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한국과 중국, 일본의 감독들이 참가한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가 개봉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1년 전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던 박찬욱 감독이 참여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병헌과 임원희, 강혜정, 염정아 등이 출연한 <컷>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컷'은 영화감독들이 신을 끝낼 때 외치는 구호이면서 '자르다', '절개하다'는 의미도 지닌 중의적인 뜻으로 쓰였다(참고로 <컷>의 장르는 '공포 스릴러'다).

재미있는 것은 <컷>에서 이병헌이 연기했던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극 중에서 천재 영화감독으로 출연한 이병헌의 캐릭터 이름은 바로 류지호였다. 류지호는 박찬욱 감독이 평소 좋아하는 감독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류승완 감독의 앞글자 류와 김지운 감독의 지,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인정하는 어떤 영화 감독의 마지막 글자 호를 딴 것이다.

관객들은 류지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류지호의 마지막 글자 '호'는 당연히 <살인의 추억>을 연출했던 '디테일의 대가' 봉준호 감독의 마지막 글자에서 따왔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훗날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 외에도 또 한 명의 '호'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감독도 함께 생각했다고 밝혔다. 바로 < 8월의 크리스마스 >와 <봄날은 간다>로 유명한 '멜로 영화의 대가' 허진호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만 4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만 4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싸이더스

 
데뷔작으로 청룡 영화상 작품상 받은 감독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봉준호, 최동훈, 김태용, 임상수, 장준환 등 많은 영화감독들을 배출한 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한 허진호 감독은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을 만든 박광수 감독 밑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허진호 감독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한 후 약 3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1998년 장편 데뷔작 < 8월의 크리스마스 >를 선보였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던 배우 한석규와 심은하를 캐스팅한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허진호 감독 특유의 멜로 정서로 서울에서만 42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허진호 감독은 < 8월의 크리스마스 >를 통해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비롯해 청룡상과 대종상, 황금촬영상의 신인 감독상을 휩쓸며 충무로에 대형 신인 감독의 등장을 알렸다.

허진호 감독은 < 8월의 크리스마스 >가 개봉한 지 3년 후 2001년,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를 통해 다시 한번 청룡영화상 작품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단 두 편의 영화로 한국 멜로 영화의 대가로 떠오른 허진호 감독은 2005년 주가를 올리던 배용준과 손예진이 출연한 <외출>을 연출했다. <외출>은 국내에서는 80만 관객에 그쳤지만 배용준의 인기 덕분에 일본에서는 3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위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던 허진호 감독은 2007년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으로 처음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하지만 정우성과 중국 배우 고원원이 출연한 멜로 영화 <호우시절>이 전국 28만 관객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허진호 감독은 2012년 장동건과 장쯔이, 장백지 등이 출연한 <위험한 관계> 역시 전국 29만 관객으로 국내 극장가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2016년 손예진과 박해일 주연의 <덕혜옹주>를 통해 560만 관객을 동원하며 데뷔 후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허진호 감독은 2018년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룬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2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기대했던 흥행성적에는 미치지 못했다. 20년 넘게 영화만 만들던 허진호 감독은 작년 전도연, 류준열 주연의 JTBC 드라마 <인간실격>을 연출하며 처음으로 드라마 연출에 도전했다.

주인공 오열 없이도 관객 울리는 멜로 영화
 
 밝게 웃는 두 주인공을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장르가 슬픈 멜로물이 될 거라 예상하긴 쉽지 않다.

밝게 웃는 두 주인공을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장르가 슬픈 멜로물이 될 거라 예상하긴 쉽지 않다. ⓒ 싸이더스

 
지난 1997년 11월에는 고 최진실과 박신양이 출연한 멜로 영화 <편지>가 개봉해 서울에서만 72만 관객을 동원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편지>가 개봉한 지 약 두 달이 지난 시점에 '시한부' 소재의 멜로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관객들의 기대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한석규와 심은하로 구성된 주연 라인업은 'TV스타' 최진실과 '신예' 박신양을 능가했다.

하지만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이래도 안 울래?"라는 듯한 정신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쏙 빼놓았던 <편지>에 비해 덤덤한 정서의 영화였다. 죽음을 앞둔 정원(한석규 분)은 영화 내내 실없는 사람처럼 웃기만 하고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분)은 정원이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정원에게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지만 관객들이 이를 눈치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굳이 화려한 수상경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멜로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자극적인 장면은 거의 찾을 수 없고 배우들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SNS는커녕 인터넷 커뮤니티도 흔치 않았던 1990년대 후반에 입소문으로 서울에서만 4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석규는 동국대 재학 시절이던 1984년 '덧마루'라는 팀으로 참가해 강변가요제에서 장려상을 받았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배우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에서도 엔딩곡으로 쓰인 동명의 OST를 직접 불렀는데 기교 없이 담담하게 부른 한석규의 깨끗한 음색 덕분에 별다른 홍보 없이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노래를 듣다가 정원이 홀로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이 떠오르면 갑자기 눈물이 차오를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해외에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2005년 일본에서 베테랑 감독 나가사키 슌이치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 8월의 크리스마스 > 일본판은 지난 2007년 국내에서도 역수입돼 개봉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전국 관객 86명). 지금은 은퇴해 연예계를 떠난 심은하의 '리즈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로 세월을 뛰어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지난 2013년 재개봉되기도 했다.

영화만큼 유명해진 군산의 초원사진관
 
 영화의 배경이 된 초원사진관은 개봉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군산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초원사진관은 개봉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군산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 싸이더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식에게는 최악의 불효다. 사랑하는 다림 앞에서도 언제나 태연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정원조차도 아버지(신구 분) 앞에선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특히 비디오 리모컨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에게 비디오를 틀어주는 장면을 반복해서 알려주다가 짜증을 내는 장면은 연로하신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법한 일이다.

언제나 담담하고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정원은 단짝 친구인 철구(이한위 분) 앞에서는 가끔씩 이성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 잘 마시지 않는 술을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마시면서도 한 잔만 더 마시자고 보채는 것도,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거란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것도, 파출소에서 고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것도 모두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정원은 다림을 알게 되기 전, 꽤 긴 짝사랑을 해왔는데 정원이 오랜 기간 짝사랑했던 상대가 바로 고 전미선이 연기했던 지원이었다. 사실 < 8월의 크리스마스 >에 출연할 때만 해도 전미선은 얼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였다. 하지만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신선한 느낌 덕분에 전미선은 짧은 분량에도 정원의 첫사랑 역할에 잘 어울릴 수 있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가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후 정원이 운영했던 초원사진관의 세트도 관광명소로 발전했다. 물론 당시엔 촬영이 끝나자마자 세트장을 철수했지만 지난 2012년 군산시에서 이를 복원해 관광상품으로 발전시켰다. 영화가 개봉된 지 24년, 초원사진관이 복원된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군산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정원과 다림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 8월의 크리스마스 >를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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