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에 개봉해 27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최고 명장면은 단연 한 자리에 모인 어벤져스 멤버들과 타노스 부대가 정면으로 맞붙는 마지막 전투신이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이 대결에서 타노스는 '끝판왕'답게 대부분의 히어로들을 제압하지만 유독 이 히어로에게는 맥을 못 추고 당했다. 바로 분노에 휩싸여 눈동자마저 빨간색으로 변한 완다 막시모프, 히어로명으로는 '스칼렛 위치'였다.

하지만 서로를 상대하는 완다와 타노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전 편인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에 의해 사랑하는 비전을 잃은 완다는 타노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반면에 비전의 이마에서 마인드 스톤을 뜯어냈던 타노스가 아닌 평행세계에서 지구로 넘어온 또 다른 타노스에게 완다는 '초면'이었다. 실제로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완다를 본 타노스의 첫마디는 "나는 네가 누군지도 모른다"였다.

하지만 실제 완다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올슨과 타노스 역을 맡은 조슈 브롤린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하기 7년 전에 이미 한 영화를 통해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다. 그것도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한국영화의 리메이크작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욱 익숙한 작품이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했고 '타노스' 조슈 브롤린이 한국판의 오대수에 해당하는 인물을 연기했던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였다.
 
 할리우드에서는 일본 원작만화가 아닌 박찬욱 감독의 한국영화 <올드보이>의 판권을 구입해 리메이크를 진행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일본 원작만화가 아닌 박찬욱 감독의 한국영화 <올드보이>의 판권을 구입해 리메이크를 진행했다.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타노스'가 되기 전, 브롤린은 '오대수'였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한 원로 배우 제임스 브롤린의 아들인 조슈 브롤린은 10대 시절이던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의 가족 모험 영화 <구니스>를 통해 데뷔했다. 이후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브롤린은 좀처럼 배우로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2000년 엘리자베스 슈, 케빈 베이컨과 함께 폴 버호벤 감독의 <할로우맨>에 출연하면서 조금씩 주목 받기 시작했다.

2005년 <블루 스톰>, 2007년 <아메리칸 갱스터>에 조연으로 출연한 브롤린은 코엔 형제 감독이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 트웰린 모스를 연기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함께 출연한 안톤 시거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역대급 명연기'를 선보이면서 브롤린은 또 다시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010년에 출연했던 DC코믹스 원작의 <조나 헥스>역시 평단과 흥행에서 모두 큰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브롤린은 2012년 마블 코믹스 원작의 <맨 인 블랙3>에서 '닮은 꼴 배우'이기도 한 토미 리 존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면서 흥행배우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3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영문도 모르고 20년 동안 감금방에 갇히는 조 두셋을 연기했다. 할리우드판 <올드보이>는 한국버전(1500만 달러)보다도 못한 500만 달러 흥행에 그쳤지만 공교롭게도 브롤린은 <올드보이> 이후 배우생활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2015년 <에베레스트>, 2016년<헤일,시저!>에 출연한 브롤린은 2018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인피니티 사가의 '끝판왕' 타노스 역을 맡아 어벤져스 멤버들과 전 세계 관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같은 해 엑스맨 유니버스의 <데드풀2>에서 케이블을 연기했고 타노스와 케이블은 브롤린의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 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타노스는 <인피니티 워>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초야에 숨지만 <엔드게임>에서 평행세계의 타노스로 재등장해 다시 한 번 어벤져스와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브롤린은 작년에도 1984년 이후 37년 만에 개봉한 영화 <듄>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워마스터 거니 할렉을 연기했다. 브롤린은 지난 2019년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당시 자신의 SNS에 한국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현지 관객 공감시키지 못한 스파이크 리의 감성
 
 할리우드 판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올드보이>의 롱테이크 장도리 액션은 한국판의 처절함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할리우드 판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올드보이>의 롱테이크 장도리 액션은 한국판의 처절함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사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연재됐던 동명의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일본 원작만화가 아닌 박찬욱 감독이 연출했던 한국영화의 판권을 구입했다. 그만큼 박찬욱 감독 버전 <올드보이>의 완성도를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블랙클랜스맨>으로 201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감독이다. 하지만 <올드보이>에서는 주인공 조 두셋(조슈 브롤린 분)이 감금방 안에서의 독학 훈련으로 강해진다거나 출소(?) 후 감금방에서 먹었던 군만두의 기억으로 감금방 위치를 알아내는 등 박찬욱 감독 버전에서 등장했던 아이디어를 그대로 활용한 장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두 영화의 다른 부분도 적지 않다. 한국판은 감금기간이 15년이었던데 비해 할리우드판에서는 20년 동안 갇힌다. 조 두셋의 딸이 납치 당시 3살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 20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서극 등 세계적인 액션 장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던 롱테이크 장도리 액션장면 역시 할리우드판에도 그대로 나오지만 최민식이 연기했던 오대수의 처절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한국판에서 유지태가 연기했던 이우진의 캐릭터다.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에 해당하는 애드리안 프라이스 역은 <디스트릭트9>과 < A-특공대 >,<엘리시움> 등으로 이름을 알리던 샬토 코플리가 맡았다. 물론 코플리 역시 애드리안의 복수심을 잘 표현했지만 유지태가 선보인 이우진 특유의 냉정한 카리스마와 광기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사실 당초 스파이크 리 감독이 편집했던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의 런닝타임은 140분이었다고 한다(박찬욱 감독 버전은 120분). 하지만 흥행성적을 걱정한 제작사에서 무려 35분을 걷어내 극장에서는 105분으로 축약된 버전이 개봉했다. 당연히 스파이크 리 감독과 브롤린은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할리우드판 <올드보이>는 감독판이 나오지도 못한 채 쓸쓸히 잊히고 말았다.

타노스-완다-퓨리-맨티스가 <올드보이>에?
 
 <올드보이>에는 '행복' 역의 폼 클레멘티에프를 비롯해 MCU 배우가 4명이나 출연한다.

<올드보이>에는 '행복' 역의 폼 클레멘티에프를 비롯해 MCU 배우가 4명이나 출연한다.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연기했던 오대수는 할리우드판에서 조슈 브롤린이 연기했고 브롤린은 다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 역을 맡았다. 그리고 <올드보이>에서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도 역은 할리우드판에서 신예배우 엘리자베스 올슨이 연기했고 올슨은 다시 <어벤져스>에서 염동력과 정신조작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히어로 스칼렛 위치로 변신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오달수라는 배우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영화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에서 오달수가 연기한 감금방 운영자 차니 역은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했다. 닉 퓨리를 연상케 하는 머리에 위만 살짝 기른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차니는 장도리로 생니 15개가 뽑힌 한국판의 철웅과 달리 목 피부가 벗겨진 채로 소금과 물을 이용한 고문을 당했다.

할리우드판 <올드보이>에는 조슈 브롤린과 엘리자베스 올슨, 사무엘 L. 잭슨 외에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가 한 명 더 등장한다. 바로 애드리안의 여성 보디가드 행복을 연기했던 폼 클레멘티에프였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김병옥이 연기했던 한실장 역할의 여성버전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은 한실장처럼 다양한 격투기술로 조 두셋을 압도하다가 두셋이 휘두른 칼에 목이 베이며 최후를 맞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올드보이 스파이크 리 감독 조슈 브롤린 엘리자베스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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