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요정> 포스터 이미지

영화 <요정> 포스터 이미지 ⓒ 싸이더스

 
한국은 비슷한 경제규모의 국가들 중에서도 최대 규모의 자영업자와 서비스업 비중을 갖는 나라다. 제조업에 비해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소비심리가 위축되면 추풍낙엽처럼 경제가 흔들리곤 한다. 정규직과 평생고용 개념이 전설처럼 사라져버린 요즘,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사장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어깨를 으쓱할 일이 아니라 모든 난관을 오직 홀로 헤쳐 나가야만 하는 망망대해에 떨어진 느낌이 된 지 오래다.
 
커피전문점, '카페'는 소규모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 가장 만만하게 도전을 꿈꾸는 업종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다. 어느새 주택가 깊숙한 곳까지 카페가 꽉꽉 들어차 있는 풍경을 목격하면, 대체 저 많은 카페가 유지되기 위해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사서 마셔야 할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한국인은 1년 기준 평균 367잔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1일 1잔'에 2잔이 덤으로 붙은 격이다. (1위는 프랑스로 연간 551잔, 세계 평균은 161잔) 하지만 통계로 잡히는 인구대비 전문점 숫자는 한국이 부동의 1위다. 인구 100만 명당 1,384개를 기록 중이다. 2위인 일본이 529개라 하니 2배는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야말로 '커피 공화국'이다.
 
하지만 3곳이 신규 창업되면 2곳은 문 닫을 준비를 할 만큼 카페 창업은 '레드 오션'이 된 지 오래다. 상대적으로 투입비용이 적고 1인 운영이 용이해 각광받지만 결국 확실하게 이익을 남기는 건 인테리어업자 밖에 없다는 자조가 들려올 정도다. 그런 가운데 별별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영화 <요정>은 어쩌면 이런 경우도 생길지 모른다는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가게 매상이 부부간에 위계를 형성하다
 
 영화 <요정> 스틸 이미지

영화 <요정>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영란과 호철은 서울에서 좀 떨어진 경기도 소도시(실제 촬영은 파주에서 진행되었다)에서 한 동네 바로 길 건너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경쟁하던 사이다. 치열하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동병상련으로 퇴근 후 한잔 합석하다 마음이 통해 결혼에 골인한 상황. 이제 두 사람은 한집에 살지만 아직 각자의 카페 임대계약이 한참 남아있다. 건물주가 굳이 임대차 계약을 자진해서 수정해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러하기에 둘은 출근하면 도로 예전과 똑같이 경쟁관계가 되는 기이한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물론 그래봐야 작은 동네상권에서 일인카페 운영으로 도토리 키 재기 하는 정도다. 그렇지만 영란의 가게 매상이 늘 호철보다 우위에 있는 편이다. 과거의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인지 이 영업수익 격차는 작은 위계질서로 부부 사이에 작동한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순번은 매상이 열등한 이의 몫이다. 그래서 거의 항상 호철이 '귀차니즘'을 감내하며 봉투를 쥐고 대문을 나서는 신세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투덜거리는 표정은 은근 심각하다.
 
호철은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이혼을 했다. 아내와 어린 딸과는 소원한 상태다. 영란은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던 나이차 한참 나는 언니네 가족이 계속 사고를 치는지라 뒷수습에 지쳐 있던 참이다. 그렇게 돌싱과 올드미스가 하루하루 2020년대 한국사회 자영업자의 길을 외롭고 적적하게 보내던 참에 일과 후 한잔 기울이는 낙으로 어울리다 합친 셈이다.
 
둘은 20대 초반만 지나면 각박한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을 공유한다. 변두리 소소한 1인 가게로 삶을 이어가지만 흔히 상상하는 '느리게 살기'와 둘의 사고는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 가게를 유지해야 하고 주변인들의 삶까지 신경 쓰며 도와야 하는 처지다. 그런 긴장이 극단적 현실 묘사 대신에 적당한 블랙유머처럼 표현된 게 일일매상실적에 따른 가사 분배다. 즉 보기엔 코믹해도 이 관계구도는 현실의 신랄한 은유로 기능한다.
 
'변장한 천사'가 내려오는 바람에 시작된 변화
 
둘은 오늘도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기분전환을 하지만 잘 마시고 나서가 문제다. 운치 있는 가게를 찾다 보니 제법 멀리 와버린 것. 대리운전비만 10만 원은 족히 나올 거리다. 하루 매상 몽땅 갖다 바쳐야 할 판이다. 부부는 위험한 결심을 한다. 차를 직접 몰겠다는 것이다. 몰래 음주운전으로 동네까진 탈 없이 도착하긴 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골목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을 치어버린 것이다. 둘은 술도 마신데다 쓰러진 이가 겉보기엔 별 부상이 없어 보이기에 일단 음주 흔적이라도 지우고 처리할 생각에 집으로 데려온다.
 
다행히 별 후유증 없이 깨어난 그 청년은 부부가 음주운전을 했다는 걸 전부 간파한 상태다. 졸지에 부부는 코너에 몰린다. 하지만 청년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조건을 건다. 당분간만 이곳에서 머물겠다는 요청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부는 청년과의 기이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호철의 카페에서 일을 돕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청년, '석'이 뭐 달리 별것을 한 것도 아닌데 그날부터 영란의 카페보다 장사가 영 안 되던 호철의 가게 매상이 3배로 껑충 올라버린다.
 
하루아침에 경제적 위상이 역전된 부부는 일상생활에서도 관계가 뒤바뀐다. 음식물 쓰레기 당번으로 상징되는 권력서열부터 대격변이 불어 닥친 꼴이다. 호철은 영란에게 은근히 짓눌리던 신세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며 거들먹거린다. 그동안 수입도 시원찮은데다 부부 통장을 합치는 바람에 감히 엄두도 못 내던, 헤어진 전 부인과 어린 딸에게 생활비도 보낸다. 반면에 영란은 늘 말썽을 일으키던 언니네 가족에 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정신이 없다. 호철의 물 만난 행태와 신랄한 핀잔은 이전에는 영란이 꽤나 남편을 몰아붙였음을 암시한다.
 
영란은 호철이 자신이 우위에 있던 통제권에서 벗어나자 참을 수 없다. 내내 그 원인을 추리하고 또 추리해보니 석의 존재가 열쇠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둘은 평소 서로에게 갖던 불만을 되새김질해가며 부부간의 위계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립하고자 안간힘을 써가며 온갖 책략에 나서기 시작한다.
 
동서고금의 우화와 직결되는 판타지 동화
 
 영화 <요정> 스틸 이미지

영화 <요정> 스틸 이미지 ⓒ 싸이더스

 
<요정>은 우리가 어릴 적 읽곤 했던 몇 가지 옛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그 첫 번째는 레프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출발한다. 빈부격차가 근심하던 제정 러시아 시절, 가난한 구두수선공인 세묜과 마트로냐 내외가 어느 겨울날 길에서 얼어 죽을 위기를 구해낸 신원불상 청년 미하일과 함께 지내며 겪는 이야기다. 실은 미하일은 하느님의 뜻을 자의로 거역한 뒤 벌을 받아 날개를 잃고 추방된 신세의 천사였다. 그렇게 노부부의 자비로 그들의 집에서 구두수선공의 일을 하게 된 변장한 천사가 이들과 몇 년을 함께 살며 행운을 가져다준 후 어느 날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홀연히 사라진 바로 그 이야기다.
 
두 번째는 그림형제의 전래동화 중 "어부와 그의 아내" 이야기다. 아내와 함께 허름한 오막살이에서 살며 그날그날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가난한 어부는 낚시를 하던 중 사람의 말을 하는 넙치를 잡았다 불쌍히 여겨 그냥 놓아주고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얼른 다시 찾아가 넙치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 소원의 결과로 부부는 처음엔 아담한 집을, 그 다음엔 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는 어부와 달리 그의 아내는 왕이, 황제가, 교황이, 급기야는 신의 지위를 얻길 원한다. 결국 과욕의 전형적인 결말처럼 마지막에 다시 그들 부부는 원래의 오두막 신세로 돌아가고 만다.
 
실은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자선을 베풀라는 것과, 굴러온 행운에 만족하고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경계의 뜻이 담긴 우화나 금언은 세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 <요정>은 그런 동서고금의 보편적 설정을 21세기 대한민국 현실로 가져온다. 골목상권 내에서 경쟁해야 하는 부부 사이에 어느 순간 새처럼 날아 들어온 신비한 존재가 작은 행운을 물어다주고 두 사람이 이에 반응하는 전개다.
 
영화는 교훈적인 전래동화에 현실 자영업자들의 무한경쟁 구도를 통합하는 모양새로 진행된다. 영화의 제목은 사실상 스포일러 형태로 이야기의 결말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눈썰미 좋은 이들이라면 금방 본 작품의 판타지 요소를 간파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충 짐작하더라도 굴러들어온 행운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각자의 욕망을 내세우며 암투를 벌이는 영란과 호철의 실태는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에게 쓴웃음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둘이 각자 잠재된 욕망을 우연한 행운에 기대 욕심내지만 그 수준이란 게 거창한 게 아니기에 피식거리며 보는 재미가 있다. 온갖 사고연발 끝에 두 사람이 도달한 결론은 영화를 보고 판단할 문제다.
 
요즘 세태를 투영하는 사회풍자 요소를 적절히 가미했지만 <요정>은 가벼운 코미디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신비한 존재의 등장과 퇴장은 톨스토이의 단편을, 두 부부가 돈맛을 보면서 서로가 기존의 위계권력을 전복하려 궁리하는 점에서는 그림동화의 결말을 자연스럽게 따르면서 교훈을 주는 현대판 우화 형식으로 난이도 높지 않은 소박한 판타지를 펼쳐 보인다. 공중파 드라마와 상업영화에서 찾을 수 있던 중량감 있는 주연배우와 독립영화계에서 검증된 조역들이 어우러지는 조합도 무난하게 편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장편으로는 길지 않은 분량 내에 간단하지만 훈훈한 뒷맛을 남기는 <요정>은 한겨울이 다가오는 이때 큰 부담 없이 누리기에 적절한 톤으로 다가오는 소품이다.
 
작품정보

요정 Fairy
2021|한국|드라마
2022.12.01. 개봉|79분|12세 관람가
감독 신택수
주연 류현경(안영란 역), 김주헌(한호철 역), 김신비(석 역)
출연 김금순(안주란 역), 공상아(설상아 역), 이종윤(염동근 역), 가수민(염자영 역),
이지안(설유진 역), 오재균(건물주 역), 김애령(면접생 역)
제작 K'ARTS
배급 싸이더스
공동배급 ㈜블루라벨픽쳐스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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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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