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랜75>의 하야카와 치에 감독.

영화 <플랜75>의 하야카와 치에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일본 사람은 예전부터 국가를 위해 충성했다. 지금의 노인들은 일본 사회의 짐과도 같으며,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고 있다. 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 한다.'

영화 <플랜75>는 시작부터 강렬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국회에선 이른바 75세 이상 노인의 죽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법안이 통과된다. 당사자가 동의만 하면 준비금 10만 엔 지급은 물론이고 신변 정리의 모든 과정을 국가가 책임진다. 과연 이런 죽음은 옳은 것일까. 당사자의 선택권은 정말 존중받는 것일까. 이 물음을 안고 지난 9일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을 직접 만났다.
 
단편 <나이아가라>(2014)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 10년 >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5개국의 근미래를 조명하자는 주제로 기획된 옴니버스 프로젝트 당시 단편으로 구성한 <플랜75>를 확장한 게 지금의 영화다. 이 작품은 올해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 부문에 특별 언급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엔 '아시아영화의 창' 섹션에 초청됐다.
 
현대 일본 사회에 존재하는 저주
 
영화엔 세 중심인물이 등장하다. 78세 나이까지 호텔 메이드로 일하다 은퇴하게 된 미치(바이쇼 치에코), 플랜75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대행사 직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그리고 필리핀 출신의 노동자로 일하다 보다 나은 급여를 따라 플랜75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나 아카시)다. 이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미치의 선택으로 서로 엮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2016년 일본 사가미하라 내 장애인 요양 시설에서 벌어진 흉기난자 사건에서 비롯됐다. 26세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무려 19명이 사망했고, 26명이 크게 다쳤다.
 
"그때 가해자가 한 발언이 있다. '장애인은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데 나랏돈을 쓸 데 없는 곳에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사회에선 생명을 생산성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풍조가 늘고 있기에 그런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영화를 기획한 게 2017년이었고, 만드는 데까지 4년이 걸린 셈인데 2022년인 현재엔 그 풍조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속화되고 있다랄까.
 
제가 위기감을 느끼는 부분은 능력이 없고, 돈이 안 되는 사람을 배제하려는 풍조도 있지만 스스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당사자, 즉 사회에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목숨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일본에선 자기 책임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정부도 이를 이용해 스스로 책임지라고 압박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때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말하지 못하다가 악화된 사례가 많았다. 자살률도 크게 올라갔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이 대목에서 '저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련의 사례에 그는 "애국심과는 좀 다른 종류의 것이라 생각한다"며 "일본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는 이 사회에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일종의 저주 같은 게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노인, 여성, 장애인 문제에 사람의 기능성을 내세워 혐오하는 댓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남 얘기가 아니라는 걸 관객분들도 느꼈으면 했다"는 감독의 의도였다. 그만큼 세계 공통의 현상을 짚고 싶어한 의지로 보인다.
 
조심해야 할 것들
 
최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 뤽 고다르, 존엄사를 결정한 알랭 드롱을 두고 <플랜75> 속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길 위험 또한 있다. 흔히 안락사로 정의할 수 있는 이 선택과 영화 속 설정은 아주 다르다고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강조했다.
 
"안락사 문제를 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연상시키게 할까봐 매우 신경 썼다.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한 건 개인의 죽음을 국가가 조장하고, 압박하는 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가상 설정이긴 하지만 굉장히 반기는 사람도 많았다. 강제로 죽는 건 싫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돈 문제없이 삶을 마감할 제도가 있다면 편리할 것 같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란 건 간단히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며 살아가는데 생과 사는 복잡한 문제다. 플랜75와 같은 시스템은 만들어서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실제로 일본에선 국민에게 부담이 가는 정책이 꽤 있는데 그걸 굉장히 잘 포장해서 홍보하려는 게 있다. 영화 속 프레젠테이션 장면은 그런 걸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플랜75>의 한 장면.

영화 <플랜75>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정리하면 영화 속 노인 마치가 일종의 피해자이고, 히로무가 정부를 대변하는 가해자, 그리고 마리아가 일종의 관찰자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세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문제를 직시하고 판단하게끔 한다는 게 감독의 의도였다.
 
영화가 만든 또 하나의 성과는 바이쇼 치에코 같은 노년기 배우를 대거 중심에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젊은 스타 배우가 아닌 이상 투자에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다. 하야카와 치에코 감독 또한 "주변에서 나이 든 배우를 캐스팅했다 하니 투자가 어려울 것이라 했다. 제작사에서도 주인공을 젊은 남자 배우로 하면 어떻겠냐 제안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국 나이로 서른일곱에 첫 장편을 냈다. 뚝심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물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어떤 사회문제에 이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보단 사람 그 자체를 다루고 싶다"며 "사람을 표현하려면 그를 둘러싼 사회를 표현하는 게 필연적이다. 하지만 특정 메시지만을 강조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침체된 일본영화 산업의 건전한 부활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인터뷰 전날 진행된 한일 영화인 간담회 소식을 전하자 그는 "한국에서 몇 년에 걸쳐 현장을 개선하려 한 노력이 일본에서도 굉장한 공부가 되고 있다"며 "재능 있는 사람이 일본 영화계에 오지 않고, 어쩌다 온다 해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오질 않는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일본 영화가 쇠퇴한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서 작업한 경험을 공유하고 계신다. 과노동, 억압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일본 영화 현장에 팽배하다. 갑질, 성희롱 문제도 여전하다. 한국영화는 이런 문제를 꾸준히 개선해왔다고 들었다. 교육 시스템의 정비인지 스태프들의 각성인지 궁금하다.
 
더 이상 일본영화가 해외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얘길 오래 들어왔다. 가와세 나오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이후가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나 후카다 코지 감독의 등장이 그래서 좋은 징조 같다. 해외 영화인들 사이에서 겨우 언급되는 분이 구로사와 기요시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정도였는데 이같은 신진 감독이 나와서 다행이다."

 
분명 이건 겸손한 표현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 또한 일본의 신진 영화인으로 꼽히는 만큼 그의 활약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다. "첫 장편에 많은 기회를 얻게 돼 부담이긴 한데 잘 활용해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갈지 생각하겠다"는 포부에서 그의 좋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플랜75 하야카와 치에 부산국제영화제 일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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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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