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버드 포스터

▲ 파이어버드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1970년대 소비에트연방 소속 에스토니아 공군기지는 삼엄한 냉전의 분위기만큼 경직돼 있다. 당직사령은 매일 아침 병사들을 쥐 잡듯이 잡는다. 폭력과 욕설에 무방비로 노출된 병사들은 그 앞에서 생쥐처럼 벌벌 떤다. 병사들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생각이며 자유며 취향 같은 단어는 설 자리를 얻지 못한다.
 
징집돼 복무 중인 일병 세르게이(톰 프라이어 분)는 맑은 영혼을 가진 청년이다. 이 삭막한 부대에서도 그에겐 숨 쉴 구멍이 몇 있다. 가까이 지내는 전우 볼로댜(제이크 핸더슨 분)와 루이자(다이애나 포자르스카야 분), 이따금씩 그들과 함께 하는 일탈, 그리고 취미인 사진찍기다. 특히 사진은 그에게 남다른 즐거움을 준다. 찍은 필름을 현상할 곳도 마땅치 않지만 그는 한 장 한 장 공을 들여 촬영버튼을 누르곤 하는 것이다.
 
볼로댜는 루이자에게 관심이 있지만 루이자는 좀처럼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세르게이와 그녀 사이엔 미묘한 감정이 흐르지만 그것이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찌됐든 청춘의 세 남녀가 엄격한 군부대 안에서 이따금씩 일탈을 즐기니 애정이든 우정이든 관계는 깊어질 밖에 없다.
 
이들의 일상은 한 사건 이후 완전히 뒤바뀌어버린다. 부대에 전투기 조종사 로만(올렉 자고로드니 분)이 전입을 오면서다. 매력적인 장교 로만의 등장에 부대의 여심이 술렁인다. 루이자도 마찬가지, 그녀는 단번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거듭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로만의 태도에 루이자는 실망하지만, "그는 남들과 달라" 하는 동경 역시 커져만 간다.
 
파이어버드 스틸컷

▲ 파이어버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냉전시대 군에서 싹 튼 금지된 사랑
 
문제는 로만과 세르게이 사이에서 싹튼다. 세르게이와의 첫 만남부터 사진기에 관심을 드러낸 그는 사실 사진에 남다른 취미가 있다. 현상할 수 있는 도구까지 갖춘 그의 방에 세르게이가 몰래 드나들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다. 로만은 세르게이의 사진을 현상해주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매료된다. "너의 시선은 특별해" 하는 그의 말은 둘 사이의 관계를 단박에 좁혀버린다.
 
계급을 뛰어넘어 친해진 관계는 마음껏 부대를 넘나드는 과정을 통해서 더욱 깊어져 간다. 로만은 장교의 지위를 이용해 세르게이에게 수행을 맡기고 둘은 시내로 나가 공연을 보고 관광을 하며 더욱 친밀감을 쌓는다. 그리고 둘 사이엔 특별한 순간들이 이어지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기에 이른다.
 
동성의 사랑을 다룬 퀴어영화로서 둘의 사랑에 설득력이 있느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퀴어영화를 딱히 좋아하진 않는 관객이지만, 이성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에서도 설득력은 생각만큼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정이란 어느 순간 다가와서 순식간에 젖어드는 것인지라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완전한 설득은 어려운 노릇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아는 사랑의 방식대로 으레 그러려니 하고 믿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던가. 바로 그것이 멜로영화에 누구나 호감을 느낄 법한 예쁘고 매력적인 배우들을 쓰게 되는 이유이고 말이다.
 
파이어버드 스틸컷

▲ 파이어버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퀴어를 넘어 사랑을 말하다
 
영화는 세르게이와 로만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다. 군법으로 동성애를 금하는 엄격한 분위기 가운데 둘의 사랑은 거듭 위기를 맞이한다. 주변의 투서와 정보기관의 감시,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이며 기대의 좌절 등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가운데 세르게이와 로만의 사랑이 거듭 헛발질을 한다. 여느 퀴어 영화가 그렇듯 전통적인 가치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저의 성향을 놓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고, 그 위에 애타는 멜로영화의 엇갈린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둘은 거듭 고통 받고 실망하며 서로를 그리워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둘의 이야기는 사랑과 억압과 선택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 선택의 순간마다 세르게이는 진솔하게, 로만은 사려 깊게 나아가려 하지만 둘 중 어느 선택도 서로를 온전히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시대고, 그런 조직이며,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끝내 행복을 쟁취하지 못한다.
 
근래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성으로 바꾸면 별반 내보일 것 없는 아쉬운 퀴어영화가 적지 않았다. 영화적 완성도에 비해 퀴어라는 설정만으로 승부하려는 부족한 작품들 앞에서 퀴어영화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온 게 현실이다.
 
파이어버드 스틸컷

▲ 파이어버드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러시아의 상영금지, 소수자 예술계는 환호
 
<파이어버드>는 동성애에 대한 탄압 못지않게 작품성으로도 호평을 받았단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70년대 에스토니아 영화가 영어로 연출됐다는 아쉬움에도 배우들의 연기며 실화에 기초한 탄탄한 구성 등이 어느 모로 보아도 썩 괜찮은 작품이란 평가를 내릴 만하다. 성소수자들 입장에선 간만에 나온 제법 볼 만한 저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도 한몸에 받았다.
 
갈수록 우경화되는 러시아의 현실 가운데서도 이 영화의 시사점이 적지 않다. 2019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레토>가 체제에 대한 비판이란 평가 아래 상영에 어려움을 겪은 것을 시작으로 <파이어버드> 역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상영취소 등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특히 동성애 반대자들의 격렬한 반대시위로 상영이 위축됐단 점은 다름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 러시아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로 주목됐다.
 
스웨덴 망명 감독이 그린 퀴어영화로 옛 소련 소속 조지아의 보수성을 비판한 2020년 작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피터 리베인의 2021년작 <파이어버드> 등이 연달아 화제가 되는 현 상황은 과거의 질서와 새로운 세대가 첨예하게 맞부닥치는 이들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단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