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 감독으로 불리는 봉준호 감독에게도 단편영화들을 만들며 장편영화 연출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백색인> <지리멸렬> 같은 단편영화들로 호평을 받았던 '신인' 봉준호 감독은 2000년 상업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서울관객 5만이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기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 때문에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 공개될 때까지 한 동안 '거품'이라는 오해를 듣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를 공개했던 2000년 박찬욱 감독의 <3인조>와 곽경택 감독의 <닥터K> 등에서 연출부로 활동했던 류승완 감독은 단편 영화들을 묶은 옴니버스 독립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선보였다.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부산국제영화제 PSB영화상,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받았지만 2002년에 선보인 상업영화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가 서울관객 22만에 머물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처럼 뛰어난 역량을 가진 감독들도 신인시절에는 관객들과의 교감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난 2005년 중앙대 영화학과 졸업작품이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에 오르며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윤종빈 감독 역시 첫 상업영화에서는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다. 호스트바의 세계를 여과없이 보여줬던 하정우와 윤계상 주연의 <비스티 보이즈>였다.
 
 <비스티 보이즈>는 윤종빈 감독의 상업영화 중 유일하게 100만 관객을 넘지 못한 작품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윤종빈 감독의 상업영화 중 유일하게 100만 관객을 넘지 못한 작품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명실상부 성공한 가수 출신 연기자

2000년대 초·중반 가요를 조금이라도 듣고 살았던 대중이라면 그 시절 '국민그룹'으로 불리던 god를 모를 수가 없다. 2000년과 2001년 KBS <가요대상>과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했던 god 멤버들 중에는 메인보컬도 아니고 메인댄서도 아닌데 유난히 많은 팬을 몰고 다니던 인기 멤버가 있었다. 10대와 20대 초·중반의 젊은 대중들에게는 <범죄도시>의 장첸으로 더욱 익숙한 윤계상이 그 주인공이다.

1999년에 데뷔해 2003년까지 god의 멤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윤계상은 2004년 god를 탈퇴하고 배우로 전향했다. 윤계상은 연기 데뷔작이었던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부터 기대 이상의 연기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곧바로 군에 입대하면서 배우로서 상승세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당시 윤계상이 군입대 때문에 놓쳤던 배역 중에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친절한 금자씨>의 근식(김시후 분)도 있었다.

전역 후 드라마 <사랑에 미치다>와 영화 <6년째 연애중>에 출연한 윤계상은 2008년 차기작으로 윤종빈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비스티 보이즈>를 선택했다. 윤계상은 <비스티 보이즈>에서 에이스 호스트 승우 역을 맡아 한층 성숙해진 연기를 선보였지만 <비스티 보이즈>는 전국 72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비스티 보이즈>는 윤종빈 감독과 윤계상 모두에게 아쉬움으로 남은 작품이 됐다.

하지만 윤계상은 2011년 드라마 <최고의 사랑>과 시트콤 <하이킥:짧은 다리의 역습>에 출연하며 대중들과의 거리를 한껏 좁혔다. 윤계상은 2014년 <태양은 가득히>와 2015년 <라스트>, 2016년 <굿 와이프>를 통해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면서도 <소수의견> <극적인 하룻밤> <죽여주는 여자> 등 영화 활동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리고 2017년 윤계상은 드디어 배우로 변신한 지 14년 만에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윤계상은 영화 <범죄도시>에서 '빌런' 장첸으로 변신해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으며 68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018년에 개봉했던 <말모이> 역시 280만 관객을 모으며 '배우 윤계상'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비록 작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유체이탈자>는 81만 관객에 머물며 아쉬움을 남겼지만 윤계상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이제 윤계상은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가수 출신 연기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속고 속이는 호스트들의 거짓인생
 
 1978년생 동갑내기 배우 윤계상(왼쪽)과 하정우는 <비스티 보이즈>에서 호스트들의 삶을 잘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1978년생 동갑내기 배우 윤계상(왼쪽)과 하정우는 <비스티 보이즈>에서 호스트들의 삶을 잘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계에는 뛰어난 연출능력을 갖추고도 흥행작을 만들지 못해 고전하는 감독이 부지기수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12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와 2014년 <군도:민란의 시대>로 470만,2018년 <공작>으로 490만 관객을 동원한 윤종빈 감독은 연출능력과 흥행감각을 겸비한 흔치 않은 감독이다. 그런 윤종빈 감독이 유일하게 전국 1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했던 상업영화가 바로 <비스티 보이즈>였다.

<비스티 보이즈>는 전직 호스트 출신의 소설가 소재원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돈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호스트들의 거짓된 삶을 가감 없이 묘사했다. 특히 여성들에게 술을 따르며 번 돈을 명품구입이나 도박으로 무의미하게 써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실된 삶을 위해 또 다른 여성에게 사기(영화 속에선 '공사'로 표현된다)를 치는 호스트의 뻔뻔한 모습은 상당히 위선적이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지원(윤진서 분)에게 점점 집착하는 승우를 연기한 윤계상도 호연을 펼쳤지만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살린 배우는 역시 재현 역을 맡았던 하정우였다. 연쇄살인마를 연기했던 <추격자>가 개봉한지 두 달 후에 공개된 <비스티 보이즈>에서 하정우는 <추격자>의 지영민과는 또 다른 유형의 악역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자신이 공 들여 '공사' 치던 미선(윤아정 분)을 찾아가 구타하는 장면은 상당히 보기 불편하다.

<비스티 보이즈>에서는 영화 초반부 호스트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스포츠 도박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어떤 호스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볼튼 원더러스의 경기에서 맨유에 150만원을 배팅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재현은 마치 자신이 축구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지옥의 볼튼원정'을 운운하며 맨유에게 배팅한 동생을 탓한다. 하지만 실제로 맨유의 연고지 트래포드와 볼튼의 연고지 호리치는 같은 맨체스터주에 위치해 있다.

<비스티 보이즈>는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했고 영화 잡지 <씨네21>에서 실시한 8명의 기자 및 평론가 평점에서도 5.88점을 받는 등 평단에서도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윤종빈 감독의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랬던 것처럼 <비스티 보이즈> 역시 세월이 흐른 후 3,40대 남성 관객들을 중심으로 '저평가된 수작'으로 재조명됐고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인터넷을 통해 돌아다니기도 했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괴력의 히어로'는 없다
 
 마동석(왼쪽)은 <비스티 보이즈>에서 인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악랄한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마동석(왼쪽)은 <비스티 보이즈>에서 인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악랄한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좀비영화 <부산행>으로 세계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마동석은 작년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에서 길가메시를 연기하며 '괴력의 히어로'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다. 한국관객들은 2017년과 올해 무려 1900만 관객을 열광시킨 <범죄도시> 시리즈의 마석도 형사로 마동석을 기억한다. 하지만 <부산행>이나 <이터널스>,<범죄도시>를 통해 얻은 마동석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다면 <비스티 보이즈>는 보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마동석은 <비스티 보이즈>에서 동갑친구 재현에게 돈을 빌려준 악랄한 사채업자 창우 역을 맡았다. 그것도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반전 캐릭터가 아닌 돈을 갚지 않는 재현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한 구타도 서슴지 않는 잔인한 성격을 가진 사채업자다. 드라마 <히트>에서 처음 만난 마동석과 하정우는 <비스티 보이즈>부터 <범죄와의 전쟁>, <군도>,<신과 함께-인과 연>,<백두산>까지 5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드라마 <학교2>와 <하얀 거탑>,영화 <동감> 등을 통해 얼굴을 알린 김민주는 <비스티 보이즈>에서 재현과 동거하는 한별을 연기했다. 한별은 재현이 호스트로 돈 때문에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빚을 내면서까지 힘들게 돈을 구해 재현을 도왔다. 하지만 재현은 그 돈으로 일본에서 새 출발하기 위한 비행기 티켓과 명품 구두를 구입했다(게다가 제 버릇 남 못 준 재현은 일본에서도 호스트바에서 일한다).

사실 <비스티 보이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캐릭터들이 기구한 인생을 살지만 윤아정이 연기했던 미선만큼 불쌍한 캐릭터도 없었다. 영화 초반부터 재현에게 속아 물주 노릇을 자처했던 미선은 뒤늦게 재현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재현은 오히려 미선을 찾아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구타한다. <비스티 보이즈>가 영화 데뷔작이었던 윤아정은 드라마 <노란 복수초>와 <백년의 유산>에서 악역 연기를 잘 소화하며 주목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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