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국제영화제 폐지 결정과 관련, 해당 관계자가 직접 기고문을 보내왔다. 정상진 엣나인 필름 대표는 강릉국제영화제 집행위원으로 1회부터 참여해왔다. 현재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편집자말]
2019년 여름이 다가올 무렵 강릉에서 영화제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김한근 강릉시장은 강원도 홍천 출신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영입하기 위해 몇 번이나 경기도 광주의 자택을 직접 방문하며 설득 중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김동호 위원장은 부산영화제를 끝으로 영화제에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새 영화제를 시작한다는 제안이 오자, 뜻은 좋지만 함께 할 수 없겠다며 몇 번이고 고사한 것이다.
 
치열했던 준비과정
 
 지난 2019년,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동호 조직위원장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지난 2019년, 강원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김동호 조직위원장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 강릉은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스포츠 브랜드화 전략으로 관광객 유치에 힘을 썼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올림픽으로 여러 호텔과 관광단지가 들어서며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구축됐지만, 꾸준히 사람들을 끌어들일 동력은 없었던 것이다. 강릉 입장에선 문화와 연계시키려는 매력적인 이벤트가 절실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국제영화제를 마련해 새로운 성장 전략을 마련하고자 하던 의지가 간절해 보였다.
 
영화제 준비 과정에서 김동호 위원장의 고민은 매우 컸다.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적처럼 안정권에 올려놓는 과정에서 그의 헌신은 자타공인 인정받는 부분이다. 영화계에선 김 위원장과 얽힌 여러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과 성장, 위기 상황에서 그의 역할이 매우 컸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후를 지내려던 찰나에 본인 고향인 지역에서 새로 영화제를 만드는 일에 헌신해 달라는 제안이 온 것이다. 80이 넘은 그에겐 너무 가혹한 제안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몇 번이고 내게 의견을 구했다. 그만큼 그의 고민이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강릉시와 여러 관계자들의 삼고초려 끝에 결국 그는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기로 한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강릉. 국제영화제를 위한 인프라 형성도 되어있고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자연경관도 아름답고, 무엇보다 20만 강릉 시민의 문화 수준이 국제영화제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했기에 승부를 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대 집행위원장 역할은 김홍준 현 영상자료원장에게 맡겼다. 다른 영화제처럼 집행위원장이란 타이틀을 붙이는 대신 예술감독이라 명명했다. 동시에 정동진독립영화제 측과 강릉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네마테크 활동가를 만나 협력을 구했다. 본인의 특기인 직접 소통을 발휘한 셈이다. 지역 독립예술영화의 발전을 생각하는 그의 진정성이 빛을 발했다.
 
영화제 첫해인 2019년 11월, 김동호 조직위원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의 유수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조직위원장들이 한자리에서 모여 영화제의 성장 경험을 공유하고 국제영화제의 비전에 대해 소통하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20+80: 21세기 국제영화제의 회고와 전망'이란 포럼이 개최된 것이다. 뉴욕아시아영화제, 도쿄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 세계 영화인들이 모여 영화제의 비전과 방향성을 얘기했다.
 
또한, 영화제를 준비하며 김 위원장은 본인의 네크워크를 총동원했다. 세계의 각지에 있는 게스트에게 직접 전화하거나, 해외로 찾아가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국내외 영화인들이 응답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온 2020년 이후에도 김동호란 사람을 믿고 달려와 준 영화인들이 많았다. 참석자들은 강릉영화제 특유의 분위기를 즐겼다. 국제공항이 없기에 인천을 통해 오는 불편함이 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영화제 행사와 분위기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정치 희생양이 된 문화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모습(2021년 10월 20일).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모습(2021년 10월 20일). ⓒ 연합뉴스

 
이처럼 강릉국제영화제는 나름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노력이 무색하게 정치권에선 이상한 흐름이 감지됐다. 김한근 시장 행보에 맞불 작전으로 강릉국제영화제 폐지를 공약으로 주장하던 시장 후보가 지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신임 시장은 당선되자마자 영화제 폐지 수순을 밟았다. 김동호 위원장은 면담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불성실한 태도로 응대했다. 김 위원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뤄진 면담도 인수위 사무국이나 강릉시청이 아닌 한 카페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강릉영화제 존폐 이야기가 오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영화제 시작부터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강릉국제영화제가 어떤 한 사람의 결정으로 탄생한 게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김동호라는 수장이 큰 역할을 했지만, 수많은 사무국 직원과 스태프들의 헌신, 애정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폐지 수순은 어떠한가. 민선 시장의 독단적 결정이 앞섰을 뿐 절차와 과정은 생략됐다. 행사 주체인 영화인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설득하는 과정은 왜 없었을까. 단순히 행정적 지원을 막으면 영화제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강릉영화제는 지역 축제기도 하지만, 3년간 영화제에 참석해 온 전국 관객들과 세계 영화인들 것이기도 하다. 이들의 참여로 영화제가 풍성해지고 강릉시 또한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는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나아가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단순히 정부나 지자체가 관여해 만들어지거나 폐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헌신과 진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생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전임 시장의 공을 지우고 싶다는 정치적 판단으로 4년간 공들여 온 영화제가 희생양이 되는 게 과연 상식적인가.
 
이 과정을 지켜보는 세계 영화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K무비·K팝·K드라마가 전 세계를 사로잡는 와중에 이 같은 결정을 한 현 시장의 판단은 분명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영화계는 분노해야 한다. 이번 강릉국제영화제를 두고 강릉시가 일방적인 폐지를 밀어붙인 선례는 지자체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 여타 영화제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이번 강릉국제영화제 폐지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7월 26일 강릉국제영화제는 임시총회를 열어 제4회 영화제의 개최 해지안을 처리했다. 동시에 기타 안건으로 사단법인 유지는 승인하기로 했다. 강릉국제영화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초석만은 지켰다. 개인적으론 다른 지역으로 강릉국제영화제를 이관해 작게나마 행사를 치르고 싶다. 그리고 강릉영화제가 제8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꿈을 꿔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중-
 
오늘도 이 글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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