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포스터

▲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포스터 ⓒ (주)디오시네마

 
일본 영화계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해외 블록버스터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영상화한 작품 외엔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은 그들의 현실은 불과 수십 년 전 그들의 영화가 아시아 최고를 다투던 시절을 무색하게 한다.

그럼에도 일본 영화는 어마어마한 저력을 갖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하마구치 류스케로 이어지는 명장들의 출현은 일본이 예부터 지금까지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예술가의 고장이란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인구 1억 2500만 명이 살아가는 경제대국 안에는 어떻게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겠다 골몰하는 작가들이 적잖이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이 유야는 근래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영화 연출자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선 최희서, 김민재 같이 얼굴이 알려진 한국배우를 출연시킬 만큼 이름값이 있다. 이 영화 주연은 무려 오다기리 죠였는데, 한국과 일본 배우가 함께 출연한 작품 가운데선 손꼽을 정도의 캐스팅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사흘만에 쓴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시이 유야가 한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13년작 <행복한 사전>부터다. 2017년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가 특유의 감상적 느낌으로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2019년 <마츠다군의 세계>를 거쳐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 이른 것이다. 그를 일본 영화의 주역이라 꼽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은 영화들이지만 일본을 넘어 한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이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팬이라면 기억해둘 만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제 막 한국에 개봉한 이시이 유야의 작품이다. 2020년 제작된 것으로, 시나리오는 2019년 여름에 쓰였다. 그해 상해 국제영화제에선 아시아 감독 6명을 선정해 사랑에 대한 영화를 촬영하는 'Back To Basic: A Love Supreme' 프로젝트가 발표됐는데, 이시이 유야가 이에 포함됐다. 다른 5명이 무려 대만의 차이밍량, 중국의 장률과 양진, 말레이시아의 탄 취무이, 홍콩의 옹자광이었으니 이시이 유야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이시이 유야는 3일 만에 각본을 마무리짓고 캐스팅에 돌입했는데, 이때 완성한 시나리오가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엔 <무산일기>로 유명한 감독 겸 배우 박정범도 주요한 역할로 출연한다.

우울과 인간애, 이시이 유야의 정서

이시이 유야의 작품답게 영화 내내 흐르는 정서는 우울함이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침잠하는 인물들의 인간성이 두드러지지만 그들의 불행 역시 거듭돼 막을 수 없는 듯 보인다. 세련되고 멀쩡한 듯 보이는 인간이 폭력적이고 해롭게 등장한다는 설정 역시 반복돼 그의 전작들과 이렇다 할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아츠히사(나카노 타이카 분)와 타케다(와카바 류야 분), 나츠미(오오시마 유코 분)는 어느덧 성인이 됐다. 아츠히사와 나츠미는 결혼해 딸을 뒀다. 아츠히사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타케다와 영어며 중국어를 배운다. 그러나 이들의 오늘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아츠히사는 나츠미의 부정을 목격한다. 나츠미는 뻔뻔하게도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 모든 것에 아츠히사만 똑 빠져 있다. 아츠히사는 낙오되어 텅 빈 방 안에 틀어박힌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결정과 결정을 잇는 인과의 사슬

영화는 불행 뒤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하나의 작은 결정이 또 다른 결정으로, 다시 다른 결정으로 번져나간다. 인과의 사슬이 뻗어나가는 동안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은 제 선택으로 무너지고 또 무너져나간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마도 한 장면이었던 듯 보인다. 아츠히사가 저 멀리 홀로 있는 딸을 향해 달려 나간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여전히 법적으론 권리가 없는 아버지지만 제 딸에게 가서 열렬히 제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 장면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는 친구는 눈물만 뚝뚝 흘린다. 이시이 유야의 오래된 감성, 이를테면 유약하고 우울하며 도피를 일삼는 인물들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인간성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이시이 유야의 다른 영화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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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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