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선보였을 때만 해도 봉준호 감독은 열정만 앞선 신인 감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이 개봉하면서 봉준호 감독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지금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 그리고 로버트 패틴슨, 마크 러팔로 같은 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거장'이 됐지만 여전히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으로 <살인의 추억>을 꼽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1988년 데뷔작 <피위의 대모험>을 선보였을 때까지만 해도 개성 있는 신인 감독이라는 평가에 머물렀던 '괴짜' 팀 버튼 감독도 차기작 <비틀쥬스>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사실 <비틀쥬스>는 국내에서는 극장개봉도 하지 못하고 <유령신부>라는 제목으로만 비디오 출시됐다. 하지만 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비틀쥬스>는 74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며 팀 버튼 감독을 할리우드에 정착시켰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이처럼 영화계에서는 봉준호 감독이나 팀 버튼 감독처럼 데뷔작으로 다소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해도 두 번째 작품을 통해 평가를 뒤집거나 정상급 연출가로 도약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는 '쌍천만 감독' 최동훈 감독도 마찬가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으로 범상치 않은 재능을 뽐냈던 최동훈 감독은 2006년에 선보였던 두 번째 작품 <타짜>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한 감독으로 도약했다.
 
 <타짜>는 2015년 <내부자들> 개봉 전까지 9년 동안 만화원작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지켰다.

<타짜>는 2015년 <내부자들> 개봉 전까지 9년 동안 만화원작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지켰다. ⓒ CJ ENM

 
관객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은 도박영화들

도박이란 반드시 근절돼야 할 사회악이지만 사실 도박만큼 영화에 녹여내기 좋은 소재도 흔치 않다. 단 한 번의 승부에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수천억 원의 거액ㅇ 오가고, 심지어 주인공들의 신체와 목숨까지 담보하는 등 관객들의 긴장감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반전상황을 연출하기도 용이하다. 따라서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는 한국과 할리우드, 홍콩 등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제작돼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1995년 허영만 원작의 < 48+1 >이 흥행실패한 후 한 동안 도박영화 제작이 뜸했지만 <타짜>의 흥행 이후 도박영화가 드문드문 만들어지고 있다. <타짜>보다 조금 앞선 2006년 9월에는 고 이규형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된 포커영화 <굿 럭>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고 2016년에는 볼링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 <스플릿>이 만들어졌다. 흥행성적은 크게 아쉬웠지만 작년 연말에는 이채영과 정혜인 주연의 <여타짜>가 개봉하기도 했다.

사실 도박영화가 가장 크게 성행한 나라는 바로 홍콩이었다. 1989년 '영원한 따거' 주윤발이 쌍권총 대신 카드를 들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타짜를 연기했던 <도신-정전자>가 있었고 유덕화는 '도협'이라는 타이틀로 여러 도박영화에 출연했다. 진지하고 비장한 도박영화에 코미디 한 스푼을 첨가한 영화 <도성>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주성치는 90년대 수 많은 누와르 전문 배우들 사이에서 홍콩 최고의 흥행배우로 군림했다.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대표적인 도박소재의 영화는 197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무려 7개 부문을 휩쓸었던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스팅>을 꼽을 수 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4년 만에 재회해 만든 <스팅>은 도박을 소재로 한 여러 오락영화의 클리셰들이 시작된 작품으로 훗날 <오션스> 시리즈와 한국영화 <도둑들> 등 많은 작품들에 영향을 끼쳤다.

1996년에는 명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만나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카지노>를 선보였다. <카지노>에서 사기 도박꾼을 연기한 샤론 스톤은 <카지노>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 밖에 맷 데이먼의 풋풋하던 시절을 볼 수 있는 <라운더스>와 도박판이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 <  007 카지노 로얄> 등도 도박을 소재로 만든 할리우드 영화다.

김혜수의 명대사, 애드리브 아니었다
 
 조승우(오른쪽)와 유해진은 <타짜>를 통해 최고의 콤비연기를 선보였다.

조승우(오른쪽)와 유해진은 <타짜>를 통해 최고의 콤비연기를 선보였다. ⓒ CJ ENM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허영만 화백의 동명만화 중 1부 <지리산 작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작 만화는 1930년대 말 지리산 일대에서 태어난 '고니'라는 주인공이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최고의 도박꾼이 되고 깨끗하게 손을 씻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많은 각색과정을 거쳐 원작 만화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독창적인 <타짜>를 탄생시켰다.

영화 <타짜>가 개봉한 2006년 당시 주인공 조승우는 한국나이로 27세 청년이었다. 이제 막 여러 작품에 출연하면서 연기를 배워가야 할 시기에 조승우는 김곤이라는 캐릭터를 자신의 색깔에 맞게 재창조했다. 실제로 고니는 조승우라는 배우와 만나 영화 속에서 아귀(김윤석 분)와 평경장(백윤식 분) 같은 쟁쟁한 타짜들은 물론이고 곽철용(김응수 분) 같은 무서운 깡패 앞에서도 여유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사실 원작만화에서 정마담(김혜수 분)은 고니에게 도박판의 생리를 알려주고 여러 설계를 담당하는 조연급 캐릭터였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정마담 역에 김혜수라는 스타배우를 캐스팅했고 김혜수는 정마담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을뿐 아니라 영화의 해설 역할까지 맡으며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했다. 참고로 <타짜> 최고의 명대사이자 김혜수의 애드리브로 알려졌던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사실 애드리브가 아닌 대본에 있는 대사였다고 한다.

전국 680만 관객을 모은 <타짜>는 2015년 <내부자들(감독판 포함 900만)>, 2017년 <신과 함께- 죄와 벌(1440만)>이 나올 때까지 만화원작 영화 최고흥행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타짜>는 도박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대사가 패러디 소재로 쓰였을 만큼 세대를 뛰어 넘어 큰 사랑을 받았다.

2014에는 <과속스캔들>과 <써니>의 강형철 감독이 만들고 최승현과 신세경이 주연을 맡은 2편 <타짜 - 신의 손>이 개봉했다. <타짜- 신의 손>은 400만 관객을 모았음에도 최동훈 감독이 연출한 전편과 비교되며 관객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2019년에 개봉한 박정민, 류승범 주연의 3편 <타짜 - 원 아이드 잭>이 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으면서 뒤늦게 <타짜-신의 손>에 대한 관객들의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모두 <타짜>의 주역
 
 호구를 연기한 권태원(오른쪽)은 정마담을 "예림이"로 부르며 관객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호구를 연기한 권태원(오른쪽)은 정마담을 "예림이"로 부르며 관객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 CJ ENM

 
<타짜>에는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모두 영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지만 아귀를 제외하면 가장 존재감이 강했던 조연은 역시 고니의 파트너 고광렬(유해진 분)이었다. 고광렬은 자신이 타짜라고 자신 있게 떠들지만 소심하고 소시민적인 면모를 보이며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고광렬은 영화 후반부 아귀에게 속임수를 쓰다가 험한 꼴을 당하지만 속편에서 함대길의 스승 역할로 재등장한다. 

원작에서 근엄하고 신비로운 느낌의 도사 같은 인물로 나왔던 평경장은 영화에서는 백윤식이라는 배우를 만나 더욱 친근하고 코믹한 느낌의 인물로 재탄생했다. 평경장은 고니에게 화투를 가르치는 스승을 넘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고니가 평경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평경장은 "아버지가 머이가? 삼촌이라 부르라"고 대답하며 싫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김응수가 연기한 곽철용은 <타짜>에서 '중간보스' 격으로 등장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도 더 지나 새롭게 재조명 받은 캐릭터다. 특히 "네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 마, 그 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같은 대사들은 여러 예능프로그램과 온라인에서 패러디됐다. 특히 "묻고 더블로 가"는 곽철용의 시그니처 대사가 되면서 김응수는 이 대사를 활용해 햄버거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각종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사장, 회장, 국회의원, 파출소장, 법조인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 권태원도 <타짜>에서 정마담에게 설계를 당하는 호구를 연기하며 조금은 늦게 관객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정마담을 끝까지 "예림이"라고 부르며 "내가 예림이 때문에 인생을 다시 느껴", "예림아, 우리 오래 가자" 같은 간지러운 대사들을 쏟아내며 능청스러운런 연기로 관객들에게 많은 웃음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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