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데이 세븐 나잇 포스터

▲ 식스 데이 세븐 나잇 포스터 ⓒ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중학교 1학년 까까머리 학생이었다. 1998년, 나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는 걸 낙으로 삼는 할리우드 키드였다. 그 시절 비디오 가게 카운터엔 신작 비디오를 소개하는 무가지가 놓여 있곤 했다. 주머니 얄팍한 나는 그 종이를 뒤적여 영화소개를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때로는 영화보다도 그 종이를 샅샅이 읽고 또 읽는 게 더 즐거웠다.

<식스 데이 세븐 나잇>이 개봉한 건 늦여름이었다. 그러니 내가 비디오 가게 무가지에서 영화소개를 읽은 건 이듬해 봄쯤이었을 것이다. 아직 새 학기가 시작하지 않은 봄방학이었으므로 나는 중학교 1학년 키 작은 아이였다. 그 아이를 사로잡는 영화설명이 종이에 적혀 있었다.

'잡지사 사진작가 로빈(앤 해치, 앤 헤이시를 당시엔 이렇게 표기했다)은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휴가 중에 상사의 호출을 받고 근처 섬으로 촬영을 떠나지만 비행기가 번개를 맞아 무인도에 착륙하게 된다. 조종사 퀸(해리슨 포드)과 단둘이 남겨진 그녀는 퀸이 미덥지 않다. 상반된 성격의 남녀가 무인도에서 티격태격하며 구사일생으로 목숨도 건지고 보너스로 사랑도 얻는다는 어드벤쳐 멜러물.'

무인도에 단둘이 남겨진 여자와 남자의 멜로라니. 그날 무가지에 적힌 신간 설명이 모두 스무 편은 되었을 테지만, 이만큼 나를 사로잡은 설명은 없었다. 매일 비디오 가게에 들르면서도 한 달에 고작 한 편씩만 빌리는 게 고작이었던 내가 이 영화를 빌려온 걸 보면 말이다.
 
식스 데이 세븐 나잇 스틸컷

▲ 식스 데이 세븐 나잇 스틸컷 ⓒ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영화 내내 빛났던 앤 헤이시

1박 2일짜리 대여기간에도 나는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돌려보았다. 한 번은 혼자, 한 번은 부모님과 함께, 반납 전 마지막은 다시 혼자 말이다.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번듯한 애인이 있는 금발미녀와 무인도에 추락해 사랑에 빠지고 마는 멋진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 보면 식상하고 촌스럽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이 있었던 것이다.

해리슨 포드는 당대의 스타였다. 한 달에 고작 한 편의 영화만 볼 수 있었던 나도 <인디아나 존스>의 인디아나 존스 박사를, <스타워즈>의 한 솔로를, <도망자>의 리차드 킴블 박사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식스 데이 세븐 나잇>에서 그보다 빛났던 건 처음 보는 여배우 앤 헤이시였다. 1969년생이니 영화에 출연한 건 29살 때였을 거다. 당시는 맥 라이언으로 대표되는 금발 여배우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던 시대였는데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던 앤 헤이시는 비디오 가게 단골 사이에서 그 아류쯤으로 여겨졌다.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1960년대 출생 배우들이 무지하게 많았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앤 헤이시는 특별했다. 가녀린 몸매에도 억척같은 움직임은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그저 멜로물 언저리에서만 맴돌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당차고 당당하고 기죽지 않는 표정들도 기존의 할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선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식스 데이 세븐 나잇 앤 헤이시

▲ 식스 데이 세븐 나잇 앤 헤이시 ⓒ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지난 5일 교통사고, 향년 53세

그녀가 맡은 캐릭터도 그랬다. 냉철한 사진작가 로빈은 도시를 벗어나 위기에 처하면 흔히 민폐며 짐덩어리가 되고 말던 당대 액션영화나 재난영화의 흔한 캐릭터와는 달랐다. 남자에게 짐이 되어 묻어가는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목처럼 6박7일의 무인도 생활에서 끝내 생존한 생명력이며, 건장한 남자 퀸에게 완전히 의존하지만은 않는 주체성이며, 당찼던 마지막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멋졌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해냈다.

앤 헤이시가 지난 5일 있었던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져 끝내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신화상을 입은 채 생전 약속했던 장기기증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생명유지 장치로 버티다 마침내 호흡기를 떼기로 했다고 했다. 누구나 세상을 떠나지만 멋진 이들의 죽음은 조금 더 아쉬움을 남기는 법이다. 내게는 그녀의 죽음도 그러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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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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