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일부터 방영 중인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언뜻 들으면 어울리지 않는 '조선시대'와 '정신과 의사'를 접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조합이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환자의 정신 영역'과 '의사의 업무'는 상호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저술물 중에 <의약론>이 있다. 의료인의 자세와 치료의 원리를 다룬 이 글의 저자는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 임금(수양대군)이다. 그가 임금이 된 지 8년 뒤의 일을 기록한 음력으로 세조 9년 12월 27일자(양력 1464년 2월 4일자) <세조실록>에 바로 그 저작물이 소개돼 있다.

세조의 '의약론'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위 실록은 "주상께서 의약론을 지어 한계희·노사신과 아종 등에게 보여주고 임원준에게 해설을 달아 인쇄·반포하도록 했다"라고 전한다. 신하들에게 회람시키고 인쇄해서 반포하기까지 했으니, 당시 47세였던 세조가 의학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황임경·황상익 교수가 2003년에 <의사학(醫史學)> 제12권 제2호에 기고한 '세조의 의약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은 "세조의 <의약론>이 완성·반포되는 데 관여한 한계희·노사신·임원준 등은 세조의 측근으로 <의방유취>(1445)의 편찬에도 참여한 당대 일급의 유의(儒醫)들이었다"고 평한다. 유학자이면서 의사인 전문가들이 <의약론> 반포에 관여했다고 한 뒤, 이렇게 평한다.
 
"세조의 <의약론>이 이들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은 그 내용이 단지 왕 자신의 독단적인 의견이 아니라 당시 지배적인 주류 의학의 성격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논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김두종 서울대 의대 교수는 1966년에 펴낸 <한국의학사>를 통해 "치병·약용에 관한 중요한 논저이자 이를 통해 세조가 의료 제민술에 관해 조예가 깊었고 의가(醫家)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경성제국대학교에 부임하고 1935년에 도립 수원의원장을 지낸 미키 사카에(三木榮) 역시 1963년 오사카에서 발행된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세조의 저작물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위 논문은 "미키 사카에는 <의약론>을 의관의 마음을 다스리는 지침서로 보았고 약에 대한 왕의 의견이나 의가가 지켜야 할 풍속·훈계가 세세히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왕의 의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저라고 하였다"고 소개한다. 이 정도 평가들이 나왔다면, 세조의 <의약론>이 상당 수준의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의약론>에서 최고로 쳐준 것이 환자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관장하는 심의(心醫)다. 세조가 여덟 유형의 의료인 중에서 제일 높게 평가한 것이 환자의 정신까지 들여다보는 의료인이다. 세조는 이렇게 썼다.
 
"심의라는 것은 사람이 항상 마음을 편안히 하도록 한다. 병자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여 위태할 때도 진실로 큰 해가 없도록 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따라주니, 이는 마음이 편안하면 기(氣) 역시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심의는 심리 상태를 관찰해 마음과 몸을 조화시킴으로써 환자를 지켜주는 의사라고 했다. 환자가 원하는 것을 따라준다는 것은 환자의 비위를 맞추라는 게 아니라 환자의 내적 필요를 고려해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의사를 세조는 최고의 의사로 평가했다.

심의에 이어 두 번째로 높게 평가한 것은 식의(食醫)다. 음식을 통해 환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다. 셋째는 약의(藥醫)다. 주로 투약에 의존하는 의사다.
 
나머지 다섯 부류는 위의 셋과 차원을 달리한다. 위의 셋이 의사의 역량에 관한 것이라면, 나머지 다섯은 의사의 인성이나 자질과 관련된 것이다.
 
넷째 혼의(昏醫)는 환자의 위급 시에 환자보다 먼저 혼미해지는 의사다. 다섯째 광의(狂醫)는 자세히 살피지 않고 자신감에 넘쳐 함부로 치료하는 의사다. 여섯째 망의(妄醫)는 적절한 약이 없는데도 치료에 뛰어드는 의사다.
 
일곱째 사의(詐醫)는 의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의사다. 그런 상태로 남을 치료한다고 하니, 환자에게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셈이 되는 의사다. 마지막 살의(殺醫)는 자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함부로 조치하는 의사다.
 
마음과 몸의 상호 연계는 인류가 오랜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그런데도 세조가 심의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의사들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의약론>을 전국에 반포해 의료인들에게 자극을 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심리적 고통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그런데 심리와 육체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세조의 모습은 곡절 많은 그의 가정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1453년 11월 10일(실록 날짜 10월 10일)의 대살육을 통해 어린 조카를 무력화시키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와 그의 가족은 그 후로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
 
전 의령현감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따르면,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시숙은 왕위를 빼앗고 내 아들까지 죽였으니 나도 시숙의 아들을 죽이겠소"라고 경고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관료인 이자(李耔)의 <음애일기>에 따르면 세조가 그 꿈을 꾼 것은 단종이 죽은 해인 1457년이다.
 
정신적 고통을 세조 본인만 느낀 것은 아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세조의 공주도 왕실 비극에 회의감을 느껴 궁을 떠나 신분을 감추고 민가에 살았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1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되고 임금이 된 예종 역시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예종은 스무 살이었다. 이 집안 사람들이 느꼈을 죄책감이 신체 건강에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다.
 
1453년의 참극 이후로 세조 가족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런 속에서 가족 구성원 일부의 신체적 건강에 중대 문제가 발생했다. 1464년에 발행된 <의약론>에서 세조가 마음을 다스리는 심의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 데에 이런 배경 역시 작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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