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포스터

▲ 트로이 포스터 ⓒ 판씨네마(주)

 
<그리스 로마 신화>는 지루해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재미없게 읽을 수는 없다. 서방의 구구절절한 신화를 풀떼기라 한다면 <일리아스>는 가장 화려한 꽃에 비유해도 좋을 정도다.

당대 최고의 미녀 헬레나와 도주한 파리스의 이야기는 한 눈으로 보면 불륜이고 다른 눈으로 보면 더없는 로맨스다. 출진을 위해 제 딸을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의 비정함 가운데선 권력자의 욕망과 인간의 성급함이 함께 읽힌다.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대결에선 진지하다 못해 숭고하게까지 느껴지는 비장미가 넘쳐흐른다.

영화기술이 절정에 오른 2000년대 초반 들어 서구 문명의 원류 격인 신화, 그중에서도 트로이 전쟁이 영화화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대 최고 배우인 브래드 피트가 일찌감치 출연을 확정지었고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 올랜도 블룸도 합류했다. 여기에 에릭 바나, 피터 오툴, 숀 빈 같은 명배우도 속속 합류했다.

감독은 이달 세상을 떠난 독일 출신의 볼프강 페터젠이 맡았다. <에어포스 원>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성공적으로 연출한 만큼 흥행은 예고된 수순이란 분위기였다.
 
트로이 스틸컷

▲ 트로이 스틸컷 ⓒ 판씨네마(주)

 
영화산업 전성시대, <트로이>의 탄생

한 해 앞서 TV영화 <헬렌 오브 트로이>가 제작돼 호평을 받은 상황에서 보다 규모 있고 극적인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리란 기대가 적지 않았다. 바야흐로 역대급 트로이 전투가 스크린 위에 펼쳐질 참이었다.

막상 개봉한 영화는 기대와 달랐다. 영화는 규모로 밀어붙이는 블록버스터가 되지 않았다. 아킬레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출전을 거부했고 헥토르(에릭 바나 분)는 세상 모든 짐을 진 채로 결투장에 나섰다. 영화는 <일리아스>에서 거듭됐던 대규모 전투보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대결이며 회담에 집중했다.

페터젠의 관심은 철저히 아킬레스와 헥토르에게 있었던 듯 싶다. 대하드라마를 두 시간 남짓의 영화로 제작할 땐 선택과 집중이 필수적인데, 페터젠에겐 두 인물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를 끈 대목이었던 모양이다. 오우삼이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에 집중했고, 김한민 감독이 임진왜란에서 명량과 한산대첩에 초점을 맞췄듯이 말이다.

결국 에릭 바나가 연기한 헥토르의 캐릭터는 <일리아스>를 영상화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전장에 나가는 왕자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어 감동을 일으킬 만한 소재인 게 분명하기도 했다.
 
트로이 볼프강 페터젠 감독(오른쪽)과 주연배우 브래드 피드.

▲ 트로이 볼프강 페터젠 감독(오른쪽)과 주연배우 브래드 피드. ⓒ 판씨네마(주)

 
한 번쯤 돌아볼 이름, 볼프강 페터젠

다만 주요한 주변인물이 될 수 있던 파리스와 헬렌, 아가멤논, 이아손, 오디세우스 등의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축소됐다. 때문에 규모 있는 블록버스터로 그들 하나하나를 죄다 살려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오고는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트로이>는 기억될 만한 작품이 됐다. 신화 속에 인간의 이야기가 들었고 그 이야기가 너무나 웅장하여 다시 신화에 가 닿았다. 아킬레스가 격렬해질수록 헥토르는 위대해보였다. 신과 인간이 마주한 결투신은 말 그대로 영화사에 아로새겨졌다.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이들에게 심심한 연출이 간혹 비판을 받긴 했으나 같은 이유로 더 오래도록 기억됐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요컨대 <트로이>는 감독 페터젠의 색깔이 제대로 묻어난 독특한 영화로 남았다.

볼프강 페터젠은 할리우드에서 제법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 이후로도 <퍼펙트 스톰>과 <포세이돈> 같은 대작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의 미국 대표작을 이야기할 땐 늘 두 작품이 언급된다. 하나가 <에어포스 원>이고 다른 하나가 <트로이>다. <에어포스 원> 이후 그를 넘는 비행기 납치 영화가 없었고, <트로이> 이후 그를 넘는 트로이 전쟁 영화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볼프강 페터젠은 기억돼 마땅한 감독이었다.

지난 16일 세상을 떠난 볼프강 페터젠을 기억하며.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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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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