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편집권은 제작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감독에게 있는가.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배니싱 트윈'의 비디오판 출시와 함께 편집권 논란이 일고 있다. 제작자가 감독의 동의 없이 일부 장면을 빼고 야한 장면을 비디오판에 추가하자 감독이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법정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 <영화 편집권은 누구 몫인가>, 2000년 2월 <중앙일보> 기사 중

20년도 넘은 기사의 제목이 꽤나 논쟁적이고 단도직입적이다. 당시 제작사는 극장에서 개봉한 94분짜리 버전 대신 85분으로 편집해 비디오 출시했다고 한다. 이런 제작사의 편집은 극장판과 달리 짧고 쉽거나 화끈하고 선정적인 버전이 소위 '장사'가 잘됐던 '비디오 대여점' 시절 비일비재했다. 정치적이든 아니든, 이때만 해도 검열은 민감한 주제였다 .     

외화도, 극장 개봉에도 예외는 없었다. 판권을 사온 국내 수입사나 배급사(출시사)가 흥행을 위해 임의로 '가위질'을 했던 사례들 말이다. 극장 버전이 편집돼 논란이 일은 사례도 적지 않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 논란은 전설처럼 회자되는 사건이다.

1997년 개봉 당시 흥행을 고려한 수입사는 낮은 영상물 등급을 받기 위해 14분 분량을 삭제해 개봉했다. 홍보 차 내한했던 감독은 뒤늦게 이를 알고 분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프랑스로 귀국해 버렸다. 논란이 커지자 이후 수입사는 원래 버전으로 재개봉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창작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전통적인 논리와 거대 예산이 투입되는 작품일수록 제작사-방송사(플랫폼)의 입장도 존중돼야 한다는 논리의 대립'.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영화와 드라마를 둘러싼 최종 편집권 논쟁은 해묵은 주제요, 현재형의 문제다.

OTT 시대가 도래하면서 드라마 시리즈 제작에서도 이러한 갈등이 반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지난 6월 쿠팡플레이(이하 쿠팡)가 공개한 <안나>가 그 첫 번째 타자가 됐다. 2일 <안나>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이 쿠팡 측의 '일방적인 편집 횡포'를 주장하는 입장문을 내면서다.

<안나> 사태의 전말
 
 쿠팡플레이 <안나> 포스터.

쿠팡플레이 <안나> 포스터. ⓒ 쿠팡플레이

 
"투자사나 제작사가 편집에 대한 최종권한을 가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창작자와 최소한의 논의나 협의, 설득조차 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쿠팡플레이가 한 것과 같이 감독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방적인 편집을 강행하는 것은 업계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날 이주영 감독이 내놓은 장문의 입장문 중 일부다. 맞다. 이 감독의 설명대로라면 애초 감독이 8부작으로 편집한 작품을 쿠팡 측이 임의로 편집해 6부작으로 방영한 것 자체가 "업계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안나>는 <어느날>에 이어 쿠팡이 두 번째로 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다. '수지'로 친숙한 배수지가 주연을 맡으면서 화제를 모았고, 쿠팡플레이 구독자 증가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먼저 이 감독이 주장하는 '사실 관계'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안나>의 극본은 이 감독이 2017년 11월 8일부터 2021년 7월 12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8부작으로 집필했다. 촬영은 2021년 10월 15일부터 2022년 3월 말까지 진행됐다. 앞서 쿠팡 측은 제작사 콘탠츠맵을 통해 극본을 검토하고 최종고를 승인했다.

촬영 완료 직후 쿠팡은 1~4부 가편집본에 대해 별다른 수정 의견이 없었다. 쿠팡이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건 지난 4월 21일. 이후 같은 달 28일 쿠팡은 '아카이빙 용도'로 편집 프로젝트 파일을 제작사와 감독에게 요구했다. 제작사와 감독이 이에 불응하자 계약 파기를 언급하고 편집 프로젝트 파일을 받아갔다.

이 감독은 후반 작업을 거쳐 5월 30일 쿠팡에 8부작 마스터 파일을 전달했고, 6월 7일 쿠팡은 다른 연출자와 다른 후반작업 업체를 통한 재편집을 통보했다. 이후 쿠팡은 6부작 방영판 감독과 각본 크레디트에 본인 이름을 빼달라는 이 감독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주영 감독은 이병헌 주연의 <싱글라이도>로 데뷔한 영화감독이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데뷔작으로 청룡영화상 각본상,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쿠팡은 <안나>의 각본을 직접 쓴 이 감독이 크레디트에서 본인 이름을 제외해 달라고 요구했을 만큼 강력하게 반발했음에도 6부작 방영을 강행했다. 최종 편집에서 감독이 배제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런 과정을 거쳐, 8부작이 아닌 6부작 <안나>가 릴리스되었습니다. 회당 45~61분의 8부작 <안나>가 회당 45~63분의 6부작 <안나>가 되면서, 단순히 분량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조와 시점, 신 기능과 상관없는 컷을 붙여 특정 캐릭터의 사건을 중심으로 조잡하게 짜깁기를 한 결과 촬영, 편집, 내러티브의 의도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 이주영 감독 입장문 중

이 감독이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나서자, 3일 오후 쿠팡도 공식 입장을 내며 반박에 나섰다. 쿠팡은 "감독의 편집 방향은 당초 쿠팡플레이, 감독, 제작사(콘텐츠맵) 간에 상호 협의된 방향과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제작사의 동의를 얻어서, 그리고 계약에 명시된 우리의 권리에 의거 쿠팡플레이는 원래의 제작의도와 부합하도록 작품을 편집했고 그 결과 시청자들의 큰 호평을 받는 작품이 제작되었다"고 밝혔다.

최종 편집 과정에서 배제된 이 감독과 달리 제작사의 동의를 얻었고, 계약상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감독과 제작진에 전폭적 지지와 신뢰를 보냈다"라고 전제한 쿠팡은 "감독에 수개월 동안 구체적인 수정 요청을 전달하였으나 거부당했다"라고 덧붙였다. 이 감독이 일방적인 편집권 '갑질'을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전례 없는 사건
 
 쿠팡플레이 <안나> 스틸 이미지.

쿠팡플레이 <안나> 스틸 이미지. ⓒ 쿠팡플레이

 
앞서 20년 전 사건을 소개한 대로, 조기 종영이나 감독(연출자)‧작가 교체 등 제작 방향에 따른 창작자와 제작사 및 방송사 간의 갈등이 불거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물며 양측 주장을 감안하더라도, 감독이 8부작으로 편집한 드라마가 6부작으로 둔갑한 일은 전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두고 이 감독은 입장문에서 "감독이 창작한 것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시피 한 작품을 시청자들이 감독의 작품인 줄로 알고, 훼손되고 왜곡된 내용을 시청자들이 창작자의 의도인 줄로 아는 상황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며 "그러나 저의 대리인을 통한 몇 번의 비공식적인 요구를 거쳐 서면을 통해 정식으로 시정을 요구하였음에도 쿠팡플레이는 현재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안나>의 김정훈 편집감독 역시 이 감독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김 감독은 3일 오후 본인 페이스북에 <안나> 논란과 관련해 "이주영 감독님이 어려운 용기로 목소리를 낸 것에 내가 같은 마음"이라며 편집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편집과 관련된 쿠팡의 의견을 담은 페이퍼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보통 편집 과정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된다. 그리고 그것은 문서로 기록된다. <안나>는 그런 것이 없었다. 반나절 정도 쿠팡 관계자들이 와서 한 말들이 전부였다. 그렇게 <안나>는 창작자와 스태프들의 노력을 배제한 채, 비밀리에 누군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졌다."

쿠팡이 편집과정에서 감독은 물론 편집 감독 또한 배제한 채 아예 다른 스태프를 꾸려 6부작을 편집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 김 감독은 "나도 이주영 감독님처럼 내 이름을 크레디트에서 빼달라고 요구했지만,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다"라며 "내가 편집한 것이 아닌, 누가 편집했는지도 모르는 <안나>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고도 했다.

현재 "이 감독의 편집 방향을 존중한다"고 전제한 쿠팡은 감독판 공개를 예고한 상태다. 쿠팡은 3일 입장문에서 "지난 7월 8일 이미 공식화한 것과 같이, 총 8부작의 '안나' 감독판은 8월 중 공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 감독이 주장한  사실 관계를 구체적으로 반박하진 않았다 .       

이 감독이 이러한 쿠팡의 해명을 사과로 받아들일지, 향후 어떤 입장을 취할지 주목된다. 이 감독은 8부작의 완전한 공개 및 쿠팡 측의 공식 사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다할 것"은 물론 본인을 포함해 창작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강경한 후속조치를 예고했다.

"아울러, 창작자인 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쿠팡플레이가 작품을 일방적으로 편집함으로써 본래의 작품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주인공, 인물간 구도, 개연성, 서사구조 등이 다방면으로 훼손된 점들에 관하여 향후 소상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 이주영 감독 입장문

이번 <안나>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추후 이 감독의 대응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편집권을 둘러싼 쿠팡의 행태가 기존 최종 편집권 논란을 훌쩍 뛰어 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8부작에서 6부작으로의 축소는 전체 분량의 4분의 1을 들어낸 것이지 않은가.

앞서 이 감독은 인터뷰 및 기자간담회 참석 등 <안나>의 홍보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 감독이 크레디트에서 본인 이름을 제외해달라는 요구를 묵살한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풀이된다. 이 감독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안나> 사태는 불거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이 감독은 입장문 말미 "<안나>는 타인보다 우월한 기분을 누리고자 저지르는 '갑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 위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며 우회적으로 쿠팡의 행태를 '갑질'로 규정했다.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 경쟁에 뛰어든 여타 OTT 플랫폼들이 경청해야 할 고언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서두에 소개한 영화 <베니싱 트윈> 관련 소송의 결말은 어땠을까. 소설가이자 영화계에서 오래 자문으로 활동해 온 조광희 변호사는 3일 본인 소셜 미디어에 <안나> 사태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당연히 승소했다"라는 글이 눈에 콕 박힌다.

"영상법률자문을 오래 했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처음 봤습니다. 20년 전 모 제작자가 영화 '배니싱 트윈'의 극장 상영후 영화를 일방적으로 편집해 비디오를 출시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감독을 대리해서 저작인격권의 일종인 동일성유지권침해를 이유로 손배소송을 제기했고,당연히 승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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