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 영화계는 슈퍼 히어로 영화, 더 정확히는 마블 코믹스 유니버스(아래 MCU)의 영화들이 지배하고 있다. 실제로 역대 세계흥행 상위 10개 작품을 보면 MCU의 작품이 무려 4편(<어벤저스: 엔드게임> <어벤저스:인피니티워>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 <어벤저스>)이나 포함돼 있다. 북미시장으로 범위를 좁히면 위 4편에 <블랙팬서>가 추가돼 MCU 영화가 정확히 역대 흥행 순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마블과 DC코믹스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지금처럼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는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는 1960~1970년대부터 꾸준히 슈퍼히어로 영화가 제작됐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히어로 영화는 그저 '킬링타임용' 취급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그 시절 좋아하는 장르가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하면 주변의 영화 마니아들로부터 '영화 볼 줄 모른다'며 무시 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견딘 슈퍼 히어로 영화는 2000년대 후반을 계기로 영화시장의 확실한 주류로 떠올랐다. 물론 이는 MCU에서 직접 제작에 뛰어들며 '인피니티 사가'의 시작을 알린 <아이언맨>이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 영화의 등장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장르의 위상을 끌어 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였다.
 
 고 히스 레저는 <다크 나이트>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가 됐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 히스 레저는 <다크 나이트>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가 됐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사후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한 천재배우

호주 출신의 히스 레저는 10살 때부터 지역의 연극단에서 연기활동을 시작했고 호주의 TV시리즈에 출연하며 경험을 쌓았다. 1997년 미국으로 이주한 히스 레저는 1999년 로맨틱코미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통해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했다. 히스 레저는 2000년 대배우 멜 깁슨과 호흡을 맞춘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에서 열혈 이상주의자 청년 가브리엘 마틴을 연기했다.

2001년 <기사 윌리엄>에서 신분을 위조하고 창시합에 참가하는 지붕수리공의 아들 윌리엄 역을 맡은 히스 레저는 할리 베리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몬스터볼>에서 할리 베리와 사랑에 빠지는 소니를 연기했다. 2005년 맷 데이먼과 호흡을 맞춘 영화 <그림형제-마르바덴 숲의 전설>이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와 별개로 히스 레저는 할리우드에 순조롭게 정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스 레저는 같은 해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뛰어난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영화 속에서 부부로 출연했던 배우 미셸 윌리엄스와 약혼해 딸 마틸다를 얻었다. 비록 두 사람은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2007년 파혼을 했지만 히스 레저는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와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촬영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젊은 기수로 자리를 굳히던 히스 레저는 2008년 1월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인한 약물오용으로 뉴욕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히스 레저가 조커 역으로 열연을 펼친 <다크나이트>는 슈퍼 히어로 영화로는 역대 최초로 세계흥행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눈부신 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히스 레저는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사후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히스 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한동안 촬영이 중단됐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조니 뎁과 조드 로, 콜린 파렐이라는 할리우드의 스타배우들이 4인 1역으로 작품에 참여하며 촬영을 마쳤다(주인공 토니의 모습이 변한다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이런 촬영이 가능했다). 그리고 히스 레저가 못다한 작품을 완성시킨 동료배우 조니 뎁과 주드 로, 콜린 파렐은 자신들의 출연료 전액을 히스 레저의 딸 마틸다에게 기부했다. 

묵직한 주제의식과 영화적 재미 모두 잡은 명작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변신의 귀재' 크리스찬 베일은 <다크 나이트>에서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를 히스 레저에게 양보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변신의 귀재' 크리스찬 베일은 <다크 나이트>에서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를 히스 레저에게 양보했다. ⓒ 워너 브더러스 코리아(주)

 
사실 할리우드에서 <배트맨> 프랜차이즈는 이미 1990년대에 그 생명력이 다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감독이 팀 버튼에서 조엘 슈마허로, 배우가 마이클 키튼에서 발 킬머, 조지 클루니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배트맨 고유의 매력이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1997년 <배트맨과 로빈>을 끝으로 할리우드에서 배트맨은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천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세 편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는 도합 세계흥행 24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중에서도 히스 레저가 출연했던 두 번째 이야기 <다크 나이트>는 슈퍼 히어로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은 걸작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선과 악의 경계라는 무거운 주제와 메시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히어로 영화 특유의 정체성과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마니아 관객들과 일반 대중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조커가 처음 등장하는 오프닝 장면을 시작으로 배트맨이 조커의 차를 뒤집는 장면, 그리고 조커가 탈출하면서 병원건물을 부수는 장면 등은 여느 액션영화의 명장면들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조커의 공격을 받은 배트모빌이 자체 수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망가지자 배트포드(모터사이클)를 출발시켜 추격을 이어가는 장면도 상당히 볼 만하다. (배트포드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이 아닌 캣우먼(앤 해서웨이 분)이 주로 이용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을 가장 긴장하게 만든 부분은 역시 중요한 순간마다 사람을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조커의 문제들이었다. 조커는 배트맨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영웅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 분)와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 도스(매기 질렌할 분)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게 만들며 배트맨을 큰 고민에 빠트린다. 폭탄이 설치된 두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수 있게 만든 '사회실험' 역시 조커이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잔인한 문제였다.

사실 배트맨은 총알도 막을 수 있는 강한 내구성을 가진 수트를 입고 있지만 다른 슈퍼 히어로들과 달리 특별한 능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다(물론 평범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힘이 세고 재산이 많지만). 따라서 다른 히어로들이었다면 쉽게 해결했을 법한 사건도 고생 끝에 힘들게 해결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인간적인 히어로'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신을 희생한 배트맨 대신 영웅이 된 하비 덴트
 
 배트맨이 점 찍은(?) 하비 덴트(오른쪽)과 레이첼 도스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는다.

배트맨이 점 찍은(?) 하비 덴트(오른쪽)과 레이첼 도스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는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지난 1995년에 개봉했던 <배트맨 포에버>에서는 명배우 토미 리 존스가 하비 덴트와 투페이스를 연기했다. 하지만 <배트맨 포에버>에서는 매력적인 빌런 하비 덴트를 단순한 미치광이 살인자로 만들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에 놀란 감독은 <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덴트를 배트맨으로부터 직접 고담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정의의 상징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해 배트맨에게 원한을 가진 악당 '투페이스'로 변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었다.

'투페이스'가 된 덴트는 고든 국장(게리 올드만 분)에게 아내와 아들 중 한 사람만 고르라고 하지만 배트맨이 투페이스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리고 고든의 아들을 구한다. 그리고 조커가 저지른 죄를 뒤집어 쓴 배트맨은 숨을 거둔 하비 덴트를 고담의 영웅으로 남기고 자신은 '어둠의 기사'가 되는 길을 택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덴트 역을 맡은 아론 에크하트는 2013년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는 미국 대통령을 연기한 바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속편이나 다음 회차에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면 '연결'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천하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사이에서 '캐릭터 연결'에 실패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케이티 홈즈가 연기했던 레이첼 도스 캐릭터가 <다크 나이트>에서는 매기 질렌할로 바뀐 것이다.

히스 레저와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에 출연했던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인 1977년생 매기 질렌할과 1978년생 홈즈는 실제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배우의 이미지가 워낙 달라 관객들로부터 레이첼 도스가 너무 심하게 변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홈즈가 2011년에 출연한 드라마 <케네디스>에서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자 적어도 작품 속에서 민폐가 되진 않았던 매기 질렌할의 무난한 연기가 팬들 사이에서 재평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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