 찰떡처럼 딱 붙어 굴러간다.
 
라엘의 집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 격변에 휩싸였었다. (영화에서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언급만 되는) 아빠는 실직 후 이를 만회하려는 부질없는 시도 와중에 도박에 빠져 그나마 있던 가산도 탕진하고 만다. 극중 1990년생으로 확인되는 라엘은 유년기에 집 구석구석마다 가압류 스티커가 붙은 걸 보게 된다. 7살 아이라면 하루 종일 끼고 놀게 마련일 거실 텔레비전에 압류 딱지가 붙어 있는 풍경은 트라우마가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잔혹도다. 어린 라엘에게 이 시절이 잊기 힘든 부정적 기억이 되었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라엘도 라엘이지만 이런 극한체험이 더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친 건 라엘의 엄마다. (아마 빚쟁이를 피하기 위해) 라엘의 엄마는 남편과 이혼했고 이후 왕래가 끊어진 상태다. 엄마는 헌신적으로 딸을 부양해가며 명문대까지 진학시켰지만 이들 모녀가 겪은 시련은 그녀를 집착에 빠지게 만들었다. 초반에는 좀 극성맞기는 해도 대한민국 엄마의 평균치로 간주되던 엄마는 실은 자신의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헤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그녀는 본인의 욕망을 딸 라엘에게 꾸준히 주입해왔다.
 
그 결과 라엘은 엄마의 '아바타'가 되어버렸다. 라엘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직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으로만 살아온 존재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라엘은 딱히 다른 진로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오직 5급 행정고시에 승부를 건다. 심지어 우선지망은 국세청이다. 물론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한 의도라면 그저 한국사회의 공무원 열풍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하필 국세청이라니. 어릴 적 이들 모녀를 못살게 굴던 존재의 자리에 입성하고 야 말겠다는 원한과 복수의 정서다. 이 모녀는 20년 넘게 오직 그 트라우마에 긴박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라엘의 존재는 마치 액션영화에서 인간병기로 유년기부터 육성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거대한 도박판과 매몰비용의 상관관계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흔히 한국사회에서 '고시'는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대상으로 상정된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절대명제를 가로막는 모든 것은 타파해야 할 존재처럼 치부될 지경이다. 하지만 그 시험이란 대상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이고 효과적인지는 애써 외면하고 의심하길 포기한다. 그저 주어진 룰 안에서 시험이라는 동아줄에 매달리려는 맹목적 의지만 남을 뿐이다.
 
신림동에서 머물게 된 주인공에겐 틈만 나면 확성기 소리가 들린다. 시위의 소음이다. 고시촌에서 무슨 시위일까. 작은 소음에도 예민한 고시생들이 가만 둘 리가 없는데. 관객의 의구심은 조금만 퍼져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해소된다. 2017년 이후 폐지된 사법고시 관련 존치를 요구하는 고시생들의 시위다. 잊을 만 하면 영화 속에서 이들의 시위 소음과 유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독서실에서 서서히 불안과 고립에 빠져 들어가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주인공 앞에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마치 유령처럼 줄지어 일제히 독서실을 퇴실하기 시작한다. 노력 앞에 평등하다는 고시, 그것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지속되어온 사법고시 폐지 앞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들의 무력감이 주인공에게 징후처럼 스며든다.
 
주인공의 '라엘'이라는 순 한글 이름은 독실한 신자였던 아빠의 흔적이다. 하지만 아빠는 도박에 빠져 그나마 남은 자산을 탕진해 라엘과 엄마를 빈곤에 추락시켰다. 그리고 라엘의 엄마는 절에 다닌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그녀의 불심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노력이 증명된다는 고시공부에 딸을 밀어 넣고도 정작 난관에 봉착하자 엄마의 해법은 (아무 객관적 검증도 될 수 없는) 길한 이름으로 개명이다. 그렇게 졸지에 20여 년 동안 지녀온 이름을 빼앗기고도 아무 반론을 펴지 못하는 라엘. 하지만 '지혜 혜 보배 옥'이라는 새 이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주인공은 새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을 서랍 한구석에 던져 놓는다(이는 비극의 복선이다).
 
입시학원 수업 중에 강사는 '매몰비용의 오류'를 거듭 강조한다. 사실 행정고시 과목에서 해당 개념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님에도 영화 속에서는 유독 매몰비용이 강조된다. 지금까지 투자해온 본전을 포기할 수 없는 개인의 집착 때문에 기회비용이 아니라 '손절'해야 할 대상인 매몰비용의 오류는 주인공의 상황과 맥을 같이 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N수생이 된 라엘/혜옥은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고시생 라이프가 기회/매몰비용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엄마의 집착과 라엘의 수동성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지속하게 만든다. 이제 신림동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가 된 주인공은 결단해야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잘 살기 위한 '요령'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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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은 동네 고기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진상 손님은 '프리미엄 한돈'이라면서 고기질이 별로라며 주인공을 몰아세우고 모욕을 일삼는다. 눈앞에서 고기를 들어 보이며 품평한 뒤 내팽개친다. 고객이 왕이고 서비스 자세가 도마 위에 오르는 시절이니 라엘은 꾹 참고 계속 새 고기를 가져다줄 뿐이다. 사장은 그런 라엘에게 '요령'이 없다며 핀잔을 준다. 명문대 나오면 뭐하냐며. 그리고 손님에게 세치 혀로 적당히 무마시키고 다시 라엘을 타박한다.
 
하지만 그 '요령'의 실체가 밝혀지고 주인공은 충격에 빠진다. '프리미엄 한돈'이 아니라며 역정을 내던 진상 손님의 강짜는 진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조되던 '요령'은 정직한 노력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이었다. 명문대 나오면 뭐하느냐, 요령이 없으니 행시도 못 붙고 저러고 있지 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사장의 요령은 라엘이 종교처럼 믿던 공정과 정직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에 불과했다.
 
그렇게 요령을 부려 낮엔 근사한 카페, 밤에는 고기뷔페를 운영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장의 요령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라엘과 엄마에게 '명당'을 추천하던 공인중개사는 경차를 타고 산등성이 길을 힘겹게 올라왔었지만 같은 방을 (라엘이 방을 뺀 뒤) 다음 순번에게 소개할 때 똑같은 안내를 반복하는 그의 차는 외제로 바뀌어 가뿐하게 언덕길을 오르내린다. 정보를 독점한 채 감언이설로 임대인을 현혹하는 공인중개사의 명당 주장을 고객이 검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의 처음 주장의 사실여부도 의심스러울 뿐이다.
 
물론 주인공이 다니던 입시학원 강사 역시 유들유들하게 학원 수업 외에도 인터넷 강의로도 진출해 요령 있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전히 매몰비용 개념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중이다. 하지만 그의 수업 내용은 어느새 조금 달라져 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패배자'에겐 매몰비용이지만 자신의 명성과 합격의 기대로 수업을 신청한 이들에겐 (그들 중 일부만 합격할 것이란 전제를 소거한 채)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기회비용'이라며 장밋빛 환상을 부추긴다. 결국 학문적 개념과 무관하게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의 경계는 합격여부로 환원되는, 심하게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요령'은 이렇게 타인을 속이거나 이용해먹는 존재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고기용 가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청춘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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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옥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영화의 첫 장면은 뜬금없는 돼지 축사다. '동물복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풍경, 손바닥처럼 비좁은 우리에서 제대로 몸 가눌 곳도 없이 사료로 배를 채우다 고기가 되는 존재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한 마리의 돼지만 우리 바깥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하지만 그 돼지가 다른 운명을 개척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런데 후속으로 이어지는 독서실에서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웅크린 고시생들의 풍경이 그 축사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게 다가온다. 공간이 비좁기에 누가 지나가게 되면 타인의 의자와 짐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구조. 기침을 자주 하거나 엎드려 잠을 자는 '민폐'를 끼치면 바로 공공의 적이 되는 엄중한 살풍경 속의 청춘들은 축사에 갇혀 상품이 될 운명인 돼지와 점점 다가서기 시작한다.
 
고기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과 고시생인 주인공의 시간대는 서로 교묘하게 맞물린다. 고기뷔페는 '프리미엄 한돈'만 취급한다고 선전하지만 과연 그 고기 품질이 홍보문구와 일치하는지 관객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프리미엄 자 붙은 날고기와 명문대 간판을 가졌지만 '그에 걸맞은' 결과에 닿지 못하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겹쳐진다. 편집증을 불러올 만큼 연속되는 프리미엄 돼지고기는 영화에서 의도한 카타르시스로 관객을 끌고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모세대의 종용과 우리 사회의 무책임한 분위기 아래 자신감을 상실한 채 수동적으로만 살아온 라엘/혜옥의 길은 결국 언제고 종말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주인공의 한계에서 출발해 몰락으로 치닫는 파탄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다소 전형적이긴 해도 거듭 반복되는 몇 가지 이미지들의 상징성을 통해 그런 위태로운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정체성 혼란을 견고하게 구현해낸다. 주인공은 계속 위로 오르려 한다. 그래서 신림동 언덕 빼기 비좁은 방을 찾고 거듭 고갯길을 뛰어오르며 고시합격과 인생역전을 꿈꾼다.
 
그런 신분상승의 열망은 라엘/혜옥과 엄마의 절대적인 꿈(인 동시에 한국사회 취업준비생이라면 누구나 공유될 감정)이다. 하지만 그들은 발 딛은 현실을 애써 외면해왔다. 발이 허공에 붕 뜬 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입된 코스로만 달리는 이 레이스는 도박의 요행과 별반 다르지 않은 꼴이다. 관객은 그런 냉엄한 현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독립영화계에서 믿고 보는 연기자인 이태경 배우가 온몸으로 전하는 주인공의 표류를 애처로워하며 부디 영화가 마침표를 찍은 뒤 극중 인물이 안식을 찾았기를 기원하게 될 것이다. 남의 일로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기엔 <혜옥이>가 구현한 풍경화는 너무나 세밀하고 상징적이다.
 
<작품정보>
 
혜옥이 Life of Hae-oak
2021|한국|하이퍼 리얼 스릴러
2022.12.08. 개봉|97분|12세 관람가
감독 박정환
주연 이태경(라엘/혜옥 역), 전국향(라엘/혜옥 엄마 역), 정상우(사장 역)
출연 조준희(진상손님 역), 임호경(공인중개사 역)
우정출연 조명남(이비인후과 의사 역), 전진우(학원 강사 역), 강 숙(희진 엄마 역)
제작 와이즈 앤 와이드 픽쳐스
배급 ㈜트리플픽쳐스
제공 와이즈 앤 와이드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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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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