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에는 두 부류의 의학 전문가가 등장한다. 유세풍(김민재 분)과 계지한(김상경 분)처럼 환자의 몸를 치료하는 의원과 더불어, 서은우(김향기 분)처럼 망자의 몸을 검시하는 법의학자가 등장해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서은우는 지방 현령의 딸이다. 아버지가 사또인 덕분에, 관아에 보관된 시신이나 변사체를 몰래 들여다보며 사건도 해결하고 법의학 지식도 쌓을 수 있었다. 반듯이 누워 있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사건 당시를 추리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시대 경찰 수사관이나 법의학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왕조시대 군주들은 살인사건에 특히 민감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사형을 선고할 만한 살인사건인 경우에는 군주가 재판에 직접 관여했다. 일부 사극에서는 지방 사또가 중앙에 보고도 하지 않고 임의로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속의 이야기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군주들은 오로지 자신만이 인간의 생명을 거둘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군주들이 볼 때 살인자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자였다. 그래서 군주들은 살인자를 찾아내는 일에 열의를 보였고, 이는 살인사건 법의학이 발달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됐다.

살인사건 법의학 발달배경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인 전국시대(BC 8~3세기)에도 살인사건에 대한 법의학 지식이 축적되고 있었다. 쓰촨성(사천성) 북부의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 문서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대나무 조각에 쓰여진 이 문서는 "우리 서(署)의 관할 지역에서 피살체 1구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라며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객지 사람이 피살체로 발견됐던 것이다.
 
관노비를 데리고 현장을 검시한 관청 서기는 "남자 시신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목 왼쪽에는 칼날에 의한 상처가 있었다", "저고리 속에도 칼자국 두 군데가 있었다", "머리와 등과 땅바닥에 피가 흥건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 뒤 "시신이 있는 장소에서 관아까지의 거리는 100보다. 아무개의 농가까지는 200보다"라는 점도 기록했다.
 
서기는 피살자의 지위나 경제력을 가늠할 만한 요인에도 주목했다. "시체 서쪽에 비단 신발 1켤레가 있었다"고 한 뒤 "시신의 발에 신발을 신겨보니 신발이 맞았다"고 적었다. 비단 신발을 구매할 만한 경제력의 소유자가 객지에서 변을 당했던 것이다.
 
관청은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판단하지 않고 강도살인으로 추측했던 듯하다. 죽간에 따르면, 관헌이 인근을 돌아다니며 "도둑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탐문 수사하는 상황이 그 뒤를 이었다.
 
강도살인으로 판단한 구체적 근거는 죽간에 기록돼 있지 않았지만, 관청 서기는 후세 사람들이 그런 판단의 근거를 찾아내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죽간 문서에 비교적 충실히 남겨놓았다.
 
객지인이 현지를 방문했다면, 여행에 필요한 재물을 휴대하고 있었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단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재물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관청 서기는 현장에서 그런 재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죽간에 기록하지 않았으리라고 볼 수 있다. 재물이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점을 근거로 강도살인사건이라는 결론이 내려진 듯하다.
 
군주들이 살인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런 사건에 관한 지식이 차곡차곡 축적되는 것은 당연했다. 과거의 사례를 전승하면서 사건 해결 기법을 익혀가는 모습은 원나라 사람 왕여(王與)의 <무원록>을 토대로 한 조선 정조 때의 <증수무원록언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글 해설이 딸린 <증수무원록언해>에는 이웃 관계인 두 사람이 밭일을 하러 산속에 함께 들어갔다가 같은 장소에서 둘 다 피살체로 발견된 사건을 소개한다. 한 사람(A)의 시신은 산속의 작은 집 바깥에 있었고 다른 사람(B)의 시신은 집 내부에 있었다. A는 뒷목뼈가 끊어지고 머리와 얼굴에 자상 흔적이 있었다. B는 왼쪽 목의 아래 부분과 우뇌 뒷부분이 칼에 찔려 있었다.
 
이를 보고 'B가 A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 다 서로 죽였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관원 하나가 A의 타살 가능성을 거론했다. 어떻게 자기 우뇌의 뒷부분을 스스로 찌르겠느냐며 A가 B를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을 배척했다.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사건은 며칠 뒤 해결됐다. 두 사람 모두에게 원한을 가진 제3자가 체포됐다. 원한에 의한 살인이었기에, 가진 게 별로 없는 두 사람이 잔혹하게 살해됐던 것이다. 문맥을 볼 때 <증수무원록언해>가 이 사례를 소개한 것은 상처 위치를 근거로 범행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증수무원록언해>는 위 사례 앞부분에서 상처 모양을 보고 흉기를 판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도끼에 의한 경우, 창에 의한 경우, 칼에 의한 경우 등을 각각 설명한다.

변사 사건 밝혀낸 세조시대 승정원 승지 이휘 
 
이 부분에 나오는 법의학 지식을 근거로 살인 사건을 해결한 관원이 조선 세조시대의 승정원(대통령실) 승지인 이휘다. 그가 음력으로 세조 1년 12월 16일(양력 1456년 1월 23일) 한양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에서 발견된 변사체의 살인자를 찾아낸 것도 그런 지식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 사신 숙소 근처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여기저기가 깊이 찔려 있었고 남성의 주요 부위도 훼손돼 있었다. 발에는 털신이 한 짝밖에 없었다.
 
변사자의 신원을 보여주는 단서는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원이 밝혀진 것은 의금부(왕명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덕분이었다. 의금부는 실종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사건 나흘 전에 실종된 이석산이 변사자이며 그가 칼에 찔려 살해됐다는 자체 결론을 내렸다.
 
승지 이휘는 '칼에 찔려 죽었다'라는 부분에 의문을 갖고 독자 수사에 착수했다. 주상이 수사권과 사법권을 갖고 있었기에 승지가 수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 시절에는 당연했다.
 
이휘는 시신을 재검시했다. 상처가 원형인 점에 주목하게 됐다. 범인이 창을 들고 있었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됐다. 원형 상처는 창에 찔린 흔적이라는 것이 이 시대의 법의학 지식이었다.
 
<증수무원록언해>는 창에 찔리면 둥그런 상처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언해로 된 이 책은 정조 때 나왔지만, <무원록> 자체는 원나라 때 나왔고 옛날 한국 수사관들은 이런 지식을 알고 있었다. 의금부 수사관은 이 점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휘는 이석산에 대해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을 탐색하다가 애정의 삼각관계가 있는 민발이라는 공신에게 주목했다. 민발은 유사한 전력도 있었다. 형의 첩과 몰래 만나는 내연남을 두들겨 팬 일이 있었다.
 
이휘는 이석산·민발 두 사람을 동시에 사귄 막비라는 여성의 집을 수색했다. 그는 그 집 사랑방 벽지 일부가 최근에 교체된 점과 그 집에서 털신 한짝이 발견된 점에 주목하게 됐다. 이를 근거로 이석산이 이 집 사랑방에서 막비를 만나다가 민발에게 살해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휘는 창 한 자루도 거기서 찾아냈다.
 
벽지가 교체된 것은 살인사건으로 인한 핏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 집에서 살해된 이석산을 모화관 근처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민발이 공신이라는 이유로 세조 임금이 사건을 덮긴 했지만, 이휘는 법의학 지식을 토대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공신을 건드린 일로 인해 이휘는 세조의 미움을 사서 공조참의(건설교통부 국장급)로 전보됐고, 양력으로 그해 7월 4일(음력 6월 2일) 사육신 사건에 가담했다가 거열형을 당했다.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정변에 가담했다가, 수레를 이용해 죄수의 몸을 분해하는 형벌을 받게 됐던 것이다.
 
살인사건 해결에 대한 의지는 오늘날의 대통령보다 옛날 군주가 더 강력했다. 이휘 사건 당시의 세조는 범인이 공신이라는 이유로 사건을 덮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군주들은 살인 사건의 범행자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수사관들은 더 악착같이 사건 해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같은 과학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현장검증과 추리력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 정신과의사 유세풍>의 서은우 이상으로 두뇌를 회전시켜야 했다.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수준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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