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에서 명성황후, 장녹수, 신사임당, 황진이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소환된 여성 인물 중 한 명이다.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은 조선 시대 후기의 정치사와 왕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궁녀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희대의 악녀까지, 장희빈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은 수많은 대중문화가 사랑한 소재로 활용됐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장희빈의 이미지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과연 그녀는 역사가 기록한 대로 왕의 사랑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다가 몰락한 조선 최고의 악녀였을까. 9월 7일 방송된 tvN STORY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20회에서 '장희빈은 어떻게 조선의 신데렐라가 되었나' 편을 다루며 그녀의 삶을 돌아봤다.
 
1694년, 조선 19대 국왕 숙종은 왕실의 의례용 도장인 '옥보'를 부수라는 어명을 내린다. 옥보는 왕실에서도 국왕과 왕세자 부부까지 단 4명에게만 허용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누군가의 옥보를 부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은, 왕실의 일원으로서 그 권한과 명예를 박탈한다는 의미였다. 옥보의 주인공은 누구였으며 왜 숙종은 이런 명을 내렸을까.

장희빈에 빠진 숙종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이야기는 1686년으로 돌아간다. 당시 26세의 청년군주였던 숙종은 한 신하의 상소에 몹시 격분한다. <숙종실록>에는 "국가의 재앙과 난리는 여인을 총애하는 데서 옵니다. '장녀'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라는 상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자연재해와 재난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숙종이 한 여인을 총애하여 국정을 소홀히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왕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상소에 언급된 장녀는 바로 장희빈이었다. 숙종은 장희빈을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엄벌을 내렸다. 이는 당시 숙종이 그만큼 장희빈에게 빠져있었다는 것과,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국정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 희빈은 그녀가 받은 후궁으로서의 품계를 의미하는 호칭이다. 조선시대 신분서열상 중인에 해당하는 역관(통역사)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장희빈은,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궁녀가 되어 궁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숙종실록>에는 '자못(매우)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장희빈의 외모를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실록에 궁궐 여인의 외모가 기록된 사례는 장희빈이 유일무이하다. 1680년, 당시 20세의 숙종은 22세의 장희빈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를 젊은 나이로 병으로 떠나보내야했던 숙종은 장희빈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왕과 궁녀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두고 '승은(承恩)을 입었다'라고 표현한다. 장희빈은 일반 궁녀에서 승은 궁녀로 신분이 상승하며 왕의 공식 첩인 후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탐탁지않게 여겨 그녀를 궁에서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실록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그 사람(장희빈)은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다. 주상이 평일에도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장옥정의 성격을 문제삼았다.
 
사실 여기에는 당파싸움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더 크게 작용했다. 명성왕후의 가문이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이었다면, 장희빈은 그 정적이던 남인 세력과 가까웠다. 숙종은 결국 어머니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희빈은 한순간에 궁에서 쫓겨나 숙종과 생이별을 해야했다.
 
장희빈이 궁을 나간 지 얼마되지 않은 1681년 5월, 숙종은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와 재혼한다.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의 실세였던 민유중의 딸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686년, 쫓겨났던 장희빈이 궁궐로 복귀한다. 장희빈을 궁으로 부른 사람은 놀랍게도 인현왕후였다.

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을 그리워하는 숙종의 마음을 눈치챈 인현왕후는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권했다고 나와있다. 인현왕후의 대인배적인 기질과 함께 본인이 중전(왕비)이라는 자신감을 함께 보여주는 대목이다.
 
희비가 엇갈린 장희빈과 인현왕후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5년 만에 재회한 숙종과 장희빈은 다시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현왕후와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진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있는 중궁전에 발길을 끊고 장희빈만 찾았다.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위한 별당을 지어주기도 했다.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장희빈의 위세는 날로 높아졌다.
 
어느날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불러들여 종아리를 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인현왕후의 부름을 무시하고 점점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장희빈에게 인현왕후가 분노했던 것. 하지만 숙종은 보란듯이 오히려 어명을 내려 장희빈을 종 4품 숙원으로 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개 궁녀였던 장희빈이 어엿한 정식 후궁이 된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한 장희빈은 종2품 숙의, 정2품 소의로 품계가 점점 올라갔다.
 
숙종 15년, 임신한 장희빈은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후사에 목말랐던 숙종이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첫 아들이자 훗날 경종(조선 20대 국왕)이 되는 인물이다. 귀한 왕자를 출산한 장희빈의 위상은 절정에 오른 반면, 후사를 낳지 못한 인현왕후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졌다.
 
왕자 출산 소식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궁으로 찾아왔다. 문제는 중인 신분이던 그녀가 사대부 집안 여성들이 함부로 탈 수 없는 옥교를 타고 입궁했다는 것. 조선의 법도를 어긴 일이라고 생각한 신하와 관리들은, 장희빈의 어머니를 강제로 가마에서 내리게 하고 하인들에게 벌을 주는가하면 옥교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는 서인 세력이 남인계열인 장희빈 가족이 왕의 총애를 믿고 위세를 부리는 데 대한 견제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숙종은 분노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혹독한 심문으로 두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어 숙종은 태어난 지 백 일도 안 된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인 원자로 봉했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조선 왕실에서 본래 원자의 자격은 정실부인이 낳은 적장자여야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신하들은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이라며 후궁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데 강하게 반대했지만 숙종은 고집을 부리며 하루 만에 원자 책봉을 강행했다. 또한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중 최고 품계인 정1품 빈에 봉한다. 우리가 아는 '장희빈'이라는 이름의 탄생이다.
 
당시 조선의 원로대신이자 서인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은 상소에 올려 원자 책봉을 반대한다. 분노한 숙종은 당대의 거물급 정치인인 송시열을 하루아침에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을 지시한 데 이어, 결국에는 사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숙종은 집권세력을 교체하는 정계 개편인 '환국(換局)'을 단행한다. 송시열을 시작으로 서인세력은 권력에서 밀려났고 장희빈 중심의 남인으로 교체되니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숙종의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조선 후기의 당파싸움이 서로 죽고 죽이는 '피의 악순환'으로 타락하는 전환점이었다.
 
조강지처 쫓아내려 한 숙종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숙종은 급기야 사랑하는 장희빈을 중전으로 올리기 위하여 걸림돌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기로 결심한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낼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그녀가 3년전 꿈에서 선왕과 선왕비를 만났던 이야기를 거론했다. '인현왕후와 다른 후궁들은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지만 '장희빈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인현왕후는 그 꿈 이야기를 숙종에게 전했다. 결과적으로 꿈과는 반대로 장희빈은 오히려 아들을 낳았지만 인현왕후는 그렇지 못했다.
 
인현왕후가 꿈을 핑계로 장희빈을 뒷담화한 의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3년 전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인현왕후에게 투기(질투)를 했다는 유일한 증거로 몰아붙여 조강지처를 쫓아내려했던 숙종 역시 구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집권세력이자 인현왕후와 진영상으로는 정반대편에 있던 남인들마저도 왕비가 부덕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옹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숙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폐비를 강행했다. 인현왕후가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8년 만이었다.
 
인현왕후 폐비 불과 4일 뒤, 숙종은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다. 궁녀 출신으로 왕비가 된 것은 최초의 사례였고, 인생역전에 성공한 장희빈은 말 그대로 '조선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정점에 올랐다. 정통과 질서를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정실부인을 내치면서 후궁을 왕비로 세운 유례없는 사태는 큰 충격을 줬고, 백성들조차도 깜짝놀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장희빈을 향하여 언제나 뜨거울 것 같았던 숙종의 사랑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숙종은 또다른 궁녀와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바로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다. 그녀가 임신하여 낳은 숙종의 아들이 바로 조선 21대 왕인 영조다.
 
질투심에 눈이 먼 장희빈은 최씨를 찾아 매질을 하고 학대했다. 소식을 듣고 들이닥쳐서 이 모습을 목격한 숙종은 크게 분노한다. 악화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사이에 장희빈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도 급변했다. 격렬하게 대립하던 서인과 남인 세력은 서로가 역모를 꾸몄다고 상대를 고발했다. 숙종은 이전과 달리 서인 세력의 손을 들어주며 남인을 몰아낸다. 이는 장희빈을 향한 숙종의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여기에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를 둘러싼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희빈에 대한 분노와 정치적으로 무능력한 남인들에 대한 실망감이 겹치면서 환국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급기야 숙종은 장희빈을 다시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폐비시킨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귀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신하들은 인현왕후가 폐비되었을 때와는 또다른 이유로 반대한다. 장희빈은 바로 왕의 후계자인 세자의 생모였다. 연산군 시절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선왕 성종에게 사사된 일로 피바람이 불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신하들은, 훗날 복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숙종은 이번에도 자신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인현왕후는 5년 만에 궁으로 돌아와 중전의 신분을 되찾았다. 숙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중전이 둘일 수 없으니 중전 장씨의 옥보를 부수고 타고 다니던 가마를 불태우라"는 어명을 내린다. 왕비의 상징인 옥보를 잃었다는 것은 장희빈이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조치였다.
 
장희빈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후궁으로 강등된 뒤에도 장희빈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야 합니까'라고 분노하며 숙종을 원망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인현왕후는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복위 후 7년 만에 후사도 없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죄책감과 슬픔에 잠겨있던 숙종에게 충격적인 밀고가 전해진다. 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이 거주하던 취선당의 한편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 밀고자는 숙빈 최씨였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최씨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혹시 사이가 좋지 않은 장희빈이 중전으로 복위하면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 밀고를 한 것.
 
숙종은 장희빈의 처소를 수색하여 훼손된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대노한 숙종은 저주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혹독하게 국문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사실이라는 자백을 받아낸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저주로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장희빈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신하들은 세자의 생모를 죽일 수 없다며 반대하지만, 숙종은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세자를 위한 길"이라며 뜻을 굽히지않았다. 처음에는 자진을 권했으나 장희빈이 거부하자 강제로 사약을 먹여서 사사했다. 당시 장희빈의 나이 43세였다. 심지어 숙종은 장희빈이 죽기 직전에, 앞으로는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으로 치면 특정인을 염두에 둔 '장희빈 특별법'이었던 셈이다.
 
장희빈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후에도 조선의 왕실과 정치사에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장희빈이 남긴 세자는 이후 아버지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평생 불행한 삶을 보내야 했으니 바로 조선 20대 국왕인 경종이다. 그는 세자교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병약하여 불과 재위 4년 만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을 중전으로 복권시키고 싶어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경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 하면서 경종의 이복 동생이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그 뒤를 이으며 장희빈의 복권은 영원히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왕실은 숙종-경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정치적인 비극에 휘말려야 했다.
 
과거에는 장희빈을 우유부단한 숙종을 홀려서 국정을 농단한 요부이자 악녀로 인식하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숙종의 독재군주로서의 면모와 다혈질적인 인성, 극심한 당파싸움이라는 정치적 환경 등이 재조명되면서 장희빈 역시 어쩌면 희생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재해석이 나오고 있다. 장희빈의 삶을 통하여, 역사적 기록이란 단순한 팩트가 아니라 어쩌면 '선택된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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