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민담에는 '불새'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자신을 만나는 이들에게 고생 끝에 행복을 주는 존재다. 20세기를 수놓은 위대한 음악가 중 한사람, 러시아 출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20대에 파리 유학 중인 1910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발레곡 "불새"를 자신이 어릴 적 읽고 들었을 민담 내용을 바탕으로 창조해낸다. 재능을 인정받고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란 격동의 세월 탓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거듭하던 중 50여 년이 지난 1962년에 고향에 방문할 기회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민담을 각색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마왕의 성에 도착한 왕자가 마왕의 정원에서 황금사과를 먹으려던 불새를 잡았다가 자비심에 놓아준다. 마왕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왕자를 불새가 도와준 뒤 왕자는 마왕을 처치하고 공주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불새는 마왕과 부하들을 강력한 힘이나 마법으로 물리치는 게 아니라 예술의 힘으로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이 슬라브 민담과 그에서 비롯된 불후의 명곡 내용은 영화 <파이어버드>의 맥락과 자연스럽게 통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억압된 소련 체제 하에서 그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열정과 사랑을 "불새" 공연을 함께 보며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냉전의 한복판, 소련군 최전방 기지에서 일어난 일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1977년 냉전의 한복판이던 소련 치하 에스토니아 공군기지. 수시로 스크램블 경보로 긴장감이 감돈다. 그런 기지 풍경 속에서 한 달 후 전역을 앞둔 징집병 세르게이와 동료들이 눈에 띈다. 각자 전역 후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 세르게이는 재능이 뛰어남을 인정받아 기지 사령관의 장기지원 공유를 받지만 사양한다. 예술을 사랑하고 자유를 동경하는 성향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토가 군사훈련에 돌입하고 동서 진영 간 긴장은 고조된다. 유사시에 최전선에 위치한 이 기지에 긴급대응을 위해 전투기 조종사인 로만 중위가 파견된다. 그는 장래가 촉망받고 국가에 대한 사명감에 불타는 소장파 장교다. 우연하게 서로 얼굴을 익힌 뒤, 사진 현상 때문에 둘은 금방 가까워진다. 둘은 예술을 향한 공감대 덕분에 삭막한 전방 군사기지의 일상을 떨치고자 종종 어울리며 취향을 공유한다.
 
서방진영 공군기의 돌발 출현에 기지에선 로만이 탑승한 기체를 포함해 미그-21 전투기 편대에 비상출동을 지시한다. 야간에 급박하게 진행된 공중기동 중에 로만의 기체는 고장으로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세르게이는 그를 구하고자 뛰쳐나가지만 비상착륙장비의 고장으로 사색이 된다. 다행히 로만은 무사히 구조되지만 구사일생으로 감정이 고양된 둘은 그날 밤 위험한 선을 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이들은 커플이 된다. 하지만 당시 소련 형법 121조는 '부적절한 성적 취향과 행위에 대해 5년의 금고형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전방 군사기지 내에서는 일상이 감시 대상이었고, 곧 부대 내 정보책임자인 소령은 누군가의 투서를 받고 로만을 추궁한다. 한번 의심을 품은 소령은 집요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둘은 위기감에 서로를 멀리하다 끝내 참지 못하고 만나기를 거듭한다. 과연 이들은 냉전의 한복판에서 무사히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개인의 열망과 사랑을 권력이 통제할 수 있는가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선택과 용기를 종종 드러내곤 한다. 물론 많은 경우 그런 금단의 시도는 패배와 상처로 귀결되는 슬픈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결말이 그렇다고 그런 도전이 그저 부질없는 만용이나 몽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소박한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해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권력이 억압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파이어버드>는 해당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영화의 출발이 된 회고록은 에피소드의 한 당사자인 세르게이가 시대적 강요에 의해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고백한 실화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전방 군사기지에서 시작된 동성연인 커플의 비밀스러운 사랑과 이별의 5년 기억은 픽션의 상상력을 가뿐히 초월해 버린다.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에 가득한 가운데 둘은 그런 환경을 인지하고 순간순간 주저하면서도 온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아니, 포기할 수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보는 이들마저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그런 위기상황이 수시로 펼쳐져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그 과정을 통해 관객은 실제 겪어보지 못한 통제사회와 병영국가의 일상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간접체험하게 된다.
 
둘은 각자 사회가 허락하는 방향대로 나아가면 당시 소련체제 내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벼락처럼 떨어진 순수한 운명적 사랑을 끝내 거역할 수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픽션이라면 허용되었을 해피엔딩 해결책은 이들이 처한 당시 실존에선 공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두 연인이 장난스럽게 나누던 대화처럼 둘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망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몽상일 뿐이다. 만약 영화가 그런 판타지로 귀결되었다면 신파는 확보했겠지만 굳이 이렇게 글을 써가며 영화를 소개할 일은 없었을 테다.
 
소련 체제의 종말을 예언하는 영화의 위력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로만은 동성애자이지만 소련 체제와 전투기 파일럿 임무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저 개인사를 국가가 사사건건 불온시하고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선택과 인생에 아무런 의심이나 번민 없이 훌륭한 소련시민이자 군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세르게이 역시 체제 자체에 불손한 태도를 가끔 보일지언정 반체제 입장을 고수하진 않는다. 그저 처음에는 자신의 장래를 고민하고 배우가 되고픈 열망을, 그리고 이후에는 자신이 열병처럼 앓고 있던 사랑을 허용받길 원할 뿐이다.
 
하지만 당시 경직된 소련체제는 그들의 소박한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발 떨어져 생각해보면 그저 개인들의 사생활을 자유롭게 놔두면 둘은 소련에 기여하는 시민으로 충직한 인생을 살았을 법하다. 그러나 경직되고 무의미한 법과 규정을 고칠 생각은 없이 24시간 전 인민을 감시하던 소련 체제는 영화 속에서 번지수를 번번히 잘못 짚어낸다.
 
최전방 군사기지를 넘어 거대한 소련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감시는 정작 그 체제를 수호하는 최전선 전투기와 장비들의 부실한 관리는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한 상태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시민을 의심하고 핍박하는 데에는 편집광처럼 철저했다. 둘의 사랑을 방해하고 감시하는 체제의 상징이라 할 KGB 소령의 집착, 그리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인 세르게이의 충격이 당시 소련이라는 체제가 가진 구조적 한계와 경찰국가적 실체를 몸서리 쳐지도록 잘 묘사해낸다.
 
그런 극적 배경에 추가로 더해지는 꼼꼼한 군사시설과 장비 고증이 50년 전 냉전치하의 소련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한다. 실제 전투기와 군사시설 배경들은 아직 온전히 남아있던 동구권 곳곳의 흔적 덕분에 고증 문제에 까다로울 이들에게도 충분히 합격점을 얻을 만한 완성도를 뽐낸다. 전투기 출격의 긴박감은 그저 지나가는 배경이 아니라 둘의 숨 막히는 관계와 기묘한 조응을 이룬다. 엔진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을 질주하는 미그-21 전투기와 그 속에서만 번뇌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로만의 삶은 또 다른 의미의 "불새"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로만이 하늘을 날며 누렸던 찰나의 자유가 체제의 허용범위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랑과 연결 고리가 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영화는 엄혹한 시대, 차가운 배경에 대비되는 세르게이와 로만 커플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그래서 BL(보이즈 러브)물의 편향성이 어쩔 수 없이 동반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육체적 미모가 부각되는 장면이 적지 않다. 약간이나마 분명히 관음증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셈이다. 작품 제작에 상당한 자본이 투여된 데다 시대물 성격이 짙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파이어버드>가 로맨스라는 점이 작용했을 테다.
 
그런 한계점도 등장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추가적인 변주를 더해 흥미로운 단면을 추가한다. 두 연인, 세르게이와 로만 사이에 운명의 장난처럼 끌려와 엮이는 여성 루이자 캐릭터를 통해 둘이 감당해야 할 시련을 단순히 국가 대 개인의 단순화된 구도로 한정짓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의 순수한 사랑 때문에 감시와 불안에 시달리지만 또한 이들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거부당하고 마는 또 다른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맹목성을 갖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발생하고야 마는 의도치 않은 타인의 피해를 통해 영화 속 금단의 관계가 갖게 될 비극성이 한층 더 두터워진다.
 
비극적 로맨스 실화, 영화의 운명으로 이어지다
 
분명히 이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파이어버드>는 멜로물 속성이 첫 번째 목표였을 테다. 하지만 영화의 실제 배경에서 비롯된 우여곡절은 본 작품에 시대극 속성을 부여해버렸다. 두 연인을 가로막던 소련 형법 121조는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 붕괴 후 1993년에 폐지되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로만의 이야기> 회고록도 그런 시류 하에서 공개될 수 있었으리라 추정해본다. 하지만 갈수록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푸틴의 러시아 치하에서 2013년, '반 동성애 선전법'이란 명칭으로 악법은 사실상 부활하고야 만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타고 현재 러시아 내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극심한 탄압과 배제가 계속 보고되는 중이다.
 
그렇게 극우화의 길을 걸어가던 러시아 주류진영은 2021년 공개된 본 작품이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데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결국 영화제에 공식초청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는 관객 없이 시사회를 진행하는 수모를 겪는다. 영화제와 제작진은 현장 주변에 몰려든 극우 시위대의 위협에 시달린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지금껏 진행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야 만다. 
 
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로만 역을 맡았던 우크라이나 출신 배우 올렉 자고로드니는 지금 키이우에 있다. 영화에서 오랜 시간 합을 맞췄던 세 주연배우는 현재 각각 영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로 갈라져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처지다. 반세기 전 사랑하는 연인들을 짓밟고 갈라놓았던 국가폭력은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까지 억압하는 중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파이어버드>에 담긴 극적인 일화는 더 주목받을 만하다.
 
<작품정보>
 
파이어버드 Firebird
2021|에스토니아, 영국|로맨스/멜로/전쟁
2022.11.17. 개봉|107분|15세 관람가
감독 피터 리베인
주연 톰 프라이어(세르게이 역), 올렉 자고로드니(로만 역),
       다이애나 포자르스카(루이자 역)
출연 제이크 헨더슨, 마르구스 프랑겔, 니콜라스 우데슨, 카스파르 벨베리
각본 피터 리베인, 톰 프라이어
원작 세르게이 페티소프, <로만 이야기>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2021 뉴페스트(뉴욕LGBT영화제) 공식초청
2021 아웃페스트(로스앤젤레스LGBT영화제) 공식초청
2021 프레임라인영화제 공식초청
2021 멜버른퀴어영화제 공식초청
2021 45회 클리브랜드국제영화제 공식초청
2021 BFI플레어(런던LGBTIQ+영화제) 공식초청
2021 11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공식초청

 
파이어버드 피터 리베인 감독 톰 프라이어 올렉 자고로드니 다이애나 포자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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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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