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러브 라이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러브 라이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2016년 영화 <하모니움>으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이어 2019년에는 로카르노영화제에 선정된 바 있는 <옆얼굴>까지. 후카다 코지 감독은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함께 장차 일본 영화계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서 일본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뒤를 이을만한 다음 주제에 속하는 셈이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가족'이라는 집단을 조금 더 냉철하고 서늘한 시선으로 주목하고 그려내 왔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도 어떤 위기와 시련 앞에 굳건할 수 있는지 묻는다.

후카다 코지 감독의 새 영화 <러브 라이프>(love life)도 유사한 시선으로 한 가족의 비극과 이에 따르는 여러 선택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1991년 일본에서 유행했던 야노 아키코의 동명 음악 'love life'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이 영화의 첫 출발은 노래에 등장하는 가사를 함축한 문장,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할 수 있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야노 아키코는 일본의 유명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을 낳았다. 현재는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집단과 그 구성원이 느끼는 감정적 거리감과 다양한 형태의 사랑,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02.
영화 <러브 라이프>는 이제 막 신혼을 맞이한 젊은 부부 타에코와 지로, 그들의 여덟 살 아들 케이타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 케이타의 오델로(검은 색, 하얀 색 작은 원판을 작은 판 위에 늘어놓는 보드 게임) 대회 우승을 기념해 열리는 파티를 가장한, 시아버지 마코토를 위한 깜짝 생일 파티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평소 며느리 타에코의 존재를 탐탁치 않아 하며 결혼을 반대해 온 시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리고 아들 케이타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다. 신혼 부부와 여덟 살 난 아들, 케이타는 타에코의 전부(煎夫) 박신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로, 아들 지로와의 결혼이 재혼이라는 사실이 시아버지의 반대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이날도 문제는 일어난다. 불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시아버지가 타에코를 향해 '중고'라는 표현을 써버리게 되고, 평소에는 타에코의 편이 되어주는 친절한 시어머니조차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가능한 빨리 '자기 손자'를 낳아 주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며느리와 그렇다고 해서 경우가 없지는 않은 시부모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파티를 이어간다. 조금은 불안해 보이지만 관객들 역시 그들의 얕은 화해와 계속되는 생일 파티 장면에 마음을 놓게 된다. 진짜 문제는 그때 일어난다. 어른들의 관심이 조금 멀어지던 때에 목욕탕에서 혼자 놀고 있던 케이타가 미끄러지면서 욕조에 받아져 있던 물에 빠져 죽고 만다. 후두부 타박상에 의한 익사다.

03.
다른 일본 영화들처럼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줄 알고 있던 순간에 벌어진 예상치 못했던 사고. 이 비극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기는 하나 가족보다는 개인의 이야기로 포커스가 움직이게 되고, 처음과 같이 가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기는 하나 충만한 사랑으로부터 꺼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사랑으로 중심이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위태로운 사랑 위에 놓인 인물들 모두는 각자의 내면에서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외로움에 조금씩 잠식되기 시작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이어가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후카다 코지 감독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전작은 물론 이번 영화 <러브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인간의 본성과 민낯과 관련한 소스들을 인물의 서브텍스트로 수면 아래에 감춰 놓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는 일종의 속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지점의 문제는 인물의 행위와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러닝타임 내내 극중 인물들이 하나의 정형화된 캐릭터로 머무르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든다.

가령 이번 영화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평소에는 며느리의 편에서 마음 좋은 시어머니도 케이타가 죽고 난 다음 잠깐 집에 데려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니 그런 좀 그렇지 않느냐며 반대의 뜻을 드러내고 (부부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원래 시부모님의 집이다.) 타에코는 다시 나타난 전남편에게, 또 지로는 결혼하기 전 사랑하는 사이였던 야마자키와 마음을 기대는 식이다. 처음과 다른 마음이 된 인물들의 행동과 모습을 따라가고, 그에 따라 복잡해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심에 놓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04.
이 영화에서 마코토의 죽음으로 촉발된 타에코와 지로의 심리적 거리감은, 물론 마코토의 죽음이 두 사람 누구의 잘못도 책임도 아니지만, 상당히 동등한 위치에서 나란한 방향으로 그려지고 있다. 타에코와 그녀의 전남편 박신지, 지로와 그의 전 여자친구 야마자키의 구도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에서 타에코의 선택에 어떤 선택에 의해 이 구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누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심리로부터 계속되고 있는 행동인지의 측면에서 조금 더 바라볼 필요가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면, 애초에 박신지라는 인물과 야마자키라는 인물의 위치가 동등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박신지가 청각장애자라는 설정, 그로 인해 수화가 의사소통의 매개가 되어야 하는 점은 두 인물의 곁에 서 있는 타에코와 지로의 위치 또한 동등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박신지와 지로 두 사람이 집 안에 남겨진 상황에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박신지를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터뜨리는 지로의 말에는 그런 동등하지 못한 위치에서 발생한 심리적 반발과도 같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옅어지게 된 상황에 대한 무력감과 좌절감 같은 것들.

05.
영화의 후반부에서 타에코와 박신지가 한국으로 향하는 장면의 표현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일련의 소동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 타에코가 지로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산책을 나가는 롱테이크 장면은 인상적이다. 기술적으로는 영화가 지나온 전반의 내용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장치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앞으로 만들어가게 될, 영화 바깥쪽에 놓이게 되는 미래 시점의 이야기의 창작에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설정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프레임 속을 지나는 두 사람의 간격이 꽤 오랫동안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영화 내내 하나의 화두가 될 수 있는 인물의 심리적 부분이 시각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 글이 처음에서 작품이 시작될 수 있었던 문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은 가능하다'라는 것이지 않았나. 과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지나고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모양을 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하나의 이야기로만 놓고 보자면 사실 간단한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다. 복잡하게 얽히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하는 종류의 작품도 아니다. 다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개인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장력이 필요한가에 대한 물음을 영화는 적극적으로 던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미 이혼을 경험한 바 있는 타에코의 모습이나 타에코는 물론 한국의 가족과도 오랜 시간 이별을 한 바 있는 박신지의 모습에서 가족의 해체를 벌써 보여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국 가족의 이야기도 개개인의 서사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이 영화는 예측할 수 없었던 큰 파고를 던지며 관객들을 향해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커다란 슬픔 속에 잠겨 있을 때에도 그로 인해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버렸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말할 수 있는지. 또 가족이라는 이름을 말할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러브라이프 후카다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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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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