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Birth>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재이(한해인 분)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이제 막 두 번째 책 출간 계약을 마쳤다. 원고를 확인한 담당 편집자도 그녀가 멋지게 소포미어 징크스를 이겨냈다며 축하의 말을 건넨다. 재이의 동거인이자 애인인 건우(이한주 분)는 평범하지만 능력 있는 영어학원 강사다. 여자 친구처럼 특출난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덕에 전업 작가로서의 재이의 꿈도 지원하고 응원해줄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 결혼에 뜻이 없지만 지금 이대로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이의 몸에 이상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생리가 끝이 나지 않는다. 검사 결과, 착상혈. 벌써 12주가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영화 < Birth >는 원치 않았던 아이의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두 사람 재이와 건우에 대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평생 아이를 낳지 않고 좋은 원고를 쓰는 작가로 남고자 했던 한 여성의 삶이 임신과 출산의 문제 앞에서 어떤 변화와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지가 러닝타임 전체를 통해 그려진다. 몸 안에 자리 잡은 아이를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여성의 모습은 실제 현실 속에 놓인 임신과 출산과 관련한 여러 문제는 물론, 개인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서로 포개어질 수 있는가? 라는 조금 더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서로 다른 두 욕망이 걸음을 함께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02.
"나는 두 가지 일 못 해. 글만 쓰는 것도 힘들어."

어쩌면 문제는 자신을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를 한 상태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고, 때문에 사랑을 나누면서도 피임을 잊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임신을 하게 되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노력을 해온 셈이다. 남자가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호르몬과 신체 상태의 변화로 인해 육체적, 감정적 어려움을 피할 길이 없는 여자의 경우에는 더 그랬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병원에서 듣고 난 후에 행복함보다 불안함을 먼저 느끼고, 나아가 임신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까닭이다.

타이밍도 참 그렇다. 이제 막 두 번째 원고를 써내고 작가로서의 입지를 만들어 가는 시기.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때다. 가뜩이나 주변 동료 작가들이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난 뒤에 문단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봐온 재이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함께 살고 있는 건우와 공식적인 결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결혼이라는 관문을 지나고 나서 주위의 시선이 바라보고 떠밀 다음 관문은 너무나도 뻔하지 않나. 스스로 납득하지도 못하는 내용들을 글이랍시고 써놓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기에 그녀는 정말, 글만 쓰고 싶었다.

문제는 출산과 관련한 문제가 재이 혼자만의 결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건우의 의사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자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동의하기는 했으나 막상 임신을 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책임질 가정을 꾸리고 싶은 건우 때문이다. (자궁벽이 얇아 낙태 시술 도중 쇼크사 가능성이 있기에 병원에서 거절하는 이유도 있지만, 이는 그럼에도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재이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요소일 뿐이다.) 평생 글에만 집중해 작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라면, 건우와의 사이, 관계의 영역에서는 부모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갈등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Birth>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그녀가 자신의 인생만 생각하는 게 이기적이라는 건우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 왜 이기적인 일이냐고 되묻는 재이의 대립은 두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욕망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영화는 누구의 욕망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모습이다. 대신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욕망이 합의를 이루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무심하게 관찰한다. 서로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욕망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할까.

건우의 간곡한 설득과 부탁으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지만 재이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져 간다. 태아가 자라는 동안 바뀌어가는 자신의 몸도 이상할 뿐이고,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이전에 없던 부정적인 요소들이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는 것도 성가시기만 하다. 태아의 상태보다는 자신의 건강과 컨디션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이 아니라 태아에 대한 물음만 건네 오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도 짜증스럽다. 이제 막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듯 보였던 길목에서 임신 하나로 모든 것을 잃어가는 기분이 든다.

아이만 낳는다면 자신이 무엇이든 돕겠다던 건우는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다. 집안일부터 학원일까지, 이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신의 학원까지 직접 차리는 그다. 재이가 하고 싶다는 것도 거의 모두 들어준다. 문제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이 말 그대로 돕는 것일 뿐, 문제 자체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재이와 건우는 서로 다른 객체이며, 임신으로 인한 근본적인 재이의 문제를 건우가 없애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재이의 말대로 출산을 포기했어야만 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상을 품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남자의 마음과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았던 임신으로 인한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 여자의 마음.

04.
점점 망가져가는 재이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생각보다 그 상황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는 이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겁을 먹고 어렵게 임신 사실을 알렸던 담당 에디터는 물론, 처음으로 속을 터놓고 감정을 터뜨렸던 선배 작가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실제 임산부들이 겪는 급격한 심리 변화와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그대로 녹이면서 예술가 혹은 창작자들이 갖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와 현재의 위치에 대한 불안이 함께 놓여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임신을 이어가는 동안 쓴 신작의 내용이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한편, 건우의 이야기 속에는 조금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같은 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수습 선생님과의 이야기다. 불합리한 방식으로 소위 갑질을 하는 원장과의 문제로 도움을 청해 오는 윤 선생님을 도와주려던 그는 노동청에 신고를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원장실의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윤 선생님과 원장의 문제였지만, 이제 노동청에 신고가 되고 학원 전체의 문제가 되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게 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처음에 재이가 자신의 인생만 생각하는 게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던 건우다. 그의 모습은 지금 어떠한가. 그는 모두의 삶을 아울러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Birth>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5.
재이가 임신 중에 쓴 원고를 읽은 담당 에디터가 글이 좀 어수선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놓으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저희 팀원 중 하나가 작가님의 글을 읽고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대요. 아무리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까지 뱃속에 있는 아이를 미워할 수가 있을까? 하고요.' 이 이야기를 꺼낸 팀원이 재이를 직접 만난 후에 뒷담화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도 재이가 자신의 마음을 책에 그대로 드러낸 것일 테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서로 다른 욕망은 결국 부딪혀 모두 깨져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대해 나쁜 꿈을 하나 꾼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하지만, 꿈을 꾸고 깨어났다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도 참혹하다. 임신과 출산이 모든 것을 덮어놓고 행복하고 축복할 일이라고 말하던 시대의 시선에 하나의 큰 경종을 울리는 결말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여기에 누구의 잘못도 놓여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내내 그려내던 차갑고 서늘한 톤과 그 흔한 배경음 하나 깔리지 않던 적막한 배경이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 엔딩크레딧까지 이어지던 외로운 타자음 소리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