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영국의 이순신'으로 꼽히는 윈스턴 처칠(영국 61, 63대 총리)은 현대 영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정치가이자, 역대 총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보낸 인물로도 꼽힌다. 한때는 '실패의 아이콘'으로 꼽히며 '가문빨'로 출세한 삼류 정치가 정도로 잊혀질 뻔했던 처칠은, 2차대전이라는 역사의 격랑을 맞이하면서 조국을 존망의 위기에서 건져낸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오늘날도 영국인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1세, 찰스 다윈, 아이작 뉴턴, 셰익스피어등 수많은 걸출한 위인들을 제치고 '영국인이 뽑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꼽힐 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처칠의 매력과 진면목은 무엇일까.
 
9월 13일 방송된 tvN 역사 예능물 <벌거벗은 세계사> 64회에서는 '처칠은 어떻게 히틀러로부터 영국을 구했나'라는 주제로 서양근대사 전문가인 윤영휘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 처칠의 인생으로 돌아본 근현대 영국사를 조명했다.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영국 옥스퍼드셔의 블래넘 궁전에서 출생했다. 처칠의 가문은 '말보로 공작' 작위를 받은 영국에서도 최고위 귀족가문이었고,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만큼 거물 정치인이었다. 외가는 미국 뉴욕의 대부호인 레너드 월터 제롬의 딸이 바로 처칠의 어머니인 제니 제롬이었다. 유럽 전통 귀족가문인 부계와 미국 신흥 부자 가문인 모계를 모두 이어받은 처칠의 배경은, 영국 사회에서도 '금수저의 끝판왕'으로 꼽힐 만큼 상류층의 전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금수저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처칠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공부였다. 처칠은 학창 시절 우등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악동에다가 문제아였다. 성적은 낙제생에다가 학교 생활도 좋지 않아 당시 학생기록부에는 끊임없이 다투고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처칠의 일탈에는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와 사교계에 흠뻑 빠진 어머니 사이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며 자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처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처칠의 성적이 일반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삼수 끝에 간신히 합격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사관학교 진학으로 처칠은 그의 인생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가'와 '전쟁'이라는 두 가지 인연을 만나게 된다.
 
영국인이 뽑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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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처칠의 사진마다 항상 등장하는 시가는 그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로 꼽힌다. 기병장교로 쿠바에 임관하며 21살에 처음 접하게 된 시가는 이후 처칠이 평생 사랑하는 애호품이 됐다. 시가와 관련하여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1941년 촬영된 '포효하는 사자(A Roaring Lion)' 사진이다.
 
당시 2차대전이 한창 진행중인 가운데 처칠은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을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서 홍보용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는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의 근엄있고 카리스마있는 모습을 담아내려했지만, 골초인 처칠이 시종일관 시가를 놓지 않자 참다못해 그가 물고있던 시가를 손으로 잡아 빼버리는 간 큰 행동을 저질렀다. 당연히 열받은 처칠은 순간적으로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고, 카쉬는 바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오늘날까지 처칠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생컷'이 바로 이 순간에 탄생했다.
 
사실 여기에는 또다른 비하인드 컷도 존재한다. 카쉬가 찍은 사진을 보고 마음이 풀린 처칠은 한 장을 더 찍어줄 것을 요청했고, 여기서는 좀전과 다르게 절제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이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이미지를 고려한 선택이었지만, 훗날 유명해진 것은 역시 인상을 쓰고 있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2016년 발행된 영국의 5파운드 지폐에서도 바로 처칠의 사진이 등장한다. 사진의 유명한 제목은 처칠이 카쉬의 대담한 행동을 두고 "당신은 포효하는 사자도 조용히 사진 찍게 할 수 있겠군"이라고 농담을 던진 데서 유래했다.
 
처칠의 두 번째 평생 인연으로 역시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 2차 보어전쟁(1899~1902)에 종군했던 처칠은 보어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처칠은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했고 영국으로 귀환하여 전쟁영웅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처칠은 26세에 정계에 입문했다. 국회의원을 거쳐 통상장관-경제장관-내무장관을 거쳐서 37세에는 해군장관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해군장관 시절 처칠의 정치인생에 최대의 위기도 찾아온다. 바로 갈리폴리 전투였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속한 연합군은 독일 편에 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작전을 벌였다. 당시 작전을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 바로 처칠이었다. 하지만 전투는 수많은 사상자를 낳으며 참혹한 실패로 끝났고, 처칠은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해군장관직에서 사임하며 정치적 시련기를 보내야했다. 이후로도 그의 정적들이 치열한 논쟁을 하다가도 '갈리폴리'라는 단어만 꺼내들면 처칠은 대뜸 얼굴이 붉어지며 꼼짝못할 만큼 흑역사로 남았다.
 
처칠은 평소 '검은 개'라고 부르던 우울증에 평생 시달렸는데, 이 시기 갈리폴리 전투를 겪으며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절망감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처칠은 그림 그리기로 위안을 찾았다. 처칠은 "하늘나라에 간다면 처음 100만 년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할 만큼 그림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솜씨로 수준급이어서 사후 그가 남긴 유작들은 지금도 경매를 통하여 최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뮌헨 회담의 한계 꿰뚫어 본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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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으로 출세했고 전쟁으로 바닥을 찍었던 처칠을 다시 일으켜세워준 사건도 바로 전쟁이었다. 훗날 처칠의 라이벌이 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등장이다. 히틀러는 1차대전의 패전으로 영토를 잃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감당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독일 국민들에게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해 전쟁을 선동하면서 지지를 얻었다.
 
1933년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2년 뒤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하고 유럽 침공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유럽 사회는 1차대전의 기억으로 인하여 전면전은 가급적 피하고 싶어하는 여론이 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하여 전쟁을 피하는 조건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였던 슈데텐란트의 독일 병합을 허용하는 데 합의한다. 바로 영국 외교사에서 최대의 오판이자 가장 굴욕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뮌헨 협정(뮌헨 회담)'이다.
 
당시 네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귀국 후 뮌헨 협정의 성과를 강조하며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자화자찬하며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사실 당시만 해도 영국 사회에서는 1차대전같은 끔찍한 전쟁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강했고 체임벌린의 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런 뮌헨 회담의 한계를 일찌감치 꿰뚫어 본 인물이 바로 처칠이었다. 그는 체임벌린에게 "당신은 불명예와 전쟁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당신은 불명예를 선택했고 곧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처칠은 1930년대부터 히틀러의 야욕과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에 주목하며 '결코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결국 히틀러는 뮌헨 협정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영토마저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며 본격적인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영국은 히틀러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처칠의 혜안에 주목하고, 정치적으로 부활한 처칠은 해군장관 복귀에 이어 사임한 체임벌린의 뒤에 이어 영국의 전시 총리로 추대된다. 그의 나의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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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초기 전황은 영국에 극도로 불리했다. 동맹국인 프랑스가 독일의 기습으로 순식간에 무너졌고, 서유럽 전역은 사실상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취임해야 했던 처칠은 영국 국민들에게 전하는 첫 연설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 눈물, 그리고 땀뿐이다. 우리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위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처칠은 곧이어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마디로 답할 수 있다. 승리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공포가 닥쳐오고, 멀고 험한 길이라고 해도 승리다.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현재 절망적인 상황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항전 의지와 희망도 드러낸 처칠의 명연설은 지금도 레전드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동시대의 라이벌인 처칠과 히틀러 모두 '언어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명연설가로 유명했다. 히틀러가 강력한 말과 행동으로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는데 능한 선동가였다면, 처칠은 절제된 표현과 세련된 비유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데 능했다.
 
세 번의 결정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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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이 히틀러의 침공으로부터 영국을 구할 수 있었던 세 번의 결정적 사건이 존재한다. 첫째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이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격 공세에 밀려 대륙에서 고립된 40만 명의 연합군을 영국으로 무사히 구출해내며 지금까지 '세기의 철수작전'으로 꼽힌다. 됭케르크 작전으로 약 33만 8천 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들이 무사히 영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들은 훗날 2차대전에서 연합군 전력의 핵심으로 활약하게 된다.

됭케르크 작전을 성공시킨 후 처칠은 대국민 연설을 통하여 "우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이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We shall never surrender)"라는 또 하나의 명연설을 남겼다. 영국인들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로 회자되며 지금도 '됭케르크 정신'이라는 표현이 포기하지 않는 통합의 정신을 추구하자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영국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히틀러는 섬나라인 영국을 바다를 건너 침공하기 위해서 먼저 공군력을 제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시작이다.
 
독일 공군은 수도인 런던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특히 런던 대공습은 본토 항공전 기간 중에도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투로 꼽힌다. 영국인들은 도시가 폭격을 당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도 직장을 다니고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당시 영국인들의 심경을 대변한 유명한 포스터와 문구가 바로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이다. 왕실과 정부, 시민들까지 하나로 통합된 영국인들의 결연한 항전의지에 힘입어 본토 항공전은 1940년 10월 31일, 사실상 영국의 판정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영국이 본토항공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전투기와 레이더의 우위 덕분이었다. 처칠은 총리가 된 후 공중전의 중요성에 주목하며 영국의 전투기와 폭격기 생산을 독려했고, 영국의 주력기 스핏파이어는 독일 메서슈미트와의 공중전에서 우위를 점했다. 또한 영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하여 '체인 홈'이라 불리우는 레이더 송수신 네트워크 시스템까지 구축했다. 독일도 레이더는 개발된 상태였지만 히틀러는 그 기능성을 과소평가했고, 처칠과 달리 전문가인 장군들의 조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독선적인 전략운용으로 자멸했다.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중요한 공군력을 상실했고, 조급함에 영국을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을 침공하면서 양면전선을 형성하는 자충수로 이어진다. 본토항공전과 독소전쟁은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전쟁이 장기화로 접어들면서 패망의 빌미가 된 두 가지의 결정적인 판단착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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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하지만 2차대전에서 처칠의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외교력으로 미국의 지원과 참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처칠은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미국의 참전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여 루스벨드 대통령에게 무려 천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며 간곡하게 설득했다. 처칠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도 내가 프랭클린에게 한 것 만큼 못할 거다"라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
 
처칠과 루스벨트 사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존재한다. 크리스마스에 백악관을 방문했던 처칠은 숙소에서 목욕 후 알몸으로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찾아온 루스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하여 자리를 피하려는 루스벨트에게 처칠이 넉살 좋게 날린 애드립이 걸작인데 "보십시오 대통령 각하,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국 대통령께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였다고. 그만큼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처칠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이처럼 2차대전에서 영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처칠의 불도저같은 모습이 미국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다수의 만평에서는 처칠을 불도그로 묘사하는 일종의 관행이 생겼다. 처칠의 얼굴에 불도그를 합성하고 'Holding the line(물러서지 않는다)'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삽입한 만평은, 당시 끈기있고 고집이 센 처칠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개가 비하의 의미로 쓰이지 않는 서양권의 특성 때문인지, 의외로 처칠도 불도그라는 별명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고.
 
처칠의 노력에 힘입어 미국은 영국에 약 310억 달러에 이르는 무기를 지원했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기점으로 결국 2차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드디어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한 처칠은 영국 국민을 향하여 두 손가락을 들고 '승리(Victory)'을 의미하는 V자 포즈를 날렸고, 이는 처칠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포즈로 각인됐다.
 
여기에는 또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본래 V자를 하면서 손등을 앞으로 보이는 동작이 영국에서는 욕설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처칠이 자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의미가 변화됐다는 것. 처칠이 히틀러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한방 먹인다는 의미로) 이런 포즈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
 
연합군은 총공세 끝에 1945년 나치 정권을 패망시키고 독일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처칠은 영국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하지만 처칠은 승리를 눈앞에 둔 1945년 7월, 총리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처칠 개인의 지지는 여전히 높았지만 영국인들은 전후 경제와 사회 재건에 있어서 '전시총리'에 적합했던 처칠과 보수당보다는 노동당을 선택했다. 당시 포츠담 회담 중이던 처칠은 중도에 귀국하여 클레멘트 애틀리(62대 총리)에게 총리직을 인계해야 했다.
 
처칠은 77세인 1951년 총선승리를 통하여 63대 총리로 다시 한번 복귀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53년에는 본인이 집필한 2차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예와 영광을 모두 누린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영국은 세인트폴 성당에서 처칠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며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지킨 영웅을 성대하게 예우했고, 많은 시민들이 그에게 진심어린 애도를 표했다.
 
처칠이 총리 시절에 국왕으로 취임했고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지난 2022년 9월 8일 서거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다른 어떤 후임 수상도 나를 지혜롭게 인도해준 첫 수상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처칠을 특별하게 예우한 바 있다.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한 걸물이자 괴짜답게 처칠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난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분이 나같은 사람을 만나는 시련에 준비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이라는 남다른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처칠은 모교인 해로우 스쿨에서 남긴 연설에서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in, never, never)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했다.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처칠은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되돌릴 수 없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할 수 있는 용기'라는 신념을 항상 강조하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물론 처칠도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실수와 실패를 저질렀고, 결점도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도 처칠은 평생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영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도 불굴의 의지로 조국을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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