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가이 & 로니'의 '프리덤(Freedom)'는 올해로 25회를 맞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상영작 가운데 가장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공연에서 다른 요소를 소거하고 몸짓만 본다고 하여도 절망과 우울, 감금과 폭력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잖은 분량의 내레이션이 결부돼 있어 '자유'라는 제목 그대로 보편적 인권을 주제로 한 작품임을 파악하게 된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9월 17일 오후 8시, 18일 오후 3시에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 네덜란드 무용단 '클럽 가이 & 로니'의 '프리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공연이다. 모리타니인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는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9·11테러 주모자의 하나로 몰려 2001년 11월 체포(내용상 납치)되어 2002~2016년의 14년을 관타나모에서 감금당했다. 불법 감금 시기에 고문과 학대가 자행됐다. 놀랍게도 체포 후 석방까지 15년 동안 모하메두가 기소되지 않은 채 그저 갇혀 있었다. 당연히 갇혀만 있지 않고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모든 사법상식을 뛰어넘은 사건인 셈이다. 자국민이어도 문제일 테지만, 자국민이 아닌 외국 국적 소지자를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채 15년이나 가둬놓은 이 사건은 2020년에 '모리타니안(The Mauritanian)'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다.

모하메두가 '관타나모 일기'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 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데 이어 무용으로도 만들어져 네덜란드에서 초연됐다. 모하메두는 온라인 공연극장인 클럽 가이앤로니의 NITE와 카페-극장인 De Balie의 2021-22 시즌 작가로 '프리덤'의 대본을 썼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무용이 행하는 사회고발은
 
시작은 가위로 솔기를 잘라 옷을 벗겨내는 장면이다. 실제 관타나모로 이송되어 감금될 때 모하메두가 경험한 일이다. 무대에는 독방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직육면체가 배치된다. 천장에 매달려 오르내리는 이 '독방'들은 무대 위의 무대로 관타나모를 상징한다. 무용수들은 이동하는 직육면체들을 활용하며 공간에 최적화한 행위를 구현한다. 직육면체에 갇히는가 하면 직육면체의 위에 걸터앉는다.

직육면체는 실존의 위협이자 실존의 보루가 된다. 던져진 인간이란 실존주의의 설정만큼 프리덤이란 연극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은 없지 않을까. 실존이 산산이 무너진 곳에서 신기루라 하여도 실존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뚜렷한 저항이 무용수들이 몸짓을 통해 표현한 내용이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직육면체의 벽면엔 감옥에서 그려질 법한 다양한 그림이 공연 중에 그려진다. 그림은 무대 뒤 벽면에도 그려진다. 춤을 추지 않는 공연자가 거의 벽만 바라보며 거대한 벽화를, 사전의 밑그림에 더해 완성해가는 과정 또한 공연이다. 별개의 흐름이지만 무대의 공연과 연계되어 통합의 풍경을 제공한다. 벽면을 채운 걸개그림엔 남자가 있다. 모하메두를 상징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지 싶다. 무대 위의 몸짓이 절박해지면서 걸개의 그림의 절망은 더 짙어진다. 절망의 바닥을 내리받고 또 내리받는 그 반복이 어쩌면 인간의 존엄을 표상하는지 모르겠다.

걸개그림은 검은색이다. 무대를 채운 색도 검은색이다. 유채색은 안 보인다. 거대 폭력에 감금당해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기보다 안간힘을 써가며 견뎌내는 상황을 표현하는 색이 검은색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영화와 무용의 차이

현실의 사건을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로 극화하는 방식에 비해 비언어적 언어인 몸짓에 주로 의존하는 무용엔 분명 한계가 있다. 모하메두가 경험한 최악의 폭력, 예컨대 다양한 고문을 영화로 그려내는 것에 비해 무용으로 형상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용을 통해 세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건을 어느 정도 사전에 파악하고 무용 공연을 보는 사람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공연을 보는 사람 사이엔 수용과 이해의 차이가 발생한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공연에 맞닥뜨린 사람이라도 물론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공연의 특성에 불만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이 공연이, 응당 공연 자체의 완결성을 추구하겠지만 공연 이후 혹은 너머의 사회적 효과 또한 중시한다고 할 때 불만에 따라 무대 밖에서 관객 개별적으로 이뤄질 차이의 해소가 공연이 의도한 바라고 해야겠다.

사전에 사건의 개요를 알고 들어온 관객이, 공연을 준비하는 쪽에서 기대하는 관객이겠지만 불만을 느끼는 관객 또한 바람직한 관객에 속한다고 하겠다. 어떤 식으로든 효과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생각 없이 나가는 관객? 그것도 나쁠 건 없다. 아무튼 춤은 춤이고, 삶은 삶이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시댄스 공연작 '프리덤' ⓒ 옥상훈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하였어도, 떠먹여 주는 영화와 달리 무용에선 관객이 스스로 고민하며 떠먹어야 한다. 이러한 불편을 내세운 무용의 방식에 사회적 유용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특정한 사건에 주목하여 사회고발을 의도한 '프리덤' 같은 유형의 작품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실화에 근거하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장을 전면적으로 펼치는 예술방법론으로 무용의 가능성을 '프리덤'이 보여준 것에 적잖은 의의가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많은 사건을 한국 무용이 작품화하여 무대에 올리면 어떤 '프리덤'이 될까.

글 안치용 춤평론가, 사진 옥상훈 작가
덧붙이는 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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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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