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탐탁지 않은 영화제였다. 광고를 할 땐 언제고 예매를 하니 확정이 된 건지 아닌지 확인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영화제 홈페이지 문의창구로 수차례 문의해도 답은 없었다. SNS 채널엔 항의하는 이들로 댓글이 가득 찼다. 며칠 뒤 어렵게 연락이 닿았으나 예매가 누락됐다는 답만 돌아왔다. 사정을 말한 끝에 겨우 예정대로 영화제에 참석할 수 있었다. 상영관에 도착하니 기술상의 문제로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쯤을 더 기다려야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진행되는 영화제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나는 잔뜩 뿔이 난 채로 상영관에 들어갔다.

내 마음이 돌아서기까진 딱 두 시간이 걸렸다. 아주 멋진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기분도, 분위기도, 보는 이의 마음 전체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만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내게 전해준 이 영화제가 나는 몹시 감사하게 느껴졌다.

오는 23일까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2022 유럽영화제 이야기다. 이 영화제에서 본 영화는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다. 한 소녀의 무고로 망가진 교사의 삶을 다룬 영화 <더 헌트>로 한국에도 유명해진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신작으로, 이 영화에 이어 덴마크 국민배우 매즈 미켈슨과 합을 맞췄다. 도대체 영화가 어땠길래 나는 이 영화제의 모든 실수를 이해하고 감사하게 되었나. 여기 그 썰을 풀어본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포스터

영화 <어나더 라운드>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지루한 수업, 망가진 인생

주인공은 고등학교 역사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 분)이다. 그의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의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은 대놓고 휴대폰을 본다. 대놓고 옆 사람과 대화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소심한 마르틴은 제지하지 못하고 그냥 홀로 수업만 할 뿐이다.

학생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마르틴이 수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는 맥락 없이 책만 줄줄 읽어대는 그의 수업에 한 학생이 대놓고 지적하는 일까지 빚어진다. 급기야 학부모들이 마르틴을 소환해 수업을 제대로 해달라고 항의까지 한다.

마르틴이 학교에서만 엉망인 건 아니다. 아내와는 벌써 몇 년째 데면데면한 사이다. 아이들과도 이렇다 할 대화가 없다. 야근이다 뭐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와 그는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이 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고 그런 많은 현대인처럼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행히 마르틴의 곁엔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있다. 같은 학교 동료 교사들이다. 축구팀 코치, 음악교사, 심리학 교사인 그들은 자주 모여 시간을 보낸다. 오랜 독신이거나 아이를 셋 키우며 전쟁 같은 삶을 살거나 하는 친구들의 삶도 마르틴에 비해 마냥 편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낸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변화는 작은 곳에서 온다

때로 중요한 변화는 아주 작은 곳에서 온다. 학부모 면담 이후 낙담한 마르틴을 위로하려 모인 친구들은 그의 심각한 모습에 술을 권한다. 언제나 엄격하게 지내는 그에게 약간이나마 풀어지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권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는, 어느 연구를 가져와서는 취하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권한다. 주저하던 마르틴이 술을 들이켜고 오래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듯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나온다.

술의 효과를 본 마르틴은 음주수업을 시도한다. 딱 0.05%만 혈중 알코올 농도를 올리고는 수업에 들어간다. 그날 수업은 얼마나 멋졌던가. 학생들은 마르틴을 다시 보고, 마르틴도 스스로를 다시 본다. 마르틴은 그 멋진 수업 뒤 친구들에게 제가 음주를 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친구들은 모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연구대상은 그들 스스로다.

변화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가만히 앉아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 흔히 중년의 위기라 표현되는 방황이며 우울도 제 자리만 지키다 망가져가는 저를 돌보지 못해 생기는 것이지 않던가. 삶에 변화를 주어 제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처박혀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인간에게 색다른 자극이 된다. 영화 속 네 친구에겐 알코올이 그 수단이다.

마르틴의 역사수업은 점차 활기를 띤다. 축구시합은 즉흥적이며 격정적이 되고, 음악수업은 더 감상적으로, 심리학 수업은 비로소 다른 이의 문제를 깊이 바라보게 이끈다. 수업들이 나아지고 삶에도 감정이 얹어진다. 너무 오래 제 자리에 앉아 마비됐던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들은 인간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너무 쉽게 돌보지 않는단 걸 깨우치게 한다. 어쩌면 정말 인간이 최상의 인간이 되기 위해선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들의 변화도 극적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술이 바꿔낸 것들, 술이 망쳐버린 것들

물론 영화는 알코올의 효용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술이 술을 부르고 중독을 부르고 급기야 인간을 망치는 모습까지를 감추려 들지 않는다. 영화가 비추고자 하는 건 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저와 저의 감정을 돌보는 것이란 걸 영화는 일깨우려 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말 그대로 지쳐 있던 삶에 다음 장이 있다는 걸 알린다. 마르틴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재즈발레 댄스를 춘다. 술을 들이부으며 인생을 즐긴다. 그에겐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그도, 관객들도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이.

인물들은 술로써 인생을 긍정하고, 술로써 인생을 부정한다. 그것이 진정한 술꾼의 삶이다.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이라면 이 영화가 말하는 슬픔들과 기쁨들에, 절망과 희망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 뭐 한 라운드 끝나면 다음 라운드 뛰는 것 아닌가. 녹아웃 당하고 뻗거나 탭을 치고 드러눕지 않을 것이라면 가야지 어쩌겠나. 기왕 갈 거라면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토마스 빈테베르그 감독은 이 영화 촬영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딸을 잃었다. 영화 속 마르틴의 딸로 등장하기로 했던 어린 이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 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화 안에 제가 느낀 절절한 감상을 그대로 녹여내길 선택했다. 그래서 영화 속엔 절망과 우울, 슬픔과 패배감이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르틴의 격정적인 춤사위가 터져 나오기에 이른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삶은 계속 흐르는 것이라는, 그 모든 기쁨과 슬픔들을 생생히 느끼면서 인간은 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가 관객에게 전한다.

나는 이 영화보다 술을 더 부르는 영화를 정말이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2022 유럽영화제

2022 유럽영화제 ⓒ 2022 EUFF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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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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