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우상, 롤모델.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존경하거나 동경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부모님이나 스승님처럼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인 경우도 있고 가수와 배우, 국내외 저명 인사 등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인물들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인생에서 가장 가슴이 뜨거운 중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남학생들은 영화 속 캐릭터들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기도 한다. 1980년대 중·후반 홍콩영화가 유행하던 시절, 남학생들의 최고 우상은 단연 <영웅본색>의 주윤발이었다. 슈퍼 히어로 영화들이 득세를 이루는 최근에는 <어벤저스>나 <저스티스리그>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을 영웅으로 삼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한국영화에도 청소년들의 영웅이 될 만한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수에 젖은 눈빛과 눈부신 외모, 그리고 양팔을 옆으로 펼치며 모터사이클을 타는 '멋'까지 겸비한 이 캐릭터는 1990년대 후반 남학생들의 우상으로 떠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다. 영화계의 유망주였던 정우성이라는 배우를 단숨에 세기말의 워너비스타로 만들어준 캐릭터였던 영화 <비트>의 이민이었다.
 
 <비트>는 서울에서만 35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영화계 유망주 정우성을 확실한 청춘스타로 도약시켰다.

<비트>는 서울에서만 35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영화계 유망주 정우성을 확실한 청춘스타로 도약시켰다. ⓒ 삼성영상사업단

 
청춘들의 방황을 잘 표현하는 감독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김성수 감독은 영화 명문인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다. 당시 김성수 감독과 어울리며 친하게 지낸 인물들이 바로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감독과 드라마 <하얀 거탑> <밀회>의 안판석 감독이었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박광수 감독 밑에서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의 조감독과 각본 및 각색작업에 참여한 김성수 감독은 1993년 단편영화 <비명도시>를 연출하며 주목을 받았다.

1994년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각본 작업에 참여한 김성수 감독은 1995년 이병헌, 이경영이 출연한 영화 <런어웨이>를 연출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런어웨이>는 서울관객 7만 2천 명으로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김성수 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통해 곧바로 명예회복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허영만 작가의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비트>였다.

떠오르는 청춘스타 정우성과 고소영, 훗날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는 유오성 등이 출연하는 <비트>는 1997년 5월에 개봉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서울에서만 3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김성수 감독은 <비트>를 통해 청룡영화상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1999년에 개봉한 이정재, 정우성 주연의 3번째 영화 <태양은 없다>까지 서울 33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다.

김성수 감독은 2001년 안성기와 정우성, 주진모, 장쯔이 등이 출연한 무협사극 <무사>로 서울에서 85만 관객을 모았다. 하지만 2003년 직접 제작까지 참여한 장혁과 이나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이 전국 91만이라는 아쉬운 스코어에 그치고 말았다. 데뷔 후 처음 시도한 코미디 장르의 <영어완전정복>으로 <런어웨이> 이후 8년 만에 흥행실패의 아픔을 경험한 김성수 감독은 이후 10년의 긴 공백기를 가졌다.

철치부심한 김성수 감독은 2013년 장혁과 수애를 캐스팅한 재난 액션영화 <감기>를 연출하며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였다. 김성수 감독은 <감기>를 통해 전국 3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3년 후 황정민과 정우성,주지훈,곽도원 등 호화캐스팅을 자랑하는 신작 <아수라>를 선보였다. <아수라>는 전국 250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화려한 배우 라인업에 비하면 완성도와 흥행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모터사이클 탈 땐 양팔 벌리는 게 국룰?
 
 최대속력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양 팔을 벌리는 정우성의 포즈는 <비트>의 시그니처 장면이 됐다.

최대속력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양 팔을 벌리는 정우성의 포즈는 <비트>의 시그니처 장면이 됐다. ⓒ 삼성영상사업단

 
<비트>는 지난 1994년 발행한 청년만화잡지 <영 챔프>의 창간특선만화로 연재된 허영만 화백의 동명만화 <비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비트>의 이민 역에 정우성이 캐스팅됐을 당시 완벽한 캐스팅이라고 극찬을 받았는데 실제로 허영만 화백은 작년 모 라디오 방송에서 <비트>를 그릴 당시 훤칠한 신인배우 정우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로 정우성과 이민은 '운명 같은 인연'이었던 셈이다.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해 <본 투 킬>,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 등에 출연했지만 확실한 스타로 인정 받지 못했던 '미완의 대기' 정우성은 <비트>를 통해 청소년, 특히 남학생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영화 속에서 이민이 모터사이클을 최대속력으로 유지면서 눈을 감고 양 팔을 옆으로 활짝 펼치는 장면은 당시 남학생들의 로망이자 한국영화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장면이 됐다.

<비트>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었지만 이제 막 청소년기를 벗어난 청춘들의 방황을 다룬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청소년들에게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민과 정우성의 멋진 모습을 동경하고 영화의 명장면을 흉내내는 청소년들이 대다수였지만 그중에는 오토바이를 훔쳐 타거나 술·담배를 배우는 등 탈선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이후 정우성은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배역 캐스팅은 되도록이면 거절했다고 한다.

정우성은 <비트> 이후에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감시자들> <더 킹> 등 많은 흥행작에 출연했지만 로미 역의 고소영은 <비트>가 그녀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영화가 됐다. 고소영은 드라마와 CF에서는 많은 히트작을 만들며 심은하, 전도연과 함께 '199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군림했지만 영화에서는 2001년작 <하루>가 29만 관객을 모았을 뿐, <비트>를 능가하는 대표작을 찾기 힘들다.

<비트>는 거친 액션장면들 때문에 일부 관객들로부터 '조폭 미화영화'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사실은 조직폭력배의 세계가 얼마나 비정하고 더러운지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그나마 원작에서는 민이 평범한 여성과 결혼해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결말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태수(유오성 분)의 복수를 위해 단신으로 폭력조직에 쳐들어간 민이 치명상을 입고 길가에 내버려지는 쓸쓸하고 비참한 엔딩으로 영화가 끝을 맺는다.

<비트>로 이름 알리고 가수왕까지 오른 임창정
 
 사실 <비트>의 최대 수혜자는 정우성도, 고소영도,유오성도 아닌 환규 역의 임창정이었다.

사실 <비트>의 최대 수혜자는 정우성도, 고소영도,유오성도 아닌 환규 역의 임창정이었다. ⓒ 삼성영상사업단

 
배우 유오성은 영화 <간첩 리철진>과 <주유소 습격사건> <친구> 등을 흥행시키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인기배우로 군림했다. 하지만 유오성도 1997년 <비트>의 태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 영화에서 조·단역을 전전하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개봉 당시에도 1966년생 유오성과 1973년생 정우성이 친구로 나온 것에 위화감을 느낀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비트>의 진짜 수혜자는 정우성도, 유오성도 아닌 민이 새 학교로 전학을 가서 만난 친구 환규를 연기했던 임창정이었다. 지금은 영화보다 더욱 유명해진 '17대 1의 전설'이 바로 <비트>에서 환규의 입을 통해 최초로 나왔던 대사였다. <비트>에 출연하기 전부터 영화 <남부군> <게임의 법칙>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경력을 쌓아오던 임창정은 <비트>의 환규를 통해 잠재력이 제대로 폭발했다.

<비트>로 인지도가 급상승한 임창정은 영화 개봉시기에 맞춰 3집 앨범을 발매했는데 임창정은 3집에서 타이틀곡 '그때 또 다시'와 3번째 홍보곡 '결혼해줘'로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1997년 한 해를 휩쓴 임창정은 그해 연말 KBS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영화에서도 임창정이 부른 환규의 테마 '슬픈 연가'가 김부용이 부른 주제가 '비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비트 김성수 감독 정우성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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