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다이하드>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스피드>, 고 숀 코네리,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더 록>의 공통점은 바로 '인질극'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들에는 각각 앨런 릭먼과 고 데니스 호퍼, 에드 해리스라는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이 등장해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국가기관에 자신의 요구사항(주로 돈)을 이야기한다.

할리우드만큼 일반적이진 않지만 한국영화에서도 인질극을 다룬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난 2018년에 개봉했던 영화 <협상>에서는 지금은 부부가 된 손예진과 현빈이 최고의 협상가와 범죄조직의 무기밀매업자로 변신해 인질극을 벌였다. 작년 여름에는 배우 황정민이 괴한들에 의해 납치됐다는 설정의 영화 <인질>이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개봉해 16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처럼 인질극은 영화의 소재로 삼기 좋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지난 1988년 대한민국에서도 일명 '지강헌 사건'으로 불리는 아주 유명한 인질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후 각종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재구성된 '지강헌 사건'은 지난 2006년 영화로 제작돼 개봉했다. 배우 이성재가 엄청난 열연을 펼쳤던 양윤호 감독의 <홀리데이>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홀리데이>는 전국 140만 관객으로 기대만큼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홀리데이>는 전국 140만 관객으로 기대만큼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희대의 악역 연기 후 찾아온 극심한 슬럼프

1997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MBC 24기 공채탤런트로 입사하면서 연기를 시작한 이성재는 1998년 노희경 작가의 <거짓말>에서 배종옥과 애틋한 멜로 연기를 선보이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성재는 같은 해 연말 곧바로 영화로 진출했는데 이성재의 영화 데뷔작은 바로 심은하와 뛰어난 연기호흡을 선보이며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의 신인상을 휩쓸었던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에 전념한 이성재는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과 2000년 <플란다스의 개> <하루>, 2001년 신라의 달밤>에 출연하며 '떠오르는 흥행배우'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성재는 2002년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에서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영화 역사상 최악의 '폐륜아' 조규환을 연기하면서 서울에서만 11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공공의 적>의 열연 이후 젠틀한 이미지에 금이 간 이성재는 <빙우>와 <바람의 전설> <신석기 블루스>가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흥행배우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성재는 2006년 <홀리데이>를 통해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인질극을 벌였던 탈옥수 지강헌(영화에선 '지강혁'으로 각색)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홀리데이> 역시 전국 140만 관객에 그치면서 이성재를 다시 흥행배우로 부활시키진 못했다.

이성재는 <홀리데이> 이후 <데이지>와 <상사부일체> <꿈은 이루어진다> <나탈리> 등에 출연했지만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며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2000년대까지 영화활동에 주력하던 이성재는 2010년대 주 활동 무대를 드라마 쪽으로 돌렸다. 이성재는 <포세이돈>과 <아들 녀석들> <구가의 서> <마녀보감> <질투의 화신> <어비스> <검사내전> 등 여러 드라마에서 빌런 또는 서브 주인공을 연기하며 연기 폭을 넓혀 나갔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홍보를 위한 단발성 출연 외에는 예능출연을 거의 하지 않았던 이성재는 2013년 <나 혼자 산다>와 2016년 <꽃놀이패>, 2018년 <탐나는 크루즈> 등에 출연하며 예능활동도 활발히 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CBS 라디오에서 <이성재의 CCM캠프>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성재는 지난 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카터>에서 악역인 김종혁 중장을 연기하며 변함 없는 카리스마를 뽐냈다.

1988년 '지강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이성재(왼쪽)와 최민수는 <홀리데이>에서 탈옷수와 교도소의 부소장으로 치열한 연기대결을 선보였다.

이성재(왼쪽)와 최민수는 <홀리데이>에서 탈옷수와 교도소의 부소장으로 치열한 연기대결을 선보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홀리데이>는 1988년에 있었던 지강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홀리데이> 역시 영화적 재미와 원활한 이야기 진행을 위해 많은 부분이 각색됐다. 이 때문에 실제사건과 달라진 부분들이 생기며 많은 관객들이 의문을 가졌다. 특히 당시 분위기를 기억하는 일부 중·장년층 관객들은 <홀리데이>의 이성재와 1989년 <수사반장>에서 지강헌 역을 맡았던 이계인의 연기를 비교하기도 했다.

실제로 <홀리데이>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범죄자였던 지강혁(이성재 분) 일당들을 지나치게 미화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일 당시에도 인질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인간적으로 대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탈옥수가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겨누며 공권력과 대치하는 것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강혁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엄청난 감량과 함께 열연을 펼친 이성재의 노력이 빛을 잃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은 이유다.

개봉 당시엔 이성재의 연기변신이 많은 화제가 됐지만 정작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많이 오르내리는 캐릭터는 바로 최민수가 연기했던 교도소 부소장 김안석이다. 2000년 양윤호 감독의 <리베라 메>에 출연했던 최민수는 6년 만에 양윤호 감독과 재회해 개성있는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폭우 속에서 비닐우산을 들고 금니를 드러내며 웃는 장면은 훗날 컵라면 CF에서 '셀프 패러디'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홀리데이>는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지스가 1967년에 발매했던 대표적인 히트곡 제목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1999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BGM으로 쓰이면서 재조명된 노래인데 실제 지강헌이 인질극 도중 경찰들에게 틀어줄 것을 요구했던 곡이다. 영화 속에서 LP를 통해 'Holiday'를 들은 지강혁은 그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리데이>를 연출한 양윤호 감독은 불교영화(<유리>), 학원물(<짱>), 로맨틱코미디(<미스터 콘돔>), 정통멜로(<화이트 발렌타인>), 재난스릴러(<리베라 메>), 액션(<바람의 파이터>) 등 매우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감독이다. <홀리데이> 이후엔 2007년 범죄스릴러 <가면>이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듯했지만 2009년 드라마 <아이리스>를 연출하며 극적으로 부활했다. 양윤호 감독은 현재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 연기 잘 소화한 조안
 
 신예배우 조안(오른쪽)은 지강혁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인질 효주 역을 잘 소화했다.

신예배우 조안(오른쪽)은 지강혁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인질 효주 역을 잘 소화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연희동에 거주하는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항의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지강혁 일행은 총상을 입은 권상호(문영동 분) 때문에 가정집으로 들어가 효주를 비롯한 4명의 일가족을 인질로 잡는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고 있는 큰 딸 효주는 납치범에게 동조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점점 지강혁의 행동에 동화된다. 급기야 지강혁이 유리조각으로 목을 그었을 때는 마치 가족이 다친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오열한다.

2003년 <여고괴담3 - 여우계단>에서 혜주 역을 맡아 범상치 않은 연기력을 뽐낸 조안은 <홀리데이>에서도 효주를 연기하며 상당한 열연을 선보였다. 2006년 <언니가 간다>, 2007년 <므이>에 출연한 조안은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에서 '역도신동' 박영자를 연기하면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결혼한 조안은 2019년 MBC 일일드라마 <용왕님 보우하사> 이후 활동이 뜸해졌다.

<야인시대>의 문영철 역으로 유명한 장세진은 <홀리데이>에서 지강혁과 함께 탈옥을 감행하는 김장경을 연기했다. 탈옥에 성공한 김장경은 곧바로 사랑하는 애인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다. 키가 작고 식탐이 많은 권상호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언제나 콤비처럼 붙어 다니는 김장경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권상호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강혁이 있던 교도소의 방장 황대철은 특사로 나가기 위해 김안석 부소장에게 아부를 떨지만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고문뿐이었다. 결국 황대철은 지강혁을 비롯한 교도소 동료들과 함께 탈주에 성공하지만 홍콩밀항에 실패한 후 김안석이 이끄는 경찰 부대들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한다. 황대철을 연기했던 고 이얼은 <라이브> <스토브리그> 등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이다가 작년 <보이스4>를 끝으로 식도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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