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연방 대통령의 장례식이 이달 3일 있었다.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지만 국장급에 준하여 치러진 장례식과 몰려든 수많은 추모객이 그가 현 러시아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실감케 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권의 몰락을 결정지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다. 소련의 경제발전을 억압하는 정치체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집권 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개방,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현재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결함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긍정적인 부분은 모두 그의 정책에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고르바초프 최대의 업적은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는 동독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아 서독의 흡수통일을 묵인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철군 결단을 내렸다. 동유럽 공산권의 변화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미국 대통령과 만나 냉전종식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반세기를 이어온 3차 대전의 위협으로부터 인류가 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개혁·개방 정책의 실패와 강성했던 소련의 패망에도 전쟁의 위협을 크게 줄였다는 건 고르바초프의 분명한 업적이다.
 
페일 세이프 포스터

▲ 페일 세이프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냉전 배경 일촉즉발 서스펜스

사회문제에 관심이 큰 영화인으로 꼽히는 조지 클루니는 21세기 시작과 함께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해 화제를 모았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사이에서 언제고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관객의 눈앞에 펼쳐놓은 수작이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초다. 평소처럼 훈련을 위해 출격한 핵폭격 편대에게 기계오류로 잘못된 지령 하나가 하달된다. 모스크바에 핵폭격을 시행하라는 지령이다. 매뉴얼에 따라 편대는 모스크바로 향한다.

사령부는 뒤늦게 명령이 잘못 하달된 사실을 알아차린다. 부랴부랴 출격한 편대에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들은 메시지를 수신하지 않는다. 이미 페일세이프지점을 지나친 것이다.
 
페일 세이프 스틸컷

▲ 페일 세이프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작은 시스템 결함이 핵전쟁 위험으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페일 세이프 Fail Safe'는 이 대목에서 의미를 드러낸다. 페일 세이프는 출격해 목표한 일정 지점을 돌파한 군비행편대가 어떠한 통신명령도 거부하는 체계다. 적의 통신공작에 의한 교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장 시 안전작동 체계다.

이에 따라 비행편대는 명령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명령마저도.

급박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통화는 흥미롭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하다. 자신이 이끄는 도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하는 대통령과 자신의 가족을 향해 핵을 투하해야만 하는 블랙장군의 선택은 일촉즉발이던 냉전 체계의 긴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체 누가 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뇌리를 친다.

미국과 소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북한과 종전선언을 하지 못한 분단국 한국의 오늘도 그와 얼마 다르지 않다. 국민들은 전쟁을 먼 일쯤으로 여기며 일상을 살지만 언제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긴장이 때로 터져 나와 아까운 생명이 죽고 방대한 노동이 생산적이지 못한 곳에 투여되기도 하며 있을 수 있었던 투자를 받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페일 세이프 스틸컷

▲ 페일 세이프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한국에도 남다른 '실패한 안보' 영화

두 차례 연평해전과 포격도발 등에서 숨진 장병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안타까운가. 군부대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의문사 사건 및 인권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페일 세이프> 속 이야기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페일 세이프>는 1962년 유진 버딕과 하비 윌러가 공저한 소설로부터 태어났다. 이 소설은 1964년 거장 시드니 루멧이 <핵전략 사령부>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조지클루니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해 생방송 TV물로 제작하고 이를 다시 영화화 한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낳는 핵전쟁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시점에서 살펴볼 만한 작품이다. 직역해 '실패한 안보'란 이름도 잘 어울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고르바초프가 이룩한 냉전의 종식이 얼마나 큰 변화였던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페일 세이프 홍보사진

▲ 페일 세이프 홍보사진 ⓒ 워너 브라더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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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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