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이하 유세풍)은 최근 방영분에서 이 왕조의 역병관리 시스템을 다뤘다. 역병이 발생했다고 판단되자 지역 관아가 의원들과 함께 방역에 착수하는 한편, 환자를 외딴 데로 격리하는 장면들이 나왔다.
 
23일 방영된 제8회에서 주인공 유세풍(김민재 분)은 선배 의원인 계지한(김상경 분)과의 대화를 통해 질병의 실체가 일반적인 역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사초라는 독초 때문에 발생한 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역병 매뉴얼대로 환자들을 격리했는데도 병이 계속 퍼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이 드라마는 역병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역병관리 시스템을 보여줬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 일부를 보여주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유세풍>에 묘사된 장면들은 이전 사극들에서 묘사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극들이 조선시대 역병관리의 주요 부분들을 빠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역병 대책

크게 보면, 조선시대 역병 대책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병이 퍼지면 전염을 차단하고자 환자부터 격리했다. 이런 상황이 조선 후기 효종 임금 때인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조선에 체류한 헨드릭 하멜의 눈에도 목격됐다.
 
<하멜 표류기>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는 당장 읍이나 마을 밖 들판의 작은 초막으로 데려가 거기서 살게 한다"라며 "간호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환자에게 접근하지 않으며 말도 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그렇게 격리하고 치료한 뒤에 희생자가 발생하면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했다. 또 감염 지역에 대한 경제 구제 조치도 취해졌다. 동시에 유언비어 통제책도 집행됐다. 병원균 확산 못지 않게 유언비어 확산도 혼란을 가중시키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도 나왔다. 또 공직 기강 단속도 있었다. 행정 역량을 방역 활동에 집중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의료 인력은 지금도 부족하지만 옛날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조정은 대중의 자가 치료를 권장했다. 예방법이나 치료법을 홍보해 보건 지식을 전파했다.
 
그에 더해, 가용 가능한 의료 인력을 총동원했다. 바로 이 대목이 <유세풍>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극이 빠트리거나 다루지 않는 부분 중 하나다. 책으로 의술을 배운 의원이나 의생 같은 전문 인력이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비상시에 조정은 무녀들의 협력에 더욱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극의 등장인물들은 한밤중에 응급 상황이 생기면 의원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두드린다. 그런 상황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은 한밤중에 무녀한테 달려가는 장면이었다. 큰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는 의원이나 의생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이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동네 의사'는 주로 무녀들이었다.
 
무녀들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기 때문에, 무녀들은 평상시에 의료 지식 습득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이들이 반드시 굿을 통해 환자를 치료한 게 아님은 물론이다. 현존하는 민간요법의 상당부분은 그들의 임상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소에도 그랬기 때문에 역병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무당이나 무녀의 손길이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이들을 비상방역 시스템으로 끌어들였다.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무당·무녀의 손길
 
음력으로 세종 11년 4월 18일자(양력 1429년 5월 20일자) <세종실록>은 "각 고을, 각 리(里)의 민호(民戶, 주민)를 가까이 사는 무격(巫覡, 무당)에게 나누어 맡기고, 만약 열병을 앓는 호(戶)가 있으면 수령이 의생과 무격을 시켜 살피고 구호하게 하되"라고 말했다. 무속인들이 방역 현장에 투입되는 상황을 반영하는 실록 기록 중 하나다.
 
역병이 확산되면 공동체의 단결도 중요했다. 사회 전체의 협력 없이는 대응이 힘들었기 때문에, 국가는 민심이반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일이 생기면 임금의 반찬 숫자를 줄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상은 다 죽어가는데 임금 혼자 편히 산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협력을 그처럼 모색하면서도 왕조국가의 한계를 반영하는 모습도 동시에 보여줬다. 국민이 주인인 시대가 아니라 왕실이 주인인 시대였으므로 군주의 신병을 보호하는 데에 일차적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숙종 임금이 재위할 때인 1683년 11월이었다. 한양에 마마가 대유행했다. 쌀쌀해지는 계절에 천연두가 전염된 것이다.
 
조정은 임금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 주변에 금표를 쳤다. 대인 접촉에 의한 전파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조정은 한걸음 더 나아가 추가적인 보호 조치를 강구했다. 궁궐에서 일하는 병사들과 종9품 이하 관원들을 궁 밖이 아닌 도성 밖으로 내보낼 준비를 했다.
 
이때 숙종이 제동을 걸었다. 그는 군주를 보호 할 필요성보다 민심이반을 예방할 필요성을 더욱 중시했다. 스물두 살인 이 임금은 관원들을 지금 내보내면 동상에 걸리지 않겠느냐며 조정의 조치를 중지시켰다.
 
숙종 9년 10월 13일자(1683년 11월 30일자) <숙종실록>은 "임금이 '추운 때에 내보내면 동상에 걸릴 것이 염려스럽다'면서 허락하지 않고 단지 금표만 넓히라고 명령했다"라고 전한다. 숙종 자신을 보호하는 금표의 범위를 확대하는 선에서 그치게 했던 것이다.
 
그해 겨울 발생한 천연두는 스물두 살의 이 군주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숙종을 위해 금표를 넓혔지만 그도 결국 확진 판정을 받았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명성왕후)는 아들을 치료하다가 과로 때문에 그 자신도 병에 걸렸다. 숙종은 회복됐지만, 명성대비는 결국 쓰러졌다. 향년 41세였다. 한양에 역병이 퍼진 지 2개월 뒤의 일이었다.
 
조선을 이끈 유학자들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무속의 세계를 배척했다. 개인적으로 그에 의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배척했다. 그런 그들도 역병이 발생하면 무녀들을 비상 방역체계에 끌어들여 확산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 숙종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군주들은 민심이반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병원균들이 조정과 백성들을 갈라놓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보다 훨씬 절절한 마음으로 역병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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