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KBO리그 신인 드래프트에는 국가대표 출신 우완 이대은과 충암고 시절부터 '천재 유격수'로 불리던 이학주(롯데 자이언츠), 미국과 일본을 거치며 투타를 겸했던 하재훈(SSG랜더스) 등 해외파들이 대거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2019시즌 리그에서 신인왕 자격을 얻지 못했다. KBO리그에서는 해외 프로리그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신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북미를 벗어난 해외리그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 선수라 하더라도 메이저리그 출전 경력이 없으면 누구나 동등하게 빅리그 입성 첫 해 '루키' 자격을 얻는다. 이 때문에 일본의 노모 히데오와 이치로 스즈키는 각각 만 26세와 만 27세 시즌에 메이저리그 신인왕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노모나 이치로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빅리그에 데뷔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선수가 2013년 만 37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임창용이다. KBO리그에서 13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5년 동안 활약했던 임창용은 만37세 시즌에 시카고 컵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했다. 그리고 2013년의 임창용보다는 두 살 어렸지만 지난 1999년 메이저리그에는 만 35세의 화학교사 출신 신인 투수가 빅리그 마운드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 선수의 영화 같은 실화는 2002년 <루키>로 영화화됐다.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인 <루키>는 대부분의 흥행수익을 북미에서 거둬 들였다.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인 <루키>는 대부분의 흥행수익을 북미에서 거둬 들였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화려하진 않지만 우직하게 활동하는 배우

할리우드에는 톰 크루즈처럼 젊은 시절부터 환갑이 될 때까지 슈퍼스타로 군림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갑자기 나타났다 번쩍 하고 빛나다가 아무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는 배우들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수십 년간 할리우드라는 정글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엄청난 메가 히트작에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지난 2005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한 배우 데니스 퀘이드처럼 말이다.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퀘이드는 1975년부터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퀘이드는 짙은 인상을 가진 미남 배우였지만 이미 할리우드에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 같은 배우들이 있었고 퀘이드는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출세작'을 만나지 못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영화팬들에게 퀘이드는 1991년 결혼한 맥 라이언의 남편으로 더 유명했다(2001년 이혼).

1999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 풋볼팀의 노장 쿼터백을 연기했던 퀘이드는 2002년엔 야구영화 <루키>에서 실존인물 짐 모리스로 변신했다. 퀘이드의 열연이 돋보인 <루키>는 2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8000만 달러의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다만 <루키>는 흥행수익의 93.7%에 해당하는 7560만 달러가 북미에서 나왔을 정도로 해외흥행에서는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

<루키>를 통해 인지도가 상승한 퀘이드는 2004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영화 <투모로우>에서 지구의 이상변화를 예측하는 잭 홀 박사를 연기했다. 2004년에만 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활동을 이어가던 퀘이드는 2008년 <밴티지 포인트>에서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는 토마스 반즈 역을 맡아 1억 5200만 달러의 흥행을 견인했다. 2009년에는 이병헌이 출연한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호크장군을 연기했다.

멜로와 액션, 드라마 등 여러 장르를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입체적인 얼굴을 가진 배우 퀘이드는 주연만 고집하지 않고 2012년 <당신에게도 사랑이 찾아올까요?>, 2015년 <트루스> 등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스포츠 영화에 유독 잘 어울리는 퀘이드는 2021년 종합격투기 프로모터를 연기한 격투영화 <본 어 챔피언>과 미식축구영화 <아메리칸 언더독>에 출연하며 스포츠 영화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만 35세 루키의 실적보다 '도전'에 주목한 영화
 
 1999년 빅리그에 데뷔한 짐 모리스는 현실에서는 2년 동안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1999년 빅리그에 데뷔한 짐 모리스는 현실에서는 2년 동안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영화 <루키>는 지난 1999년 만 35세의 나이로 템파베이 데블레이스(현 템파베이 레이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지미 모리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실제 모리스는 빅리그에서 활약한 2년 동안 통산 21경기에 등판해 승리는커녕 세이브나 홀드도 하나 챙기지 못하고 4.80의 평균자책점을 남긴 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물론 영화에 나온 것처럼 빅리그 데뷔전에서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 것은 '팩트'다).

하지만 <루키>는 모리스의 초라했던 빅리그 커리어를 미화하는 영화가 아니라 모리스의 '도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모리스(데니스 퀘이드 분)는 마이너리그 시절 팔꿈치 부상으로 만 25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생활을 접고 고등학교에서 화학과 체육을 가르치며 야구코치를 겸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구속이 몰라보게 빨라졌음을 인지했고 테스트를 받은 끝에 신생팀 템파베이에 입단했다.

<루키>는 2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답게(?) 많은 제작비가 필요한 메이저리그 경기 장면은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많은 물량 투입 없이도 얼마든지 멋진 장면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모리스가 과속 단속기를 통해 자신의 구속을 체크하는 장면이다. 특히 76마일(시속 122km)이 찍힌 구속에 실망한 모리스가 힘 없이 스피드건 앞을 지나간 후 숫자가 96마일(시속 154km)로 바뀌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모리스는 선수로서는 끝내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지 못했지만 사실 코치로는 상당히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모리스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강속구를 던지는 코치에게 메이저리그 테스트를 받게 하기 위해 지역대회 우승을 공언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켜냈다. 영화 속에서는 모리스의 강속구 배팅볼로 연습하는 장면 정도만 나왔지만 실제로 코치의 효과적인 지도가 없다면 전년도 1승 팀이 다음 해 17승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루키>가 장편 데뷔작이었던 존 리 행콕 감독은 2004년 <킹 아더>의 각본작업에 참여한 후 같은 해 데니스 퀘이드를 다시 한 번 캐스팅 해 전쟁 드라마 <알라모>를 연출했다. 2009년 산드라 블록 주연의 <블라인드 사이드>로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올린 행콕 감독은 2013년 톰 행크스 주연의 <세이빙 MR.뱅크스>, 2016년 <파운더>, 작년 덴젤 워싱턴과 자레드 레토 주연의 <더 리틀 띵스>를 연출했다.

남편과 아들을 조용히 응원한 가족들
 
 지미는 조용히 아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직관한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한다.

지미는 조용히 아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직관한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한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는 쪽과 이를 말리는 쪽의 부부싸움이 자주 벌어진다. <루키>에서도 더 좋은 조건으로의 이직을 포기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지미와 가족들을 위해 이직을 하라는 아내 로리(레이첼 그리피스 분)가 의견충돌을 일으킨다. 사실 '2배의 연봉'을 운운하며 남편에게 이직을 강요(?)하는 것만 보면 로리는 남편의 꿈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세속적인 아내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리가 지미의 도전을 반대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로리는 젊은 시절부터 지미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좌절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고 다시는 남편이 부상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일이 없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아빠를 우상으로 여기며 성장하는 아들 헌터(앵거스 T. 존스 분)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 로리는 이내 지미의 메이저리그 도전을 응원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지미는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사 때문에 야구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세상에 야구보다 중요한 일은 훨씬 많다며 아들의 지나친 야구사랑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미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남몰래 직관했고 뒤늦게 자신을 발견한 지미에게 "이건 아무 아버지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잖니"라는 말로 아들의 메이저리그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루키 존 리 행콕 감독 데니스 퀘이드 레이첼 그리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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