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뱅크시> 포스터 이미지

영화 <뱅크시> 포스터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1_처음 뱅크시를 접했던 기억
 

지금 책상 위에는 국내에 번역된 3종류의 뱅크시 관련 서적이 놓여 있다.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아트 테러리스트 뱅크시, 그래피티로 세상에 저항하다> <뱅크시 - 벽 뒤의 남자>. 이 3권 이외에도 뱅크시를 언급한 책은 꽤 되지만, 뱅크시에 집중해 다뤄진 책은 이 셋이 유일하다. 그나마 앞서 나온 2종은 판권만료와 절판으로 중고서적 외에는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된 상태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2015년 타 출판사에서 새 판본이 나왔으나 역시 판권만료로 절판되었다. 2009년 책과 기본 내용은 동일하다.)
 
올해 초 서울에서 국내 최초로 뱅크시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제법 화제가 되었지만 논란도 뒤따랐다. '아트 오브 뱅크시: 위드아웃 리미츠'란 제목의 전시는 뱅크시와 그의 작품에 관한 저작권을 행사하는 기관에 의해 'FAKE'란 딱지가 붙은 연속 전시회의 일환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중 뱅크시가 작업하지 않은 게 섞여 있다거나 위작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복제가 용이한 작품 특성상 대부분이 '레플리카'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분명히 뱅크시가 작업한 것들이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고 (조금 절차가 복잡하긴 하지만) 연락도 가능한 원 작가와의 합의나 전시 구성 관련 공감대가 없이 이뤄진 행사란 점에서 비판이 적지 않다.
 
그렇게 유명해진 뱅크시를 처음 접한 건 2000년대 초반, 그가 막 세계적 지명도를 얻기 시작할 때다. 인터넷 시대의 수혜로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작업들을 접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범람하던 그라피티와 거리예술 부류 작업 중에서도 특출한 데가 있어서 자연스레 끌렸던 기억이다. 어느새 컴퓨터 폴더에는 나만의 뱅크시 갤러리가 생겨나 있었다. 그렇게 열광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뱅크시는 엄청나게 유명해져 있었다.
 
국내에서 그의 이름이 미술계를 넘어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가 직접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2010)가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내 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이후 2011년 8월 극장에서 개봉하면서 뱅크시에 대한 관심은 좀 더 확장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국내 거리예술 관련 매체에서 그 이름은 가장 먼저 호명되는 존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과거 장 미셀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에 이어 그라피티를 넘어 도시예술가의 위상을 획득했다 해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제 뱅크시도 제도화되었다거나, 대중이 그에 대해 알게 되는 첫 번째 이미지인 '익명성'에 대해서도 신비주의 홍보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수반되기 시작했다. 이 중에 일정부분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뱅크시 본인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이 여러 경로로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한 편의 영화가 개봉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뱅크시에 관해 다룬 영상 중 집대성 판이라 해도 좋을 내용을 가득 채운 채.
 
2_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거리미술의 짧은 역사1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화면이 올라오면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기록영상은 바로 여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익명' 예술가의 그림이 낙찰되는 현장이다. 2018년 10월, 영국의 유명한 소더비경매장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선과 소녀>가 당일 경매의 마지막 상품으로 올라왔고 백만 파운드에 낙찰된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경매 낙찰이 선포된 그 직후 갑자기 액자 속에 미리 준비된 장치를 통해 그림이 파쇄가 되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작품이 갈가리 조각나는 바람에 장내는 순식간에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뱅크시가 2003년 테이트 미술관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에서 저지른 '반달리즘'의 결정판으로 회자되는 사건이다.
 
그렇게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의 전반부는 그라피티의 탄생과 거리미술에 대한 역사 개요로 진행된다. 영화 전체 110여 분 분량 중에서 40여 분을 할애해 영화는 뱅크시라는 거리 미술의 아이콘이자 현재 살아있는 미술가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존재의 기원과 영향력에 대해 세밀히 다루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해당 부분은 굳이 뱅크시에 관심이 그리 없더라도 도시예술 분야를 알기 위해선 필수 코스가 될 만하다.
 
1970~1980년대 뉴욕의 빈민가에서 빈민가 청년들이 자신이 생활하던 공간(브롱크스나 브룩클린 같은)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표출하기 위한 방식으로 출발한 그라피티는 자연스레 초기 힙합 문화와 어우러졌다. 그저 예술적 양식을 뛰어넘어 하나의 종합적 실천으로 표출된 그라피티 문화의 패턴은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 이들은 페인트 스프레이를 '훔쳐' 물감과 붓 대신 사용한다. 그리고 거리 곳곳의 공공건물 평면을 캔버스로 삼아 그곳에 자신들의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새겨 넣었다. 처음엔 조잡하기 그지없던 낙서였지만 경쟁이 붙으면서 점점 세련되고 복잡화되는 과정을 자연 진화적으로 거치게 된다. 뉴욕 지하철은 그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캔버스 각축의 대상이 된다. 그라피티 활동가들은 공공건축물과 지하철에 새겨진 자신들의 작품(!)을 보면서 도시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기분을 느꼈다고 인터뷰한다.
 
이들의 도시 게릴라다운 활약상은 곧 도시의 새로운 풍이 되는 동시에 시 행정당국에게는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가 된다. 명백히 공공건축물에 대한 '테러'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격렬한 찬반논란으로 나누어진다. 그 와중에도 뉴욕을 넘어 미국 대도시들로 이 열풍은 순식간에 확산되어 간다. 해당 분량은 제법 상세히 그라피티 문화의 초창기 흐름을 짚어주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파트다. 1983년부터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발행된 <스타일 워>나 <서브웨이 아트> 같은 기록영화와 사진집들이 주요하게 등장해 그 시절을 증언해준다.
 
3_그라피티, 브리스톨에 상륙하다. 거리미술의 짧은 역사2
 
대서양의 물리적 장벽을 건너 트랜드 세터들에 의해 그라피티 문화가 영국에도 곧 상륙한다. 그 최초 상륙지점 중 항구도시 브리스틀이 있었다. 과거 대항해 시대 노예와 담배 무역으로 대영제국의 초반 전성기를 누렸던 동네다. 따라서 다양한 이종의 문화 흐름이 가장 일찍 닿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다. 그런 식민제국 시절의 경험은 브리스틀을 다문화 공간으로 유지해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당시 진행되던 경제적 쇠락으로 지역 내에서 저항적 하위문화가 태동하는 산실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1980년대 전후 영국 대중문화 관련 주목할 만한 흐름들이 대거 탄생한다. 음악 분야에선 포스트 펑크 계열의 전설이 된 아티스트들이 출현했다. 매시브 어택과 포티쉐드, 트리키의 고향인 것이다. 거기에다 레게 등 다양한 3세계 기원 음악에 힙합과 테크노를 결합시키던 초기 형태인 '사운드 시스템'으로 DJ와 MC들의 팀이던 와일드 번치가 브리스틀에서 만개하고 있기도 했다. 훗날 매시브 어택의 주요 멤버로 '3D'라 불리던 로버트 델 나자는 또한 브리스틀에 뉴욕에서 직수입한 초기 그라피티 문화를 이식한 주역이기도 했다.
 
대중음악은 사회적 상황과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존재다. 마침 하필이면 당시 영국은 대처리즘의 격랑 속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보수당과 노동 간에 이뤄진 사회적 합의로 복지국가를 건설했던 거대한 사회계약은 파괴되고 있었다. 그 빈자리에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휩쓸었다. 브리스틀을 포함한 유서 깊은 잉글랜드 중서부 산업도시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초토화되었다. 바로 <빌리 엘리어트>에 기록된 영국 산업계 구조조정의 시절이 똑같이 브리스틀에도 도래한 것이다.
 
대량 실업으로 인해 빈곤과 범죄가 만연하던 브리스틀 역시 혼란한 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기찻길 근처 노동자계층 집단주거지 바턴힐에 위치한 청소년센터. 그곳에서 일하던 사회복지사는 건물 담벼락을 그라피티 공간으로 내어주는 결정을 내린다. 할 일 없이 빈둥대던 불량청소년들에게 넘치는 기운을 뺄 여지를 제공하려는 아이디어였다. 그의 의도대로 남는 건 시간이요 멍석 깔아준 담벼락 캔버스가 있으니 곧 그라피티가 넘쳐난다. 여기를 거점으로 그라피티는 브리스틀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훗날 뱅크시는 바턴힐 청소년센터 사회복지사 존 네이션에 대해 지난 20년간 브리스틀 청년문화에 최고의 공헌을 한 공무원으로 칭송한다)
 
하지만 뉴욕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그라피티 열풍은 곧 지역사회 내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지역경찰은 관련 행정기구와 합동으로 1989년 '앤더슨 작전'을 개시해 1년간 72명을 기물파손 등 혐의로 체포한다. 자연히 지역사회의 공적이 된 그라피티 활동은 수면 아래로 잠수한다. 하지만 소수의 그라피티 활동가들은 소수 코어로 팀 체제를 구성해 그라피티를 이어간다. 그리고 더 '하드코어'해진 실천을 진행한다. 그 브리스틀 그라피티 1세대 후발주자 중 마침내 뱅크시가 등장한다.
 
4_'얼굴 없는 게릴라 아티스트'의 탄생과정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14살 때부터 그라피티를 하러 돌아다니던 뱅크시에게 그가 맞이한 시대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공공적 의제를 시도하는 개념미술가로 전환시키기 딱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처는 인두세 도입이라는 너무나 센 제도개혁을 시도하다가 스스로 무너졌지만, 그 정통 후계자였던 보수당의 메이저 신임총리는 1994년 공공질서법을 도입해 사회적 소수자와 하위문화, 유랑민과 무단 점거자들에 대한 사회적 전쟁을 선포한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5명 이상 모여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기만 해도 처벌되던 시절이 실제로 존재했다. 곳곳에서 개인의 자유를 범죄시하며 권리를 침해하는 공격과 처벌이 이어진다. 브리스틀 내 그라피티 게릴라를 넘어 뱅크시는 글래스톤배리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면서 당대 사회상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밀착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이런 격동의 시대상 소개와 함께 영화는 한편으로 그의 작업방식이 이 시기 전후 큰 변화를 선보이는 점에 주목한다. 스프레이를 손으로 휘갈기는 프리핸드 방식에서 미리 실내에서 제작한 판형을 이용해 작업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는 스텐실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 그라피티의 도그마를 뱅크시는 자연스럽게 뛰어넘게 된다. 위험할 수밖에 없는 야외 작업 노출 시간을 5분 내로 줄인 덕분에 그라피티의 당시 주류였던 자기 이름 새겨 넣기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라피티와 함께 또 다른 청년 하위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던 PUNK 록 음악에서도 정치-사회적 주제를 도입하는 과정은 동일하게 이어졌다.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산화해간 섹스 피스톨즈에서 점점 더 역사와 사회 풍자에 경도되어 간 더 클래시로 펑크록의 중심이 이동되었던 것처럼.
 
다시 영화는 뱅크시가 당대 그라피티 문화의 산물임을 입증하고자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카메라는 그라피티의 기원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 언더그라운드에선 장 미셀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들의 새로운 작업은 청소년들의 하위문화에 고착되어있던 그라피티를 거리예술 차원으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파리에선 블레크 르 라가 스텐실 기법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함께 도시 내 노숙인 문제를 고발하는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1990년대 전반기에 현재의 뱅크시를 규정하는 특징들, 그라피티 아티스트+스텐실 아티스트+사회운동가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셈이다. 뱅크시는 뉴욕과 파리, 서구세계 곳곳의 대도시에서 공통적으로 이뤄지던 거대한 거리예술의 정수를 물려받은 것이다.
 
1995년 채널4 TV 프로그램 <셰도우 피플>에서 청년시절 뱅크시가 최초로 포착된다. 뱅크시라는 이름이 점점 독자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90년대 말 브리스틀의 월즈 온 파이어 이벤트로 400미터에 달하는 항구의 부두 벽면에 대규모 그라피티 퍼포먼스가 실행되어 화제가 된다. 곧이어 뱅크시는 무단 점거된 도시 외곽건물 공간을 활용해 단순 그라피티를 넘어서는 시도인 '마일드 마일드 웨스트'란 제목의 벽화를 완성한다. 보수당 체제 하에서 하우스와 레이브 파티를 공격하던 공권력을 조소하는 내용의 작품을 통해, 그라피티를 넘어선 도시미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고향 브리스틀을 넘어 뱅크시는 런던으로 향한다. 서민지역인 '이스트 엔드' 중에서도 이민자가 모여든 다문화 지대이자 집세가 저렴해 청년 문화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쇼어디치' 지역에서 뱅크시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쇼어디치의 독특한 술집 '드래곤 바'는 그와 동료들의 아지트가 된다. 협력이 자연히 모색된다. 마침 장기 집권하던 보수당 정권이 끝나고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집권한 1990년대 중반이다. 당대 영국은 '쿨 브리타니아'란 유행어를 탄생시킬 만큼 오랜만에 예술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YBA(Young British Artist)라 불리던 데미언 허스트 등 ('성상 파괴자'를 자처했던) 일군의 반항적 예술가들은 금방 서구 현대미술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시절이다. 자신감과 실험정신이 폭발하던 찰나다.
 
5_뱅크시 현상의 본격적 점화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십년을 넘기지 못하고 YBA의 동력은 소진되고 만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들은 고갈되어 버렸다며 OAP라 자조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노동당에 대한 기대가 차갑게 식어간다. 대처에게 물려받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큰 틀에서 유지된다. 여기에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에 적극적으로 블레어 정부가 참여하게 되면서 노동당을 지지하던 이들 사이에선 환멸이 늘어가던 2000년대 초다. (브리스틀은 전통적인 노동당 초강세 지역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흐름 아래에서 뱅크시의 작업은 반전-반체제 사회운동과 조응하게 된다. (지금도 뱅크시 작업의 주요 테마는 흔히 '좌파'라 불리는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당대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그의 작업은 점점 더 큰 조명을 받으며 '뱅크시 현상'은 영국을 뛰어넘어 세계적 관심을 얻기 시작한다.
 
한편 시민대중과 완벽하게 유리되어가던 현대미술에 대한 반발과 공명하게 된 뱅크시와 동료들은 포퓰리즘적 인기를 얻는 것을 기회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한다. 인디 예술가들의 자급자족 프로젝트 형태로 거리예술 판매 프로젝트와 대안적 전시회를 시도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2002년부터 '산타 게토'란 이름으로 파티와 결합된 전시 및 판매행사를 시작한다. 명성에 걸맞게 2003년에는 '터프 워'라는 명칭으로 대규모 단독 전시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스크린 프린트로 자신과 동료들의 작업을 출력해 '픽쳐스 온 월스' 인쇄회사를 설립한다. 이 프린트 작업을 저가에 직접 판매하면서 기존 아트 비즈니스 쇄신을 실험하는 시도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뱅크시의 지명도를 '세계구' 급으로 높이게 된 개화만발의 시간이 찾아온다. 2003년에는 뱅크시를 언급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펑펑 터지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뉴욕, 런던, 파리 미술관과 디즈니랜드 습격사건, 2005년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 지역에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을 대상으로 삼았던 일련의 퍼포먼스를 통해 현대미술에서 뱅크시의 이름은 부동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2003년에 벌어진 주류 전시 공간 습격들이 주류 미술계의 상업주의와 대중과의 괴리를 지적하는 거대한 농담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2005년 이후 꾸준히 거듭된 팔레스타인 관련 이벤트는 사회문제에 진지하게 발언하는 예술가로서 그의 명성을 쌓아올리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 관심과 실천은 그저 일회성이 아니다. 2007년 산타 게토 연례 전시회는 베들레헴에서 개최되었고 2015년엔 가자지구 폭격을 고발하는 2분여 단편기록영화를 제작했다.
 
2017년에는 '월드 오프 호텔' 프로젝트를 가동해 예술가의 사회참여에 한 획을 긋는다. 그저 일회성 그라피티가 아니라 영국이 자행한 식민통치의 역사부터 한 세기에 걸친 제국주의의 그림자와 그 결과물을 실제 숙박시설로 사용되는 건물과 결합시킨 시도다. (심지어 건물 운영은 팔레스타인 현지주민들에 의해 직접 이뤄진다) 그의 이런 면모는 이미 1990년대 멕시코 활동 때부터 현지 사회운동을 목격하며 축적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6_거대한 성공 후 찾아든 아이러니의 시간
 
2006년에는 영국을 벗어나 LA에서 '거의 합법적이지 않은'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이 이벤트는 기존의 뱅크시와 거리예술이 갖던 정체성을 벗어나 보통의 화제성 전시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유명인과 스타들이 몰려들어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 미디어의 총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시회 자체 내용보다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 '브란젤리나'(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이 오랜만에 재결합한 장소라는 매스미디어의 가십이 전시회를 침몰시켜버린 것이다.
 
전시회는 물론 상업적으로 대박이 났지만 거리예술의 미덕, '익명의 무법자가 공공장소에 침범하는' 행위와 온전하게 동떨어지고 만 것이다. 뱅크시와 그를 지지하던 동료들에게 해당 전시 평가는 충격이 컸음이 드러난다. 그만큼 거리예술에서 현장성, 공간적 특징, 대중과의 피드백은 작품과 떼어낼 수 없는 요소라는 점이 거리예술가들과의 인터뷰에서 거듭 반복된다. 이 지점은 이후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위치와 파생되는 논란에서 일관되게 집중하는 부분이 되었다.
 
뱅크시와 그의 동료들은 그렇게나 미술관과 경매회사, 박물관, 자본가 같은 큰손들로부터 독립된 시스템을 수립하고자 애썼는데도 '뱅크시 효과'는 정작 그들이 지양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자들에게 열렬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우스갯소리로 거리예술이 현대미술에 편입되고 주목받게 된 전환점은 데미언 허스트보다 뱅크시 기사가 언론에 더 나오기 시작한 때부터라는 자조가 뒤따른다. 그런 웃기 힘든 곡절도 따라왔지만, 어쨌든 그를 아이콘으로 삼아 전 세계 도시로 확산되어 도시의 풍경 일부가 된 그라피티와 거리예술의 영향력은 나날이 거대해진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 홍보포스터도 그 영향을 받았을 정도다. 이제 그라피티 문화는 영 아티스트로 통칭되던 현대미술 스타들 이후 청년예술운동의 유의미한 후계로 등극한 것이다.
 
뱅크시는 이제 자신의 예기치 않은 대성공을 감당하고 응전해야 한다. 특히 그가 주력한 대응은 기존의 판매용 인쇄물이나 오리지널 캔버스와는 별개로 그가 사회적 맥락을 의도해 작업한 벽을 통째로 떼어내 판매하는 문제였다. 그는 '페스트 컨트롤'을 설립해 작가 자신이 인정한 작품 인증서 COA를 발급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미술시장의 허점을 활용한 셈이다. 작가의 인증인 COA가 없다면 상류예술기관에선 굳이 뱅크시의 작업을 고가에 구매할 가치가 없게 된 것이니. 하지만 여전히 뱅크시가 작업하고 간 건물 벽은 '성지' 취급을 받으며 과거엔 지우기 바빴던 신세에서 180도 뒤바뀐 상황이다. 건물주는 실시간 투명 플라스틱으로 벽화를 보호하고 미술상들은 부르는 값에 벽을 통째로 떼어내려 혈안이 되는 건 여전하다.
 
뱅크시는 드물게 서면 인터뷰를 통해 거리예술은 그 거리의 것이자 해당 도시에 대한 선물이므로 작품을 거리에서 '훔치는' 행위는 도덕적 범죄라는 입장을 명백히 개진한 바 있다. 그럼에도 미술계 억만장자들이 그라피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건 시장의 바닥을 드러내고 갈 데까지 갔다는 하나의 징후 아니겠냐는 진단도 이어진다.
 
7_거리 아티스트로서의 도전은 계속된다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영화 <뱅크시>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다시 뱅크시는 작업에 매진한다. 2008년엔 좀 더 거리예술의 본연에 밀착한 형태로 워털루 기차역에서 '칸스 페스티벌'을 열었다. 개인이 아닌 40여 명의 동료 거리예술가와 함께한 작업이다. 2009년에는 오랜만에 고향 브리스틀에서 '뱅크시 vs 브리스틀 박물관' 전시회를 개최한다. 20년 전 앤더슨 작전의 주요 구성원이던 브리스틀 시의회가 (태도를 정반대로 고쳐)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일종의 '역사의 복수'인 셈이다. 그리고 2015년에는 전혀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없는 테마파크, '디즈멀랜드' 이벤트가 이어진다.
 
그 외에도 2010년 그가 직접 연출한 다큐멘터리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통해 현대 개념미술이 작업의 가치와 무관하게 인플레이션의 극을 달리는 상업화를 비판하면서 일종의 조롱이자 풍자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노점을 열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를 통해 미술업계가 작품의 본연적 가치보다는 예술광고가 포장해주는 혜택에 의존한다는 걸 폭로해버린다. 60달러 정가제(!)로 판매된 그의 익명의 작품들은 몇 점 팔리지도 않았지만 지나는 길에 2점을 구매한 뉴질랜드 관광객들은 작품의 가치를 꿰뚫어본 안목 덕분에 훗날 12만 5천달러에 작품을 팔았다는 후일담과 함께.
 
그런 응전과 반격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뱅크시를 비롯한 거리예술은 주류 예술계의 거대한 중력에 포섭되어 버린 것 아닌가 자책감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상업주의와 패션화, 유명인 홍보 등은 동일하게 거리예술에도 전면적으로 침공을 수행중이다. 런던과 브리스틀에는 뱅크시의 벽화를 따라 투어하는 코스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고 정작 작가는 공인하지 않은 전시는 전 세계를 돌며 큰 성공을 거두는 중이다. 뭐가 앞뒤가 바뀌어도 심하게 바뀐 것 같다.
 
그와 함께 미디어의 '뱅크시 찾기' 광풍은 이어진다. 그는 홍보가 아닌 자기보호를 위해 익명성으로 자신을 감쌌고 대신에 쥐와 원숭이를 거리 곳곳에 새겨 넣었지만, 현대미술의 상업주의는 살아있는 실명의 예술가를 등장시켜야만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뱅크시 주위의 지인들은 뱅크시를 안다. 브리스틀 시민들 중에도 그가 누군지 아는 이들이 허다할 테다. 하지만 상업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거리미술의 특성 상 그의 '익명성'은 필수적인 완성요소다.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그런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시예술에도 잘 짜인 홍보 전략과 대전략 수립 당시 원칙 사수를 위한 방어가 필요해진 시절이다.
 
※ 이 뱅크시를 찾아내려는 매스미디어의 광풍은 2021년 EBS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국내 소개된 <공개수배 뱅크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다큐멘터리는 D-box에서 스트리밍 시청이 가능하다.
 
영화는 다시 2018년 10월 2일 소더비경매장으로 돌아온다. 뱅크시 작품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잘 알려진 작업인, 시민 대중도 구매 가능한 중저가 수준으로 거래되어온 <풍선과 소녀>가 102만 4천 파운드에 낙찰되는 순간이 반복된다. 액자에 내장된 파쇄기가 작동되고 현장의 미술계 인사들이 경악하는 표정들이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그 카타르시스를 지나면 자막으로 파쇄 후 작품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는 후일담이 표시된다. 영화가 완성된 후 해당 작품은 '사랑은 쓰레기통에'란 새 이름으로 2021년 경매에서 원래 낙찰가의 18배인 1870만 파운드에 팔렸다고 한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도시 게릴라들의 시가전은 계속된다.
 
<작품정보>
뱅크시 - 무법예술의 출현
Banksy and the Rise of Outlaw Art
2020|영국|스트릿 아트 다큐멘터리
2022.08.11. 개봉|112분|전체관람가
감독 엘리오 에스파나
출연 뱅크시(기록화면), 벤 아인, 스티브 라자리데스, 존 네이션, 펠릭시 'FLX' 브론,
알란 KET, 스케이프 마르티네즈, 켈리 RISK 그라벨
내레이션 마크 홀게이트
뱅크시 목소리(재연) 조지프 프라우스
음악 피트 위츠
번역 김경준
수입 (주)마노엔터테인먼트
배급 (주)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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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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