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대중들에게 성시경은 밤잠이 늦은 청취자들을 재우는 심야 라디오 DJ나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맥주잔에 소주를 마시는 유튜버 정도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시경은 2000년 '내게 오는 길'로 데뷔해 '미소천사',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넌 감동이었어', '차마', '잘 지내나요', '거리에서', '안녕 나의 사랑' 등 셀 수 없이 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발라드 왕자'다.

성시경은 뛰어난 음색을 가진 가수로서 데뷔 초기부터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OST에 참여했다. 특히 KBS 2TV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OST였던 '인연'과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수록곡을 리메이크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OST '너에게',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OST '너의 모든 순간' 등은 성시경을 대표하는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성시경은 최근에도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 <구미호뎐>의 OST에 참여했다.

이처럼 많은 OST에 참여한 성시경에게도 '너의 모든 순간'과 함께 대중들에게 유난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가 있다. 노래의 난도가 높아 성시경 본인도 공연에서 부르기 꺼려 하지만 워낙 팬들이 좋아하다 보니 콘서트 레퍼토리에서 뺄 수가 없다고 고백하는 곡이다. 바로 지난 2009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배우 고 장진영의 대표작인 영화 <국화꽃향기>의 OST이자 성시경을 대표하는 명곡 중 하나인 '희재'다.
 
 영화 <국화꽃향기>는 100만부가 넘게 팔렸던 베스트셀러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 <국화꽃향기>는 100만부가 넘게 팔렸던 베스트셀러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 시네마서비스

 
전성기 때 위암으로 세상 등진 여성 배우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한 장진영은 심은하와 고소영 등 또래 배우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과 달리 1992년 미스코리아 충남 진으로 선발되고도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장진영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출연한 작품 중에는 '전설의 시트콤' SBS 드라마 <순풍산부인과>도 있었는데 당시 장진영의 역할은 산부인과의 간호사 3인방 중 가장 존재감 없는 막내 간호사 역이었다.

1999년 <자귀모>를 통해 영화로 데뷔한 장진영은 2000년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대호(송강호 분)가 레슬링을 배우는 체육관 관장의 딸 민영을 연기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반칙왕> 이후 <싸이렌>과 <소름> <오버 더 레인보우> 등에 출연하며 영화를 중심으로 착실히 필모그래피를 쌓던 장진영은 2003년 떠오르는 신예 배우 박해일과 함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국화꽃향기>에 출연했다.

장진영이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주인공 희재를 연기하며 관객들을 울린 <국화꽃향기>는 전국 83만 관객으로 큰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장진영은 <국화꽃향기>를 통해 멜로 배우로 입지를 굳건히 했다. 그리고 장진영은 같은 해 권칠인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싱글즈>에서 서른을 앞둔 싱글 여성 나난 역을 맡아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을 휩쓸며 충무로 최고의 여성 배우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장진영은 2005년 <소름>을 연출했던 윤종찬 감독의 신작 <청연>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 박경원을 연기하며 열연을 펼쳤다. 하지만 <청연>은 100억 원이 넘는 많은 제작비와 배우들의 호연에도 전국 54만 관객에 머물며 흥행에서는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청연>의 두 주인공 박경원과 한지혁을 연기했던 장진영과 김주혁이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다는 점이다.

장진영은 2006년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후 2007년 드라마 <로비스트>에 출연했지만 안타깝게도 <로비스트>는 배우 장진영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2008년 위암 진단을 받은 장진영은 약 1년의 투병 끝에 2009년 9월 향년 37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22년 9월 1일은 장진영이 <국화꽃향기>의 희재처럼 위암으로 투병하다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난 지 13년째가 되는 날이다.

성시경이 만났던 세상에서 가장 예뻤던 '사람'
 
 <국화꽃향기>는 개봉 당시 눈부신 흥행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2000년대를 대표하는 최루멜로 영화로 꾸준히 사랑 받았다.

<국화꽃향기>는 개봉 당시 눈부신 흥행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2000년대를 대표하는 최루멜로 영화로 꾸준히 사랑 받았다. ⓒ 시네마서비스

 
영화 <국화꽃향기>는 김하인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소설 <국화꽃향기>는 2000년대 초반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필독서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100만 부 이상 판매됐던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소설이나 만화를 영화화했을 때 원작의 존재감이 작아지는 경우도 많지만, <국화꽃향기>는 원작의 위엄이 워낙 대단해 끝내 영화가 원작의 인지도를 뛰어넘지 못했다.

<반칙왕>을 기점으로 주연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장진영은 <국화꽃향기>의 희재를 통해 관객들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장진영은 초반 밝고 명랑한 책 동아리의 회장이었다가, 사고로 가족을 잃은 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며 병까지 앓으면서 점점 야위어가는 연기를 실감 나게 선보였다. 특히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아이를 낳으려 하는 희재의 노력은 보는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질투는 나의 힘>을 통해 조승우와 함께' 충무로의 미래'로 떠올랐던 박해일은 <국화꽃향기>의 인하를 통해 처음으로 주연으로 데뷔했다. 희재를 향한 인하의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은 박해일의 순수한 연기와 만나 관객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박해일이 <국화꽃향기>에서 인하 역을 잘 소화하면서 관객들은 두 달 후 개봉한 <살인의 추억>에서 3번째 용의자 박현규를 보며 더욱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영화 <국화꽃향기>는 그 어떤 반전 요소도 없이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뻔한 멜로 영화다. 하지만 이미 1990년대 후반 <편지> <약속> 등을 통해 증명된 한국의 최루성 멜로는 <국화꽃향기>에서도 여전히 그 힘을 유지했다. "그녀가 친 것은 배였는데 아파오는 건 가슴이었습니다" 같은 인하의 독백이 낯간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영화 <국화꽃향기>를 제대로 몰입해 감상했다는 뜻이다.

사실 <국화꽃향기>는 영화 이상으로 성시경이 부른 OST '희재'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희재>는 영화 속에서 인하가 희재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고 군에 입대하고 희재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준비하는 등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장면에서 쓰였다는 점이다. 성시경은 지난 2월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희재'를 부르면서 자신이 태어나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예뻤던 이가 고 장진영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목소리로 알아챌 수 있는 이선균 출연
 
 송선미가 연기한 정란은 희재와 인하가 재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송선미가 연기한 정란은 희재와 인하가 재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시네마서비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국화꽃향기>는 악역이 없는 영화다. 인하를 짝사랑하면서 친구인 희재와 삼각관계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되던 정란(송선미 분)도 라이벌이 되긴커녕 희재가 사는 동네와 희재의 동선을 인하에게 알려주며 오작교 역할을 자처한다. 장진영과 송선미는 데뷔 초기 <순풍 산부인과>에 출연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장진영이 하차하고 송선미가 합류해 두 배우가 함께 나온 적은 없다).

<동이>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장희빈(이소연 분)의 오빠 장희재,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에서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차장검사 반준혁을 연기했던 배우 김윤석은 <국화꽃향기>에서 인하를 책 동아리로 끌고 오는 선배 성호 역을 맡았다. 성호는 희재와 인하가 떨어져 있는 사이 희재와 결혼을 하지만 희재의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며 희재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인하는 희재와 떨어져 있던 7년의 시간 동안 학교생활과 군 복무를 마치고 라디오 PD가 된다. 그리고 인하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의 DJ가 바로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정은아 아나운서였다. DJ 역으로 <국화꽃향기>에 특별 출연한 정은아 아나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빌어 인하와 희재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정은아 아나운서는 현재 라디오 DJ 활동 없이 2014년부터 채널A의 <나는 몸신이다>를 햇수로 9년째 진행하고 있다.

<국화꽃향기>에도 오늘날 스타가 된 배우가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바로 송선미의 동료 의사로 출연했던 이선균이었다. 이선균은 희재의 위암을 처음 발견한 의사로 등장해 정란에게 희재가 정말 출산을 강행할 생각이냐고 묻는다. 이선균은 영화 후반부 희재의 출산과 수술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수술복에 두건과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이선균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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