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최희서.

배우 최희서가 첫 에세이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냈다. 일상과 연기자 활동을 하며 품어온 생각과 여러 감상을 특유의 문체로 펼쳐낸 게 특징이다. ⓒ @bhood_s

 

'연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해요.'
 
최희서가 누구냐고 묻는 이에게 이렇게 답할 것 같다고 했다. 그간 영화 <동주>의 쿠미,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를 거쳐,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보였던 최희서가 꾹꾹 자신을 눌러 담은 첫 에세이집을 최근 냈다. 위 문장은 그 책의 첫 문장이다.

앞 부분엔 어떤 다짐이, 따라오는 문장엔 다소의 부끄러움이 담겨 있어 보인다. 하지만 둘 다 좋아하는 것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껏 두어 번의 인터뷰를 했던 그를 또다른 궁금증과 함께 2일 서울 합정동 인근에서 만났다. 5년 만이었다.
 
<기적일지도 몰라>라는 제목이 딱 어울린다 싶었다. 2009년 데뷔 후 긴 무명 시간이 있었고, 우연히 전철에서 대본을 읊조리다가 캐스팅 된 이준익 감독 영화 <동주>,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중심 캐릭터인 가네코 후미코로 캐스팅 된 <박열>로 당시 주요 시상식의 상을 휩쓸기까지의 과정이 그렇다. 책 또한 <박열>의 제작기를 홍보팀에게 의뢰받아 한 플랫폼에 써오던 걸 출판사 관계자가 발견하고 제안해 온 경우였다.
 
무던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좋아하는 걸 해왔던 것에 대한 응답일까. 최희서 또한 그 기적과 같은 일에 겸허해진 듯 자기 고백부터 시작한다. 책의 1장은 20대 끝자락을 앞두고 두려워하던 최문경(최희서의 본명)이 프로필상 생일을 수정한 일화다. 1986년 12월 24일에 태어났지만, 출산 예정일은 그보다 2주 뒤였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나 1987년 1월 7일생으로 고친 것이다. 아직 무언갈 이뤄보지도 못했는데 한국에서 '30대 여배우'로 활동해야 하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셈이다.
 
영화 <아워바디>를 찍던 중 한 장면에서 10번의 테이크까지 가던 중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감독에게 "이병헌이 해도 힘들겠죠"라는 말을 해버린 대목에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성찰한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의 최희서를 있게 한 어떤 힘을 기적이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를 지탱하는 서브텍스트(subtext)는 '두려움' 같았다.
 
"아마도 두려움은 언제나 있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내가 두려운 걸까 생각하며 내가 지키고 싶은 꿈이 있은데 내 상황이 이래,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 왜 이렇게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걸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야망이 많아서? (웃음) 차라리 원하는 게 별로 없으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고, 연기도 하고 싶고, 여러 욕심이 있더라. <아워바디> 때도 새로운 걸 도전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 책을 낸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면서 나를 공개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바로 이어 최희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허튼 말이 아니다. 무명 시절 누군가 찾지 않으면 직접 만든다는 생각으로 단편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그때 인연이 된 손석구와 2012년엔 연극 <사랑이 불탄다>를 제작한 바 있다. 에세이집에 나온대로 좌절할라치면 의지를 발휘해 일어서는 뚝심은 최희서의 자연스러운 성정 중 하나였다.

최희서 연기의 비밀
 
유년 시절엔 일본 오사카에서,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일부 시기를 미국에서 보낸 그는 일본어, 영어 등에도 능통하다. 발랄하고 개구쟁이였던 소녀는 일본 학교에선 유독 말 수가 적어졌고, 따돌림도 당했다고 한다. 그 무렵 한 선생님이 권한 일기 쓰기가 습관이 돼 배우가 된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 캐릭터에 대한 일기와 제작일지를 쓰는 것도 최희서만의 루틴이 됐다.
 
"초2 때부터 일기를 썼다. 배우가 된 이후엔 오디션 등을 보러 다니느라 꾸준히는 못 썼지만, 어릴 때부터 쓴 덕에 글과 친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 쓴 게 아마 얇은 노트로 30권 정도 분량인 것 같다(웃음). 제 책 프롤로그에 담긴 조영숙 선생님 덕이다. 한인 학교다 보니 나머진 다 일본어 수업이었고, 국어 시간이 따로 있었거든. 일기를 써서 내면 '참 잘했어요' 도장과 함께 꼭 한 마디씩 코멘트를 써주셨다.
 
돌이켜보면 (배우 일에) 도움이 됐지만, 그땐 힘들었다. 옮길 때마다 '또다시 적응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일상이었고, 언제쯤 정착할 수 있을까, 어디가 내 고향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디아스포라(Diaspora), 이민자에 대한 공감이 나름 있다. <파친코>에 오사카 츠루하시에서 선자가 김치를 팔잖나. 제 친구 할머님도 그랬다. 어렸을 때 김치 파시는 할머님들을 많이 봤다. 디아스포라는 정말 남의 이야기같지 않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이야기다. 타지 생활로 좋은 기억도 있지만, 충격도 있다. 그런 게 배우로서는 좋은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최희서의 글엔 유독 묘사가 풍부했다. 그날의 풍경,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그의 에세이집을 두고 마치 소설을 보는 것 같다는 리뷰도 눈에 띈다. "제가 겪은 일을 시각적으로 잘 기억하는 편인 것 같다"며 최희서는 "<박열> 제작기나 일본 개봉기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써서 생생한 편이기도 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 애써 적지 않아도 이미지로 기억해내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본 노트는 그 캐릭터의 일기와, 그를 알아가는 제 일기가 합쳐져 있다. 캐릭터의 자기소개로 시작해서, 대본을 본 제 첫 인상, 알아가는 과정을 덧붙인다. 촬영을 시작하면 촬영일기를 쓴다. 몇 회차인지, 아쉬움은 무엇이었는지. 사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땐 시간에 쫓겨서 따로 쓰진 못했고, 그냥 제 일기장에 적는 정도였다. 드라마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영화를 할 때마다 쓸 것 같다. 지금도 <박열>을 찍던 때 합천의 숙소, 그 분위기가 기억난다."
 
 배우 최희서.

"디아스포라(Diaspora), 이민자에 대한 공감이 나름 있다. <파친코>에 오사카 츠루하시에서 선자가 김치를 팔잖나. 제 친구 할머님도 그랬다. 어렸을 때 김치 파시는 할머님들을 많이 봤다. 디아스포라는 정말 남의 이야기같지 않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이야기다." ⓒ @bhood_s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 <박열> 주연 최희서 배우

영화 <박열>이 일본에서 개봉했을 당시 일본 전역을 돌며 관객과 만났던 최희서. ⓒ 최희서 배우 페이스북

 

좋은 스토리텔러를 열망하다
 
특히 지난해 말엔 동료 배우 박정민, 손석구, 이제훈과 함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언프레임드>는 해당 배우들이 품고 있던 네 이야기를 엮은 단편 모음집과도 같다. 이중 최희서는 박소이를 내세운 <반디>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20대 스스로 백수라 여기던 시절, 산책하다 우연히 발견한 야생화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에세이집에 그 과정과 감흥이 자세히 나와 있다.
 
말 그대로 종합 예술인 아닐까. 최희서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 하나로 그는 연기해왔고, 써왔고, 찍어왔다. 유년 시절에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자마자 버스를 타고 주인공 홀든을 만나려 했던 기억, 볼 때마다 늘 감탄하는 <시네마 천국>과 페데리코 팰리니 감독의 영화들은 최희서라는 사람을 채워주고 자극하는 대상들이다.
 
"최근엔 김지연 작가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재밌게 봤다. 황인찬 시인의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도 보고 있다. 혹시 보셨는지? 우리가 아는 여러 시에 대한 에세이다.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여럿 있다. <데미안>도 그중 하나고. 배우로선 잉마르 베리만 감독 <가을 소나타>에 나오는 리브 올만을 참 좋아한다. 그 섬세하면서도 강한 느낌이 너무 좋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20대 끝자락을 지났고, 여전히 최희서는 배우로 살고 있다. 미국에서 동고동락한 인도 출신 배우 T와의 일화도 소개했다. 책에는 T가 각국의 배우들에게 '배우로 산다는 것'이라는 질문을 던져 놓고 그 대답을 엮어 다큐멘터리를 만들 예정이라 소개돼 있다. 마침 T에게서 이메일이 왔다며 최희서가 반색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될 무렵 연락받고 처음이나 2년 만이다. 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하더라. 와 진짜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 질문에 답은 아직 안 했다. 미리 답을 작성하기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바로 하고 싶어서. 최근 뉴욕에서 어떤 촬영을 마치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 범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30대 한국 여성이 할 수 있는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지만, 범지구적, 인류 공통의 고민에 대해서도 뭔가 말할 게 있을 것 같다. T의 다큐도 그런 면에서 재밌는 것 같다. 아마 초저예산이겠지만, 그렇게라도 경계를 넘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최희서는 인터뷰 말미에 말했다. 그것이 영화 연출이 될지, 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실행하려는 마음만큼은 좋은 스토리텔러다. 마침, "사라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들, 잊히는 것에 관심이 생기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그가 귀띔했다. 이야기와 생각을 다루는 것만큼은 분명 진심이었고, 의지 또한 강해보였다.
 
"지금의 책은 제 기억과 기록, 그러니까 일종의 고백을 쓴 건데 나중에 제가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나 제가 한 말을 까먹고 살 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 같다. 멀리 갔을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이랄까. 작품을 열심히 했는데 성과가 안 좋을 수도 있을 텐데,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말을 했던 제 자신을 이 책으로 다시 읽어낼 것 같다. 자기반성과 성찰을 공개적으로 한 느낌이다. 기댈 곳이 생겼달까. 동시에 종종 제게 정신 차리라고 말해줄 수 있는 존재 같기도 할 것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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