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나는 사고로 기억 장애가 생겼다. 노트북 일기를 읽을 것."

마오리(후쿠모토 리코 분)는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며 그 이전까지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다. 몇 해전 아이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하며 하루아침에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고 이전의 기억만 잃어버렸다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잠에서 깰 때마다 모든 기억이 리셋되는 상황에 그녀는 오늘의 기억을 내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일기를 기록하고(일기를 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어나자마자 볼 수 있도록 방 벽면 가득히 메모로 채워 놓는다. 최근 병원에서는 기억 장애가 낫고 있는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이는 대답을 들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오늘의 기억을 내일의 기억으로 자연스럽게 쌓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동명의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을 원작으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치조 마사키 작가의 원작 소설은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미키 다카히로 감독 역시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2017), <유어 아이즈 텔>(2021) 등의 작품을 통해 인정받으며 일본 로맨스 장르를 이끌어 갈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02.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역시 마오리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거짓 고백을 해 오는 토루(미치에다 슌스케 분)와 가짜 연인으로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약속을 한 뒤로 두 사람의 관계가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이야기가 된다. 마오리와 토루, 두 사람이 연인인 척하기 위해 정한 세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방과 후까지는 학교에서 대화하지 않기, 연락은 최대한 간단하게 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사랑에는 빠지지 않기. 다른 로맨스 장르가 그러하듯 역시 문제가 되는 항목은 세 번째 사랑에 빠지지 말자는 약속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마오리의 절친한 친구 이즈미(후라카와 코토네)가 놓여있다.

마오리와 토루가 청춘 로맨스물의 주인공으로서 자신들의 본분을 다하며, 하지 말자고 약속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가는 동안 이즈미는 그 사이에 서서 두 사람의 관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역시 다른 드라마 장르에서 등장하는 감초 역할, 주인공의 친구가 떠맡게 되는 롤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이즈미라는 인물의 역할이 조금 더 강조되는 듯하다. 토루가 마오리의 기억상실증을 알기 전까지의 초반부,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고 난 뒤의 후반부, 그러니까 영화의 처음과 끝 양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초반부에서는 아직 토루가 알지 못하는 마오리의 비밀을 감추고 지켜주는 역할로, 후반부에서는 토루가 마오리에게 남긴 당부와 부탁을 대신 전하는 책임을 안고 말이다.

03.
그동안 다양한 장르에서 기억상실증 혹은 알츠하이머와 관련한 소재가 활용되어온 만큼 이제 소재만으로 참신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선행성 기억상실이라는 조금 더 세부적이고 이전에 없던 소재를 다루고 있는 원작 소설을 스크린으로 가져오고자 했던 이유에는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소재 자체의 특이함보다는 그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소재 본연의 특징에 기대며 정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소재 자체의 특징을 약간 뒤집어 활용한다고 해야 할까. 매일 아침 기억을 잃어버리는 마오리의 상황을 주변 인물인 토루와 이즈미가 활용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오리의 병증을 토루가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함께 간 피크닉에서 잠깐 잠이 들어버린 마오리가 역시 바로 직전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고 토루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토루는 오늘 있었던 이 일을 일기에 쓰지 말고 내일의 마오리에게 감추자는 제안을 한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토루를 알아보지 못한 일도, 그 일로 자신의 기억상실증을 그에게 고백한 일도 모두 일기로 남겨놓지만 않으면 오늘의 일은 이제 없었던 일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방인 토루는 모두 기억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아침마다 좌절하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내일의 마오리가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한번 더 활용된다. 토루가 마오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부탁을 이즈미가 들어주는 과정에서 마오리가 기억을 잃는 프로세스를 적극 활용한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물론 소재를 전형적으로 활용하는, 이러한 장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도 영화는 보여준다. 병을 직접 앓고 있는 마오리의 측면에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조차 내일이 되면 기억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그리고 그런 상황이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장면들이다. 기억 상실이라는 병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의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고, 또 아침마다 다시 그 기록을 보고 외워야 하는 상황에서 추억과 감정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일에서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지는 딜레마다.

마오리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하루하루 행복한 기억을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토루에게도 그녀의 기억상실은 때때로 상처가 된다. 모든 상황과 처지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타인의 상황을 배려하는 것과 생각하지도 못한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현실의 민낯을 바라보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족관 에피소드의 하나로 두 사람이 함께 추억하기 위해 산 키링을 훗날 알아보지 못하는 마오리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그렇다. 그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도망가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마오리가 자신과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전날 일기에 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오늘 아침에 읽지 못했기 때문인지를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복잡한 마음이 되는 그다.

05.
이제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관객과 독자들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공략해오는 이 장르 특유의 설정들이 쏟아진다. 어떤 부분은 다소 갑자기 제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이 플롯을 후반부에 배치하기 위해 영화 전반에 걸쳐 그 근거들을 흩어놓은 것 같기도 해서 맥락이 전혀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영화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까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야기는 사랑 이후에 남겨지게 되는 장면이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또한 너무 노골적인 경우에는 어느 정도 여백으로 남겨놓는 게 더 마음에 와닿기도 하는 법이니까.

이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에는 두 가지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원작 소설의 내용을 가져왔을 것 같은 두 표현, '내 속에는 어제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축적되지 않는 기억과 남게 될지도 모르는 무언가'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머릿속을 맴돌며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다. 하나는 기억 상실을 앓고 있는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고, 또 하나는 그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에게도 유효한 의미를 갖고 있다. 양쪽 모두의 표현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이 영화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한쪽, 기억을 상실하는 쪽인 마오리의 편에서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토루의 쪽에서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영화를 아직은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어떤 감정도 싹틀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타이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뭔가 하나의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사라진다 해도'라는 표현 뒤에 남은 표현 하나가 더 있을 것만 같다. 어쩐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한 문장. 아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대로 놓여야만 제대로 완성될 것 같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오늘밤세계에서이사랑이사라진다해도 후쿠모토리코 미치에다슌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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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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