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삼남매는 매일이 전쟁이다. 가상의 '당미' 집은 경기도 남부이고 직장들은 서울 강남이다. 출퇴근 자체가 전투다. 출근길 택시도, 자차 출근도 엄두조차 못낸다. 기나긴 출퇴근길이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삶의 만족감을 저하시키며, 갈수록 체력도 방전된다.

다만, 아직 미혼인 이들에겐 육아의 무게가 없다. 퇴근길 술 한 잔도, 친구와의 수다도 자유롭다. 이 삼남매가 서울로 이사가기 전까지, 서울이란 '계란 노른자'가 아닌 '계란 흰자'와 같은 경기도민으로서의 삶과 주거 및 출퇴근 조건은 삼남매의 삶의 태도에 무한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 파리 근교에 사는 쥘리(로르 칼라미)가 있다. 그의 하루하루도 투쟁 그 자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출퇴근 길은 멀기만 하다. 자차 출근은 그만둔 지 오래다. 이혼한 싱글맘이라 육아도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설상가상 프랑스 전역을 강타한 교통 파업이 쥘리의 투쟁을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간다.

지난 18일 개봉,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 에리크 그라벨 감독의 <풀타임>은 이 쥘리의 9일간을 마치 공포영화처럼 다룬다.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단하고 확고하다. 예술영화의 집요함이 돋보이면서도 젠체하지 않는다.

형식과 전개, 주제 면 모두에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사이 강조와 절제가 명확하고 선명하다.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여우주연상의 명성이 아깝지 않다. 로튼 토마토 지수는 100%를 유지 중이다. 한국의 '쥘리'들도 마음 절절히 공감할 프랑스 노동자이자 싱글맘 쥘리의 9일간 이어진 투쟁의 실상은 이랬다.

탁월한 형식, 집요한 연출력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 슈아픽처스

 
잠든 쥘리를 카메라가 훑듯이 오래 비춘다. 다른 삶의 조건은 비키라는 듯이. 쥘리가 온전히 숙면을 취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시계 알람이 울리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어린 아이 둘을 먹이고 등교 준비를 시키는 시간은 꼭두새벽이다. 아이들을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파리 중심부로 정시 출근을 하려면 도리가 없다.

대중교통 말고는 방법이 없는 이 장거리 출근길에 끝날 것 같지 않은 교통 파업이 끼어들었다. 발만 동동 굴러봤자 대안이 없다. 평소 이용했던 기차가 연착되면 에누리없이 지각이다. 달려야 한다.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 경제학 박사란 고학력 간판 따윈 하등 쓸모없다. 5성급 호텔의 팀장급 룸메이드란 직업을 잃으면 아이들과의 삶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강렬한 전자음악과 집요하게 쥘리의 동선을 따라잡는 카메라, 낭비 없는 컷과 컷의 리듬이 쥘리가 처한 일상의 공포를 말그대로 생생히 전이시킨다. 쥘리가 지각을 면할 수 있을까, 무사히 귀가할 수 있을까, 어떤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는 않을까, 관객들도 시종일관 쥘리의 심정으로 스크린과 일체될 수밖에 없다. 첫 시퀀스가 온통 그렇다. 집중력을 한껏 요하는 무서운 연출력이다.

출근길만 고통이 아니다. 이웃집 할머니에게서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정시간에 도착해야 한다. 교통 파업은 번번이 그 퇴근길을 지옥으로 만든다. 내가 탈 수단이 없다면 남도 그런 법이다. 대중교통에 사람이 몰리면 탑승 여부를 떠나 파리 도로도 지옥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카풀'이 없었다면 그 지옥 같은 퇴근길마저 포기해야 했을지 모른다. 심지어 제일 싼 '렌트 트럭'도 빌려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값싼 호텔 방 신세도 진다.

쥘리가 게으른 게 아니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 도움이란 도움도 전부 청한다. 나쁜 엄마는 더더욱 아니다. 도리어 없는 살림과 짜투리 시간을 투자해 어린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트램펄린을 직접 구매하고 설치까지 할 정도다. 반면 이혼한 전남편은 양육비도 주지 않고 연락두절된 상태다. 유일한 동네 친구의 파티에서 와인 한 잔을 기울일 여력도 쥘리에겐 허락될 수 없다.

더 나은 직업을 구해야 한다. 원래 일했던 분야에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호텔 매니저의 눈을 속여 무단 이탈을 해야 한다. 한 번은 적당한 핑계로 속이고 정당하게 자리를 비웠지만 두 번은 절대불가다. 더군다나 파업으로 인한 지각으로 인해 매니저의 눈밖에 난 상태다.

일상이 투쟁이던 쥘리가 해고의 위험에 처했을 때마저 <풀타임>은 냉정을 잃지 않는다. 역시나 놀라운 집요함이다. 그리고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쥘리가 과연 파리의 새직장을 얻더라도 그 공포스런 일상이 변화할 것 같으냐고. 쥘리가 해변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반복되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그럴 때 노동의 조건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질문들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 슈아픽처스

 
파업이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요 노동자들이 그 권리를 쟁취할 최후의 수단이다. '파업의 나라'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쥘리가 처한 상황은 이중의 역설을 담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파업의 과정이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억압할 때 그 파업의 조건들은 재고돼야 하는가. 그 파업의 조건들이 노동자의, '싱글맘'과 여성의 일상에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노동자 조직과 더 큰 정부 조직은 어떤 재설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풀타임>은 물론 거시적인 질문으로까지 직접 나아가진 않는다. 쥘리가 내몰린 처참한 현실을 철저히 쥘리의 시선만으로 따라잡는다. 그 쥘리가 간신히 얻어 탄 승용차 안에서 바라본 파리의 하늘은 이곳저곳 잿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가히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의 재난 상황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풀타임>은 그 부던히도 열심히 사는 쥘리의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염시킨다.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일관적인 형식과 예상 가능한 사건과 예상 밖 사건들을 부던히 교차시키는 영민한 전개를 통해서.

무엇보다 쥘리가 지각을 면하기 위해 파리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은 탁월한 형식이라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억척스런 질주를 카메라가 길고 집요하게, 너무나 생생히 잡아내는 것이다. 마치 그 고통을 쿵쿵 거리는 전자음악 박동과 함께 당신들도 가감없이 느껴보라는 듯이.  

가차없던 전반부에 이어 후반부도 다를 바 없다. 이웃집 할머니가 사회복지사를 운운할 때 고개를 쳐드는 절망감을, '카풀'한 동료 학부모의 남자조차 쥘리의 키스를 거부했을 때 닥쳐오는 당혹감과 비참함을, 면접과 실직에의 갈등을 반복할 때 드는 긴장과 고통을 관객에게 온전히 전이시키는 식이다.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 쥘리가 겪는 그 고통와 공포에 직접적으로 감정을 이입할 한국의, 서울의 쥘리들이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야 하는 여성들과 부모들이, 오늘도, 내일도 출퇴근이란 전쟁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직장인들이, 파업에서조차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층위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다.

<풀타임>은 베니스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관객들과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이끌어내는 중이다. 전 세계의 쥘리들이 공감을 보낸다는 방증일 터다. 그럼에도 감독은 끝끝내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영화 <풀타임> 관련 이미지. ⓒ 슈아픽처스

 
자체 휴가를 선포하고 아이들과 놀이공원을 찾는 마지막 장면. 쥘리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린다. 카메라가 꽤 긴 시간 잡아내자 쥘리가 뛰어들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도 잠시, 놀이공원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쥘리가 뛸뜻이 기뻐하며 눈물을 떨군다. 관객들은 극장문을 나설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의 쥘리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계속된다.

과연 안정과는 좀처럼 가까워 질 수 없을 것 같은, 잠들어도 잠든 것 같지 않고 깨어나도 지긋지긋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치일 수밖에 없는, 언제 포기해버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쥘리의 조건은 개선될 수 있을까. 

삶은, 일상은 계속돼야 하지만 하나만 삐끗해도 역습을 가해온다. 그 삶의 역설을 쥘리가 극복해낼 수 있을까. 쥘리의 조건들이, <풀타임>이 묻고 있다. 일상이 무너져내릴 것 같은 삶의 조건들을 마주한 적이 있느냐고. 당신은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

어쩔 도리 없이, 그 공통된 체험은 더 큰 공감으로 귀결된다. 그 체험에 이은 공감이 또 다른 선택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프랑스 파리도, 대한민국 서울도 그리 다를 것 없다. 전쟁 같은 지하철 출근길, 전장연 시위를 마주한 당신은, 우리는 어느 편에 감정을 이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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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및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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