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_허영만의 <오! 한강>을 떠올리게 한 영화
 
1980년대 중반, 허영만 화백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현재의 국가정보원)로부터 대학생 대상 반공만화를 의뢰받는다. 내용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화백은 '타짜'의 스토리 작가 김세영과 함께 작업했고, 1987년 <오! 한강>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다. 이 만화는 역설적으로 당시 학생운동권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만화는 1945년부터 1987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격동의 한국근현대사를 다룬다. 이강토와 그의 아들 이석주 부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지만 사실상 해방 전후부터 1950년대까지 이강토의 역정이 핵심 내용이다.
 
이강토는 가난한 소작농에서 태어났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대지주의 딸이자 동창이던 김혜린의 도움으로 화가로 사사받는다. 하지만 여전한 신분차별 속에 좌익 활동에 뛰어들고 월북하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고 남쪽에 남는다. 남북통일과 반전평화를 기치로 한 조봉암의 진보당 활동에도 투신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과 모진 탄압에 시달린 끝에 세상과의 연결을 스스로 단절하고 과거의 사회참여 화풍을 버린다. 그리고 십여 년간 두문불출하며 '극사실주의(하이퍼 리얼리즘)' 화풍을 독학으로 수련해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되지만 1980년대 5공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에 투신한 아들 석주에겐 오해를 받기도 한다. 훗날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알게 된 아들은 부자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부친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오! 한강>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국가폭력, 내전과 독재를 겪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그와 주변이 겪은 고초에 극도로 내면으로 침잠되는 길을 택했다. 혹자에게는 굴종과 방관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나 나름의 소극적 저항, 혹은 침묵의 발언을 시종일관 수행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여러 가지 경로가 필요했다. 굳이 허영만의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도 그 시절을 다룬 예술작품과 실제 작가의 삶에는 그런 변주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주인공 故 김창열 화백 역시 지난했던 고난의 청춘과 그에 맞선 뜨거운 침묵으로 한 시대를 헤쳐나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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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2_침묵 속에서 물방울에 세상을 투영해낸 대가의 흔적

김창열(1929-2021). 일명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다. 한국 은관문화훈장,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한 (결코 '국내용'이 아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이다. 제주에 본인 이름을 딴 (본인의 작품 220점을 기증해 건립된) 미술관을 가진 인물이기도 한다. 그에 대한 사전정보는 대충 이쯤이었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기 위해 사전정보나 좀 얻자는 의도에서 화가의 약력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니 심상찮은 조짐이 슬슬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뿔싸! 뭘 잘못 건드렸다는 그런 후회의 정서다. 그런 낭패감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에선 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선불교의 시조 달마대사와 노장사상의 그 노자가 언급된다. 화가는 도인 같은 풍모로 화면 속에 고고히 존재하고 있었다. 인터뷰어가 질문을 던지면 그는 친절하게 응답하다가도 어느 순간 침묵에 휩싸이거나 질문자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처럼 작업에 몰두하곤 한다. 하지만 질문자는 그런 모습 속에서 화가의 잠재된 욕망과 격정이 언뜻 스쳐가는 찰나를 추출해낸다. 그의 업적과 경력에 관한 주변 지인들의 격찬이나 소개 같은, 한 분야에서 업적과 명성을 쌓아올린 이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에 관한 고정관념과는 제법 거리가 먼 도입과 전개다. 그야말로 '문제적 작가'의 초상이다.
 
화가의 지난했던 청‧장년 시절이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소환시키며 간략하게 소개된다. 그 시대를 생존한 어떤 이라도 드라마가 없을 리 없는, 사회가 개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찢어발기고 살아남기 위해 납작 엎드려야 했던 야만의 시대를 화가가 어떻게 탈출하게 되었는지 경로를 주변의 증언과 기록영상 등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 또한 친절하고 상세한 방식의 서술과는 거리가 있다. 화가가 평생 몰두하고 수양해야 했던 불안과 공포에 대한 백 브리핑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설명이 흐르기 시작한다.
 
화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외국을 전전한다. 팝아트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뉴욕과는 별로 맞지 않았던 듯하다. 대신에 그는 유럽을 헤매다 종착역으로 파리를 선택하고 몽파르나스에 정착한다. 사르트르와 동네 산책에서 지나가다 종종 만날 수 있던 동네에 자리를 잡았지만 화가는 세상에 두 눈과 귀는 바짝 열어둔 채 현실에 섞여들기는 썩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마구간을 개조해 물도 나오지 않는 작업실에서 빈궁과 고립 속에서 절대고수가 무공을 수련하듯 오직 작업에만 몰두한다. 그 결실이 훗날 그를 상징하게 된 물방울 그림의 탄생 신화다.
 
그는 '비정형 예술은 일종의 전쟁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그가 애정하고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언급하는 목록을 확인하게 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화가는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인, '회화의 괴물' 프랜시스 베이컨의 "나는 공포보다는 비명을 지르고 싶다."를 전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의 꺼지지 않는 불안의 원천을 쉽사리 끄집어내지 않고, 내면에서 무한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숨은 전투를 거듭해 왔다. 그는 베이컨의 방식과는 반대로 비명보다는 공포를 꾹 참아가며 버티는 모양새를 취해온 셈이다.
 
영향 받은 또 다른 화가로 거론되는, 반 에이크와 함께 북유럽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화가인 판 데르 베이던의 종교화 역시 그에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판 데르 베이던과도 다른 결을 선보이게 된다. 그는 평생 죽음에 대한 생각을 거두지 않고 자기 내면의 악마와 사투를 진행하지만 파괴와 살육 같은 금기된 욕망에 함락당하지 않고 버텨낸다. 예술에 모든 걸 쏟아 부었던 덕분이다. 그는 '물방울'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곤 했지만,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처녀의 샘> 작품 속 주인공 부부가 자신들의 딸을 물로 씻겨주던 순간이 영화 속에서 인용되면서 어쩌면 화가 역시 그런 정화의 의지를 담았던 것 아닐까 하는 해석이 추가된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3_세상을 투영한 물방울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의 현대사
 
어릴 적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서예와 회화를 배우고 '소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소년은 월남 후 실향민이 되어 타향을 전전하게 된다. 그는 한국적 서양화의 개조가 된 이쾌대의 화실에서 소년 시절 사사받는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미술학과에 진학하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넘나든다. 월남과정과 전쟁 당시 체험한 생사의 기로, 주변 친우들 중 홀로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 전쟁 후 영영 이별하게 된 북쪽 고향과 그리운 아버지의 추억들은 세상에 무관심해 보이는 듯 태도를 취하는 화가의 내면 가득한 격정과 분노로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된다.

서울대학교 은사였던,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 김환기의 추천과 도움으로 해외 활동을 시작한 그는 백남준의 지원과 이우환과의 교류를 쌓아가며 끊임없는 진화를 모색한다. 성공한 후에도 동어반복으로 퇴행하기는커녕, 끊임없는 수련과 도전으로 작품세계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이 영화의 찰나마다 꾹꾹 눌러 담긴다. 영화에서도 충분히 해설되지만, 그런 미술사를 이해한다면 더더욱 물방울 하나하나에 시대와 결단이 기억저장장치처럼 입력되어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그야말로 '운명의 물방울'들인 것이다. 
 
영화에선 작가의 미술인생을 친절하게 해설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작가와 작품세계에 대해 풀어내는 부분은 작가주의에 입각한 심리적 묘사 위주다. 그럼에도 수많은 '물방울' 연작 어느 것도 답습이나 동일태가 아니라는 예시로 소개된 무수히 많은 그들 각자의 물방울 형상과 의미 전시는 압권을 선사한다. 꿈보다 해몽이 현대미술의 장기라지만 영화 속에서 그저 '00한 물방울', '물방울의 00'라고만 부제를 붙여서 보여주는데도 빨려들어만 갈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거창하게 미사여구를 들먹이지 않아도 훌륭하게 화가의 작품을 부각시키는 힘이 넘치는 대목이다.
 
김창열 화가의 활동 궤적과 교류한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미술의 계보를 섭렵한다. 격동의 시대에 세상과 불화하거나 혹은 미끄러져 나갔던 수많은 이름들이 (영화 속에 온전히 다 담기진 않았지만) 그의 활동반경과 겹쳐지기에 영화를 보고 미술 혼이 자극받았다면 이참에 현대미술 순례를 기획해도 좋을법한 동기유발의 시간이다. 그런 복습을 거친다면 관객 누구나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과 뒤를 이은 '회귀' 연작에 대해서 자신만의 리포트를 작성할 만하다. 현대미술의 창작과정과 작가주의에 대한 이해를 태도로 증명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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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4_망향의 한과 그를 이해하려는 감독의 영상순례
 
화가의 작품세계와 의의가 설명되고 난 뒤, 이제 인생의 종막에 도달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미련과 그리움, 그리고 원하는 희망의 기호를 묻는다. 화가의 선택은 부친을 남겨두고 온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고향, 황해도 맹산군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리고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지 혹 몰라 상상하곤 했던 이산가족 상봉현장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세상은 그저 소박하게 고향집에서 정든 가족과 함께 소박한 삶을 누리고 싶었던, 그저 예술에 소질을 보였던 한 소년의 삶을 기막히게 변형시켜 버렸다. 그는 평범한 인생을 원했지만 시대는 그에게 격렬한 대가의 운명을 강제해버린 셈이다.
 
"'쓸데없이 진지'하게 살아버렸다."
"평생 호랑이꼬리를 잡고 살아서 놓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다."

라고 자기의 생에 대해 고민하던 화가는 영화가 완성된 얼마 후 작고했다.
그렇게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모든 작업을 기록한 감독은 김창열 화가의 큰아들 김오안이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감독은 일생 그가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다가서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화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기억과 영향력을 해명하기 위해 화가를 화면에 담아내는 과업에 도전해 결실을 선보였다. 영화는 그렇게 친밀한 감정과는 별개로 자신 내면의 고통을 스스로 연소시키기 위한 극한의 과업을 홀로 감당해내느라 늘 타인과 간격을 유지했던 화가의 분투를 오롯이 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예찬과는 거리를 둔 채, 도인처럼 비춰지는 세간의 화가가 가끔 보였던 흔들림과 일탈까지 낱낱이 소개한 패기는 '근접성'을 최대한 살리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던 감독 본인이 예술가로서 동시대의 거장에게 바치는 '태도'일 테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친밀함 때문에 혹여나 김오안 감독의 적절한 간격이 흐려질까 노파심을 스스로 불식하기 위해 공동감독 체제를 굳이 도입해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과 함께 멀티 예술가인 감독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음악과 편집 등에서 공들인 세공이 돋보이는 기획이기도 하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부친과의 추억을 담은 사적 앨범인 동시에, '물방울'로 이뤄진 거대한 숲과 같은 화가의 작품세계에 근접하려는 이들에게는 유용한 숲길 가이드로 남았다. 이제 극장에서 물방울에 맺힌 기억과 정념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시간이다.
 
작품 정보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A Man Who Paints Water Drops,
L'homme qui peint des gouttes d'eau
2020|프랑스, 한국|다큐멘터리
2022.09.28. 개봉|79분|전체관람가
감독 김오안, 브리짓 부이요
주연 김창열
제작 파라이소 프로덕션, 클라이스 튀팽
공동제작 (주)미루픽처스, 김영, 김마르틴
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 (주)미루픽처스
 
2021 크라쿠프국제영화제 실버혼상-국제다큐멘터리경쟁
2021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신진감독상(후원회상)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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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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