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 NEW


 
약 17년의 시간 동안 무산된 작품만 10여 편. 육상효 감독의 <달마야, 서울가자>(2004), 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2005)의 조감독을 거친 안태진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경력에 비해 단출해도 너무 단출하다. 하지만 영화계에선 그를 끈질기고 능력 있는 연출부라고 평가한다. 말 그대로 '암약'했던 그가 <올빼미>라는 작품으로 상업영화 연출 데뷔를 알리며 관객과 만나게 됐다.
 
시작은 주맹증(낮엔 보지 못하고 밤엔 일부 볼 수 있는 증상)을 앓고 있는 한 악사가 궁궐에 들어가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4년 전 제작사로부터 받은 시놉시스를 두고 안태진 감독은 주맹증이라는 설정만 둔 채 전면 수정했다. 시대 배경 또한 인조 때로 구체화했고, 그렇게 주맹증 침술사(류준열)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우연히 목격하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안태진 감독은 <올빼미>를 '목격자 스릴러'로 정의하고 있었다.
 
기대를 배신하다
 
"인조실록에 소현세자 죽음을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고 표현돼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적힌 그 어떤 문구보다 강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로 강한 의심이 담겼다면, 쓴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심정을 따라가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여기에 주맹증이라는 설정에서 어떤 목격자적 성격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극이라기보단 다분히 스릴러라는 장르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었지만, 안태진 감독에게 인조 시대는 주맹증이라는 설정만큼 중요해 보였다.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등장하던 시기에 신문물을 경험한 소현세자, 그리고 왕위에 전전긍긍하며 점점 미쳐 간 인조는 그만큼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중화의 패권이 바뀐다는 건 당시 조선 입장에서 보면 시대가 바뀌는 것과 같았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그 흐름을 목격했고, 인조는 일종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거지. 두 인물의 충돌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다만 메시지가 많은 영화보단 좀 더 장르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관객분들이 충분히 즐기셨으면 했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작은 질문 하나 정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사극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게 아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사극이 그런 시대성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잖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도 있고, 그런 게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사람들이 사극을 소비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저는 그 길과 반대로 간 거지."

  
 영화 <올빼미>의 한 장면.

영화 <올빼미>의 한 장면. ⓒ NEW


 
감독의 구상을 완성하는 건 배우의 몫이었다. 특유의 편안함과 코믹함으로 잘 알려진 유해진을 인조로, 에너지 있는 청춘의 상징인 류준열을 침술사 경수로 캐스팅한 것 또한 대중의 기대나 정형화 된 이미지를 깨는 선택이었다. 안태진 감독은 "바로 그 (대중의) 선입견 때문에 캐스팅했다고 볼 수도 있다"며 말을 이었다.
 
"품위 있고, 정제된 언어를 쓰는 왕이 아닌 인간적 약점, 불안감이 있는 왕을 그리고 싶어 정반대로 캐스팅한 셈이다. 유해진 배우가 가진 따뜻함, 그 웃음을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그런 그가 연기하는 왕은 기존과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첫 미팅 때 '왜 나야?'라고 물어보시더라. 유해진만이 할 수 있는 왕이 있다고 답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라.
 
(<왕의 남자> 때 함께한 이후) 거의 10여 년 만에 뵀는데, 안부는 차치하고 이미 인조에 빙의된 상태였다. 전 유해진 배우를 만나러 온 건데 인조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전에 류준열 배우를 캐스팅 한 상태였는데 이미 류 배우가 하기로 한 뒤엔 캐스팅에서 큰 고민을 안 했다. 기대를 전복하는 쪽으로 가자고 마음 먹었던 거지."


치열했던 현장
 

역할이 역할이었기에 현장에서 배우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유해진은 "다른 현장과 달리 흰소리도 안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고 말한 바 있고(관련 기사: "영화 첫 장면 바꾸자고 했다" 감독 조른 유해진의 속사정), 류준열은 촬영 전 감독과 함께 주맹증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연기를 잡아가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하려 했다. 여기엔 배우와 스태프들의 의견을 끌어내어 수용하려 한 감독의 의지도 있었다.
 
"아이템을 처음 받았을 때 사실인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주맹증이 존재하는 건 맞는데 자료는 많지 않더라. 어렵게 수소문해서 류준열 배우와 실제로 주맹증이 있는 분들을 만났다. 빛이 있으면 까맣게 보이는 건지, 어떤 식으로 시야가 제한되는지 이것저것 여쭤봤다. 덕분에 경수가 볼 수 있을 때와 안 보일 때 카메라 시선을 다르게 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겼지.
 
현장에서도 배우와 스태프들이 절 가만두지 않았다(웃음). 저도 계속 의견을 확인했거든. 리허설을 하면서 여러 세부사항을 다듬곤 했다. 크랭크업 이틀 전까지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했던 것 같다. 유해진 배우님은 정말 1번부터 8번까지 세밀하게 연기를 준비해오셨다. 제가 골라 쓰면 될 정도였다. 특정 신에선 보조 출연자분들에게까지 맥락을 설명해주시고, 분위기를 잡아주시곤 했다. 류준열 배우 또한 본인이 주인공으로서 뭘 책임질지 아는 사람이라 자기 역할뿐 아니라 현장 분위기를 잘 끌어내곤 했다."

 
이 대목에서 안태진 감독은 행운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모든 스태프들이 베테랑이라 저만 잘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며 "연출 데뷔 준비를 오래했는데 이렇게 한 번에 좋은 기회가 온 건 정말 행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 NEW


  
30대 초 한국영화계에 들어온 그는 잠시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연출의 꿈을 접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달밤> 이후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고 하며 지낸 지 17년이 지나 데뷔하게 됐다. 뚝심이라는 기자 표현에 "제 뚝심이기 보단 기다려 준 가족의 뚝심 덕"이라고 그가 화답했다.
 
"지난 17년 간 거의 매일 의심했던 것 같다. 제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말이다. 데뷔가 너무 늦었나 생각했던 게 10년 전이라 그 이후엔 늦었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고 산 것 같다. 지금의 <올빼미>는 제 능력이라기보단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 채워준 결과물이다. 캐스팅 확정 이후 제 의지와 별개로 작품이 쉼 없이 달려가더라. 지금까지도 얼떨떨하다. 이게 데뷔한 기분인 건가?(웃음)"
 
1987년 7월 17일 오후 3시 40분. 안태진 감독이 스스로 영화에 온몸과 마음을 던지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영화 <백 투 더 퓨쳐>를 본 직후의 기억을 그는 정확히 새기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 이후로 취향은 변했을지언정 그런 환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올뻬미> 이후로 안태진 감독은 SF 스릴러물을 쓰겠다는 계획을 살짝 내비쳤다. 영화와 첫사랑에 빠진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그의 차기작이 사뭇 궁금해진다.
올빼미 유해진 류준열 안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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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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