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은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이다. 1976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됐던 국군의 날은 지난 1990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군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 시민들에게 국군의 날은 평범한 하루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안전하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대부분의 남성들은 의무적으로 현역으로 군복무를 해야 하는 만큼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저마다 군대에 대해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군대는 많은 군필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다.

하지만 군대가 모든 군필자들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군대에서 겪은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전역 후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런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지난 1992년에 개봉했던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을 여과 없이 묘사한,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하얀 전쟁>은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상과 감독상,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안성기)을 수상했다.

<하얀 전쟁>은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상과 감독상,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안성기)을 수상했다. ⓒ (주)대일필름

 
영화-드라마 오가며 엄청난 다작 하는 배우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온갖 국가기관의 고위층이나 대기업 회장 및 임원, 조직폭력배 두목 등을 연기하는 이경영은 1990년대 중반까지 안성기, 박중훈과 함께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배우들이 적었던 1990년대 이경영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잃어버린 너>,<백치애인> 등에서 멜로 연기, <세상 밖으로>의 탈옥수, <게임의 법칙>의 사기꾼, <런어웨이>의 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경영은 배우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92년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에서 베트남전에서 간신히 살아나지만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놓아 버리는 변진수 일병을 연기했다. 안성기와 이경영, 심혜진 등이 열연을 펼친 <하얀 전쟁>은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경영 역시 <하얀 전쟁>을 통해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승승장구하던 이경영은 2002년 원조교제 혐의로 징역10개월과 집행유예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 받으며 배우생활에 큰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 10년 가까운 긴 자숙기간을 거친 이경영은 2011년부터 <써니>,<모비딕>,<최종병기 활>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2012년에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 남영동 1985 >에서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하며 오랜만에 주연을 맡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은 그의 전성시대였다. 이경영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26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는 엄청난 다작을 선보였다. 특히 2015년에는 <내부자들>에서 유력대선후보인 국회의원 장필우 역을 맡아 '폭탄주 제조의 신기원'을 선보이기도 했다. 2012년부터 케이블과 종편을 중심으로 드라마 활동도 시작한 이경영은 2019년 <해치>를 통해 18년 만에 지상파 드라마에도 복귀했다.

군인들의 전쟁 후유증 깊이 있게 다룬 수작
 
 <하얀 전쟁>은 베트남 전쟁 장면을 실제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했다.

<하얀 전쟁>은 베트남 전쟁 장면을 실제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했다. ⓒ (주)대일필름

 
<하얀 전쟁>은 1991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에 빛나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정지영 감독이 1994년에 영화로 만들었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원작자인 안정효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안정효 작가는 실제 베트남 전쟁의 참전용사 출신으로 <하얀 전쟁>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베트남 전쟁의 참사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하얀 전쟁>은 2009년에야 '완전판'이 출간됐을 정도로 20년 가까이 수 차례의 개정을 거친 작품이다.

이미 지난 1990년에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남부군>을 연출했던 정지영 감독은 2년 후 다시 베트남 전쟁으로 배경을 옮겨 <하얀 전쟁>을 만들었다. <하얀 전쟁>은 정지영 감독을 비롯한 4명의 작가가 함께 시나리오를 완성했는데 그 중에는 2004년 <알포인트>를 연출하는 공수창 감독도 있었다. 원작자 안정효 작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노력이 더해진 <하얀 전쟁>은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하며 그 노고를 인정 받았다.

안성기가 연기한 한기주는 번역가 겸 출판사 부장이었던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잡지사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로 등장했다. 이경영이 연기한 변진수 역시 원작에서는 처음부터 군대와 베트남전이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문관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민간인 사살 사건을 계기로 조금씩 이상증세를 보이는 병사로 그려졌다. 영화의 극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와 인물설정인 셈이다.

<하얀 전쟁>에서는 수색작전을 펼치던 한국군이 총성이 들리는 곳으로 무차별 사격을 했지만 그곳에는 민간인들의 시체 밖에 없었던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김문기 하사(독고영재 분)는 민간인 학살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살아있는 민간인들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명령에 못이겨 민간인들을 사살한 변진수 일병과 조태삼 상병(박홍근 분)은 큰 충격에 빠지고 조태삼 상병은 늦은 밤 김문기 하사를 살해하고 부대에서 탈영을 감행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상영관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탓에 <하얀 전쟁>은 영화관이 아닌 각종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호암 아트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다만 그 시절엔 영상자료원에 의무적으로 필름을 납품하던 시기였는데 이 덕분에 지난 2017년 4K로 리마스터되면서 관객들은 깨끗한 화질의 <하얀 전쟁>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플래툰> 반즈중사와 닮은 김문기 하사
 
 <하얀 전쟁>은 6~70년대 한국영화에 만연했던 반공영화를 벗어나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하얀 전쟁>은 6~70년대 한국영화에 만연했던 반공영화를 벗어나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 (주)대일필름

 
<하얀 전쟁>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에서는 톰 베린저가 연기한 반즈 중사가 나온다. 독고영재가 연기한 <하얀 전쟁>의 김문기 하사는 산전수전 다 겪은 뛰어난 실력의 부사관이라는 점과 냉철한 판단을 한다는 점에서 반즈 중사와 상당히 닮았다. <하얀 전쟁>에서 김문기 하사를 연기한 독고영재는 이듬 해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고현정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역할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김문기 하사는 영화 초반 무료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주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영옥과 병사 한 명의 펜팔을 주선해 준다. 치열한 경쟁 끝에 변진수가 낙점되고 두 사람은 변진수의 귀국 후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 변진수에 의해 아이가 유산되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국을 맞는다. <하얀 전쟁>에서 부부로 출연한 심혜진과 이경영은 <하얀 전쟁>을 시작으로 <세상 밖으로>와 <손톱>까지 세 작품에 함께 출연했다.

지금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근엄하고 진지한 연기를 도맡아 하는 배우 허준호는 90년대까지만 해도 <걸어서 하늘까지>와 <엄마의 바다>, <마지막 승부> 등에서 주로 유쾌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하얀 전쟁>은 독고영재와 마찬가지로 허준호가 자신이 쌓은 커리어보다는 '허장강의 아들'로 더욱 유명했던 시절에 출연한 작품인데 부사관이라는 직책과 달리 상당히 유쾌한 분위기 메이커로 나왔다.

자신의 이름 석자보다 '으리'라는 두 글자로 더 유명한 배우 김보성은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후 몇 년 간 청춘 스타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얀 전쟁>에서 김보성은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김보성이 연기한 성병조 상병은 현지 어린이들을 거칠게 대하고 죽은 베트남 군인들의 귀를 자르는 등 잔인한 행동을 일삼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하얀 전쟁 정지영 감독 이경영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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