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정순(김금순 분)은 식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직원들과 가끔 부딪히기는 하지만 별다른 큰 문제없이 오랫동안 근무해왔다. 유일한 걱정은 아무래도 딸이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둔 아이만 시집보내고 나면 더 이상 바라는 것 없이 삶의 무게를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키우느라 애도 많이 썼지만 그만큼 미안한 마음도 큰 것이 사실이다. 어느 날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일터에 새로 나오기 시작한 영수(조현우 분)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아줌마가 되어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남사스럽기도 한 정순. 모종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만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은 곧 공장에 퍼지게 된다. 행복하고 축하받을 일이 아닌 끔찍하고 잔혹한 소문으로 말이다.

정지혜 감독의 영화 <정순>은 중년의 한 인물을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로 설정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비밀스러운 감정과 시간이 세상에 유출되면서 삶 전체가 지옥이 되어버린 정순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는 주로 젊은 사람만이 성범죄의 피해자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누구나 그 대상이 되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다. 특정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였던 n번방 사건의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 문제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여있다. 영화는 한 인격체가 사회의 끔찍한 폭력에 무방비하게 놓인 과정을 그대로 지켜보며 그 안에 놓인 인물의 무력한 감정은 물론 가해자의 2차 가해와 수사과정에서의 비합리적인 회유와 처벌과 같은 사회 시스템적 문제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드러낸다.

02.
영화가 문제로 삼고 있는 핵심적인 사건은 합의되지 않은 영수의 행동, 은밀한 영상의 유포다. 속옷만 입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정순의 영상이 그에 의해 고의적으로, 정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 공장 내 젊은 친구들에 의해 하대 받고 성적으로 비하를 당하던 영수가 홧김에 두 사람 사이에서의 영상을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유출시켜버린 것이다. 너무나 정확하고 확실한 문제 제기로 인해 이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은 마치 이 사건 자체와 이를 따르는 이후의 이야기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사건 이전의 상황에 할애하고 있다. 이 문제가 일어나기까지의 단계, 소위 빌드업을 위한 장치를 꽤 정밀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이 사건에 뒤따르는 또 다른 문제들의 개연성을 미리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은 공장의 관리자인 도윤(김최용준 분)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일이다. 경우도 없고 위아래도 없이 관리자라는 직함 하나로 모든 직원을 하대하는 그는 공장의 젊은 무리를 이끌며 분위기를 흐린다. 공장을 오래 다닌 정순과도 사소한 문제로 대립하곤 하지만, 꼭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잘 보인 직원, 자신이 좋아하는 직원에게만 특혜를 주는 등의 치졸한 권력을 휘두른다. 이제 막 공장에 들어온 영수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태도만 보더라도 도윤이라는 인물이 어떤 성정을 갖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인 모멸감이다. 영수는 허리를 조심히 쓰라는 도윤의 얕은 도발에 넘어가 영상 유출이라는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도윤의 도발에 의한 영수의 그릇된 행동이 사건의 외부를 감싸고 있는 하나의 레이어라면, 그 내면의 레이어에는 정순과 영수 각각의 행동과 그 동기가 담긴다. 먼저 영수의 경우에는 자격지심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허름한 여관에서 달방 살이를 하며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스스로에 대한 낮은 자존감이다. 이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정순의 행동 혹은 거절의 의사에 대한 서운함과 무력감으로 치환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의 정황상 정순의 선택과 의사는 분명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종의 얕은 가스 라이팅 정도로도 보이는 영수의 행동과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정순의 영상이 그의 핸드폰에 저장되는 배경이 된다.

정순의 경우에는 이 나이에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하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과 오랜 공백 끝에 찾아온 새로운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기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저 남사스러운 마음에 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자신이 부족해 그런 것으로 오해하는 영수에 대한 감정이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던 침대 위에서의 은밀한 영상 촬영에 응하게 되는 이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딱히 내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바람을 들어준 것일 뿐.

평생을 혼자 살아온 배경과 이제 곧 결혼을 앞둔 딸, 그리고 집과 공장만을 오가는 틀에 박힌 일상은 정순에게 영수라는 사람의 존재를 생각보다 크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를 연기한 김금순 배우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뱃살도 늘어지고 엉덩이도 처진 아줌마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 않은가. 특히 사회적으로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수와 만나고 난 뒤에도 숨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아직은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04.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정순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는 우리가 지금껏 미디어나 뉴스를 통해 접해왔던 실제 사건 이후의 이야기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대상이 중년의 여성이라고 해서, 또 이 작품 속의 장면들이 만들어진 극 중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 사실을 축소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치부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사건의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쪽에 기운듯한 관계 기관의 태도,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척하며 선처를 요구하는 가해자의 태도가 정확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그녀의 딸인 유진(윤금선아 분)이 경찰서에서 마주하는, 그 공간에서 근무하는 이들조차 정순의 동영상을 돌려보며 낄낄거리는 장면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의식의 결여, 성숙하지 못한 의식에 대해 큰 경종을 울린다.

자신의 영상이 외부에 유포된 사실을 알게 된 정순이 웃음을 잃어버린 채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극장 내부의 모든 생기를 빼앗아버린 기분이 들 정도로 잔혹한 기분이 든다. 외부로부터 들여다 보일법한 창문을 모두 가린 것도 모자라 무엇으로라도 얼굴을 가리고자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마음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절망스럽게만 느껴진다. 여기에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이제 곧 결혼을 앞둔 딸의 미래에 대한 끔찍함도 놓여 있을 것이다. 이 장면 전까지 딸 걱정을 했으면 했지 자신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정순>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5.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런 정순이 혼자 던져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며 막역한 사이가 된 동료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자 하고, 딸은 집 밖을 나설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해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한다. 다만 이들에게 부여된 역할은 도움을 주는 것까지다.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정순이라는 인물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딛고 일어서는 쪽에 있다. 그 방향이 결과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놓여 있지 않다. 상의도 없이 가해자인 영수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엄마의 말에 유진이 강한 비난을 쏟아내는 장면은 가해자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처벌하는 것이 권선징악의 측면에서 더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정순은 이에 대해 정확히 맞서며 자신과 관련한 문제를 자신의 의지대로 해결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내 일이잖아. 내 일인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그 양반하고 놀아난 것도 나고, 찍은 것도 나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전부 난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왜 나는 네가 말하는 대로만 해야 해? 왜 나는 가만히 있어?"

이후 정순은 더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통과해 나간다.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세상의 시선에 정면으로 맞선 후에야 조금씩 일상을 되찾기 시작한다(그녀는 다시 공장으로 찾아가 사람들 앞에서 영상 속에 나오는 동일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물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찢어놓은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은 곳에 남겨져 있다.

횡단보도를 지나는 도윤과 공장의 젊은 직원 무리만 보더라도 머리부터 감추는 그녀다. 정순이 자신의 과거를 딛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평생을 딸 뒷바라지만 하며 공장과 집을 벗어나지 못한 그녀가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놓인 운전대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로.

무엇보다 이 모든 정순의 행동들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이 놓인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정순 정지혜 김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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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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