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출 중인 송의헌 감독

영화 연출 중인 송의헌 감독 ⓒ 송의헌 제공

 
대구 영화운동에서 영화제작은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보기 힘들 만큼 도드라지는 특징이었다.
 
영화언덕과 제7예술로 이어진 시네마테크가 창작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구에서 실질적으로 영화제작을 주도한 것은 배용균 감독 스태프들이었다. 시네마테크는 상영회를 준비해 이들의 영화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대구의 창작 활동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제작의 경우 기존 시네마테크 활동과는 다른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85년 이후 서울의 대학영화운동도 제작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교가 몇 안 됐을 정도로 제작은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간단치 않았다. 필수적인 장비가 있어야 했고, 기술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었다.
 
서울의 대학영화운동에서 창작이 가능했던 학교들은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강해 8mm 필름으로 영상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거나, 학내에서 개최한 영화제가 흥행해 수익이 생긴 경우였다. 비싼 장비를 갖출 수 있는 바탕이 됐던 것이다.

충무로에 집중된 한국영화의 구조를 봐도, 영화를 하려면 서울에서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하는 게 기본으로 인식됐다. 그만큼 지역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불리한 여건이었고 일반적이지 않았다.
 
대구의 시네마테크와 대학 영화동아리들이 비디오 영화를 제작한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필름 대신 대안을 선택한 것이었으나, 의미있는 도전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비디오를 통해 노동 현장 등 민중들의 투쟁 상황을 담아 영상물을 제작한 곳은 민족영화연구소와 노동자뉴스제작단 등이었다. 단편영화 등은 여전히 필름이 대세였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 영화운동에서 대구의 창작 활동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일정한 현장 경험을 갖추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 중심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등 대구에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한 배용균 감독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히티의 고갱
 
배용균 감독 영향을 받은 스태프 출신들은 1990년대 후반 대구영화 창작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배용균 감독 연출부를 거친 송의헌(감독)이었다. 시네마테크가 '비디오 영화'를 지향했다면 이들은 '필름'이었다.
 
1995년 배용균 감독을 만나 영화 현장을 배우기 시작한 송의헌은 어릴 때부터 안 본 영화가 없을 정도로 영화 세계를 탐닉했다고 한다. "공중파 방송의 주말의 영화, 명화극장, 주한미군 방송인 AFKN 금요영화, 1980년대 초 극장상영 영화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봤을 정도였다"며 "20대에 들어서 연극연출, 무용 관련 작품을 하게 되면서 배용균 감독과 연결됐다"고 말했다.
 
송의헌이 배용균 감독을 만나게 된 것은 당시 대구에서 출연 배우를 찾던 배용균 감독이 '영화에 미친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면접 미팅을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후 영화 현장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배용균 감독 두번째 작품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배용균 감독 두번째 작품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배용균

 
송의헌은 "1992년 가을부터 1995년까지 배용균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에 김홍완(감독), 김동현(감독) 등과 함께 참여했다"며 "배용균 감독님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연출을 비롯해 촬영, 조명 등 모든 작업을 혼자 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익히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배용균 감독 촬영현장에서 프로듀서는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기존 충무로 작업 방식과 다른 점이었다. 무엇보다 추구하는 영화적 성향도 충무로와는 상이했다. 그렇지만 송의헌은 "지역에서 계속 영화를 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 과정을 통해 해결 못 할 것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역에서 영화를 제작하려면 가장 힘든 부분이 촬영 장비였다. 조명기는 직접 제작하고 일부는 구매했고,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제외한 모든 장비는 직접 보유하고 있었다. 이 같은 여건은 지역에서 영화를 함께 만들고 싶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촬영 장비를 보완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충무로가 아닌 대구에서의 창작 활동을 고집한 데는 배용균 감독이 자주 말했던 화가 고갱의 작품 활동 이야기가 영향을 끼쳤다.

"타히티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고갱에게 프랑스에 있는 아내가 질책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프랑스 파리 몽마르뜨에 와서 작업하려고 안달인데, 당신은 그 먼 작은 섬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갱은 "내가 보고 내가 머무는 곳이 나의 예술세계이자 예술의 중심이다"라는 말로 답했다고 한다."
 
송의헌은 "나는 고갱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해했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 송의헌의 뚝심 때문인 듯, 16mm 필름으로 만든 단편영화 <동상이몽>은 1997년 4회 서울단편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대구 봉산동 가구 골목 등지에서 촬영한 영화로 꿈을 꾸는듯한 현실을 의식하고 그것으로부터 깨어나려고 노력하는 남성을 통해 실존의 의미를 그린 꿈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스태프 열정 담은 초저예산 대구영화
 
 송의헌 감독 단편영화 <카르마의 법칙> 한 장면

송의헌 감독 단편영화 <카르마의 법칙> 한 장면 ⓒ 송의헌 제공

 
1999년 제작한 <카르마의 법칙>(35mm, 11분)은 제 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편경쟁부문 초청과 프랑스 클레르몽페랑단편영화제 마켓에 출품됐다. 비록 본선에 초청된 것은 아니었으나 대구영화가 유럽에 진출한 것 자체로 의미있었다. 2001년에 내놓은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는 배우 이성민의 데뷔작으로 6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만났다. 씨네마테크 아메닉에서 활동했던 서영지(영화자막가)가 스태프로 참여한 작품이었다.
 
송의헌에 앞서 김동현(감독)은 1997년 직접 시나리오를 쓴 첫 단편 <섬으로부터>를 연출했고, 2004년 영진위 사전제작지원사업을 통해 만든 <배고픈 하루>로 2004년 3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홍완(감독)은 1998년 첫 작품인 16mm 단편영화 <상실>을 완성해 1999년 공개했다. <상실>은 계속해서 달리는 두 남자를 통해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굴레를 표현한 작품으로 대구의 낯익은 풍경을 담았다. 다리 위에서 자살하는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당초 아양교에서 촬영하려다 물이 얕아 부산으로 촬영지를 옮겼다고 한다.
 
송의헌은 "대구에서 함께 한 스태프들의 열정은 그 당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며 "2001년 6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선재상을 수상한 김정구 감독 단편영화 <샴 하드로맨스>는 서울에서 작업해야 할 영화였으나 후반 작업을 제외하고 모든 제작과정이 대구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라고 강조했다.

2005년 디지털 장편으로 제작된 김동현(감독)의 <상어> 또한 대구에서 모든 작업이 진행됐고, 2005년 31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인 2006년에는 11회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을만큼 주목받게 된다.

송의헌은 "대구라는 지역에서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자신의 세계관을 영화라는 고된 작업을 통해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열망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라며 "제작된 작품들은 모든 스태프의 열정을 담아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다만 김동현(감독)은 "<상어>는 배경이 대구여서 촬영장비와 스태프, 배우를 꾸려 대구로 내려가 촬영한 영화일 뿐, 내가 대구 출신도 아니고 서울에서만 줄곧 살았기에 대구 영화로 규정되는 것은 맞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현(감독)은 또한 배용균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 "1990년 5월 서울 허리우드 극장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보고 새로운 영화가 궁금해 무작정 대구로 내려가 배용균 감독님을 만나게 됐다"며 "이후 계속 교류를 이어오다 1992년 7월 다음 영화에 참여하라고 해서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조감독을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1994년 11월 촬영을 마치고 나서 배 감독님이 최종 편집을 완료한 뒤 95년 1월에 서울로 올라왔다"며 "송의헌의 경우 연출부를 하면서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으나 1년 정도 하다가 여러 이유로 93년 가을 쯤 그만뒀다"고 덧붙였다.
 
정작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배용균 감독은 1997년 두 번째 작품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이후 은둔을 택한다. 제작을 끝내고 소규모 개봉을 했으나 사실 개봉이라기보다는 제한적 상영회가 더 알맞았다고 할 만큼 일반 관객이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흥행은 어려웠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주목받고 프리브르그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에 비하면 많은 관객과 만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배용균 감독의 은둔은 흥행의 충격으로 이해됐다.
 
이진이(작가)는 "1995년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제작과정에서 영화언덕 회원들도 허드렛일을 도우며 지켜봤고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상영될 때 처음 관람했다"며 "이탈리아어 자막이 있던 것으로 미뤄볼 때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된 프린트 같았다"라고 기억했다.
 
이어 "삼성나이세스가 주최한 서울단편영화제를 그대로 대구에 유치해 영화언덕 주관으로 대백프라자 홀에서 상영회를 했을 때, 배 감독님이 화질이 가장 좋은 원본 필름을 제공해 줬다"고 회상했다.
 
 배용균 감독(왼쪽)과 박광수 감독

배용균 감독(왼쪽)과 박광수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임안자)

 
배용균 감독은 2020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디지털 복원하는 과정에서 지난 시간의 소회를 밝혔다. 한국영상자료원 뉴스레터(2020년 2월 20일) 따르면 배용균 감독은 "이번 한국영상자료원에서의 디지털 복원이야말로 단순히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되었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형태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30년간 겪은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고백했다.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 영화를 찾는 곳은 많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영화계와 영화산업은 영화가 '감독의 작품'이라는 의식보다는 '제품'이라는 의식이 더 지배적이었고, 영화는 감독이 모르는 새 조악한 화질과 색감, 맞지 않는 화면비로 여러 차례 DVD 등으로 출시됐다. 하나의 신을 위해 몇 날, 몇 개월, 또는 1년을 기다려 한 장면 한 장면을 고심하여 완성했던 그에게는 이런 일들은 큰 상처로 남았다."
 
제작에 뛰어든 씨네하우스

배용균 사단 외에 제작에 관심을 기울인 곳이 있었는데, 원승환(인디스페이스 관장)이 몸담았던 씨네하우스 권용철 대표였다. 처음 시작할 때 시네마테크 외에 워크숍과 제작에 관심이 있었던 씨네하우스는 적극성을 나타냈다.
 
1998년 원승환을 중심으로 씨네하우스 회원들과 제7예술이 합친 씨네마떼끄 아메닉 출범 이후 권용철 대표는 국내 최초로 완전한 디지털 작업을 통한 중편영화 <우렁낭자> 제작계획을 발표했다.
 
매일신문(1998년 10월 15일 자)은 권용철(씨네하우스 대표)과 김준형 기술감독(한국로보캠 대표), 남기웅(감독) 3인이 <우렁낭자>를 제작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디지털 영화 제작이 활발한 서양과 달리 국내기술로는 화질이 떨어지는 어려움으로 인해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으나, 이 같은 문제를 순수 국내기술로 풀어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본격적인 영화제작사로 변신한 씨네하우스 권용철 대표는 이 기사에서 "현재 대구에 영화제작 기반이 조성돼있지 않아 서울의 전문가를 영입, 기술이전을 받고 있다"라며 "앞으로 자생력을 키워 순수 향토 재원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 남기웅(감독)은 1996년 어렵게 영화를 하다가 이젠 영화를 잊겠다고 대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우렁각시 설화가 머릿속을 사로잡으면서 6mm 디지털 비디오를 가지고 현대적으로 각색한 <우렁낭자>를 찍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남기용 감독 연출 <우렁각시>

남기용 감독 연출 <우렁각시> ⓒ 인츠닷컴

 
남기웅(감독)은 "누군가를 통해 권용철 대표를 소개받게 됐다"며 "서울에서 영화를 하고 있고 제작 경험도 있다 보니 권용철 대표가 제작에 관심을 보였고, 단편영화 시나리오로 쓴 <우렁낭자>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대구의 배우들과 서울의 스태프들을 모았고, 서울의 촬영감독이 대구로 내려와 1~2회차 정도 촬영이 진행됐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영화는 완성되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남기웅은 "권용철 대표가 영화를 좋아하고 의지가 있었으나 내가 경험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면서 "한편으로 현장을 아는 분은 아니라서 현실과 괴리가 생긴 면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래돼서 정확한 기억이 안 나지만, 제작비는 계속 들어가야 하는데 영화가 완성돼 돈이 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보니 부담이 생겨 발을 뺐을 수도 있다"고 유추했다.
 
남기웅(감독)의 첫 작품이 될 뻔했던 <우렁낭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다가 <우렁각시>로 이름을 바꿔 2002년에 제작됐다. 단편영화 <강철>(1999년), 장편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2000년)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었다. 남기웅은 "서울에 와서 장편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쓴 후 제작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씨네하우스는 <우렁낭자> 제작이 무산된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후 전개된 대구 영화운동의 연대 흐름에도 섞이지 않았다. 원승환은 "권용철 대표 중심의 활동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구 영화운동과의 교류도 없었다"고 말했다.
 
씨네포엠 워크숍
 
1990년 중반 대구에서는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도 진행되고 있었다. 1996년 독립영화창작집단 씨네포엠 윤병선 대표가 시작한 '영화연출교실'과 '단편영화 워크숍'이었다. 영화제작을 위한 기초적인 교육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서울 출생으로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윤병선은 연극과 독립영화 제작을 하고 있었으나, 1987년 사업관계로 가족들과 대구로 이사하게 되면서 영화에의 열정을 놓지 않고 워크숍을 개설했다고 한다.
 
영남일보(1997년 8월 14일 자)에 따르면 씨네포엠의 '영화연출교실'에서는 영화기획과 시나리오, 대본, 촬영기법 등을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 주 2회 3개월 과정으로 가르쳤다. '단편영화워크숍'에서는 비디오 영화와 16mm 필름 제작을 3개월 과정으로 교육했다.
 
 씨네마테크 아메닉 소식지 <amenic>에 소개된 씨네포엠

씨네마테크 아메닉 소식지 에 소개된 씨네포엠 ⓒ 서영지 제공


 
1998년 11월 씨네마떼끄 아메닉은 소식지 < amenic > 2호를 통해 씨네포엠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영은 편집장은 탐방 기사에서 "씨네포엠은 윤병선 단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된다"며 "애초에 창작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으나 영화 창작을 위한 기초가 없는 곳이어서 창작을 고민하다 보니 오히려 영상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수강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으로 믿는다"는 바람을 전했다.
 
윤병선은 1998년 6월 대구지역의 한 간행물에 쓴 '독립영화, 수용자에서 창조의 주체로'라는 글에서 "앞으로 지역에서 독립영화가 제대로 싹트고 자리 잡기 위해선 독립영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이해 교육 기관의 각성과 정책기관이 시와 도의 실질적 지원 그리고 방만한 지역 예총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영화에 뜻을 둔 개인과 단체들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인간 사회를 바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끊임없는 탐구와 도전 정신을 통해 영화에 대한 올바른 지식습득과 창작에 관련한 능력 배양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영화는 절대로 의욕만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윤병선의 노력은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매일신문(2002년 3월 1일 자)은 "씨네포엠을 거쳐 서울에 있는 영상관련 학과에 입학하거나 프로덕션에 들어간 수료생도 20여 명에 달한다"며 "여기엔 윤병선이 대학 졸업 후 삼진필름에서 CF를 연출하면서 쌓은 인맥과 대학 선후배들의 도움도 한몫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매일신문 기사에서 윤병선은 서울과 대구의 현실을 비교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영화 영상에 대해 특히 청소년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서울과 달리 지역에서는 그 호응도가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또 "서울은 중학교 때부터 영상제작반 등을 구성해 청소년들이 활발한 동아리 활동에 나서고 있고 각종 청소년 영상제 등으로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고 있는 반면에, 지역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고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씨네포엠은 워크숍 참여자들이 해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2002년까지만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활동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1985년 작은영화워크숍으로 시작으로 독립영화워크숍을 긴 시간 운영해온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윤병선이 서울예대 동기였으나 나이는 동기들보다 많았다"며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모션앤픽쳐
 
 모션앤픽쳐 대표 손영득 감독

모션앤픽쳐 대표 손영득 감독 ⓒ 게명대학교(손영득 제공)

 
시네마테크와 창작 활동에 더해 애니메이션은 대구 영화운동의 또 다른 축이기도 했다. 부산도 미술패 출신 김상화(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중심으로 애니메이션 운동이 전개됐는데, 대구는 1996년 말 손영득(감독. 전 대구독립영화협회 대표)이 만든 '모션앤픽쳐'가 중심이었다.
 
독립애니메이션 그룹으로 시작된 '모션앤픽쳐'는 조중현(감독), 전하목(감독) 등이 의기투합한 것이었다. 계명대(대명동 캠퍼스) 앞에 공간을 마련했고 실험적 작품들을 양산해내며 많은 영화제에 초청과 수상으로 지역 영화계에 지각변동을 알릴 만큼 특별했다.
 
손영득은 대학에서 민중미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구지역 미술대학생 모임의 일원으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제작에 참여했던 운동권이었다. 문화예술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변혁운동을 도운 것이었다.
 
손영득이 참여했던 걸래그림 '민족해방운동사는 '갑오농민전쟁'을 시작으로 '3·1민족 해방운동', '항일무장투쟁'(청년미술공동체 작), 4.3 항쟁, 여순사건, 4월 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역작이었다. 대구에서는 대구 민중문화연구회 미술분과와 대구지역 미술대학생 모임이 '해방과 대구 시월', '4·3과 여순 사건, 6·25 등 두 폭의 그림을 제작했다. 손영득은 "공동작업한 걸개그림을 서울 행사장으로 직접 갖고 갔었다"고 회상했다.
 
미술운동의 성과물이었던 민족해방운동사는 1989년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 남측행사에 전시됐다. 1980년대 민족미술운동의 걸작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대협 임수경 방북사건 여파로 강제진압에 나선 경찰이 갈갈이 찢어 불태우면서 사라지게 됐다. 야만적인 군사정권이 자행한 몰지각한 행태였다.
 
대구의 영화운동이 주로 시네마테크에 집중했던 것에 비하면, 애니메이션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손영득은 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결이 달랐다. 손영득은 "모션앤픽쳐 만들 때도 변혁 운동적 관점으로 생각했다"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단체라 그림을 기반으로 한 회화과 출신이 많았고, 처음에 만들 때는 운동적 성향이 강했다"고 말했다.
 
"민중미술 계열에 있는 분들이 주최한 서울의 워크숍에 참여해서 듣고 배웠기에, '회화는 누가 보겠냐?' '구태의연한 데다 갤러리 마음이다'라는 인식이 자리했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넓힐 수 있는 매체를 고민했었다. 그래서 후배들을 모았고, 작품 작업을 시작했다. 계속 사회 비판적 얘기를 담으려고 했으나 그 당시에는 너무 선언적인 것을 해봐야 검열되던 때였다."
 
손영득의 모션앤픽처는 대구를 넘어 한국독립애니메이션 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 무력한 개인의 존재와 답답함을 표현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초기 대표작인 <욕망>, <생존>, <못> 이 세 작품은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비롯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광주비엔날레 영상전 등 다양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됐다.
 
모션앤픽쳐는 10명 정도가 근무했는데, 방송대학TV(OUN)에서 제작의뢰를 받기도 했을 만큼 지역에서 상당히 실력 있는 단체로 평가받았다. 남태우(배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는 "모션앤픽쳐는 독자적 조직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며 "당시 케이블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에서 모션앤픽쳐가 유일했고, 전국에서 가장 탄탄한, 조직화 된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였다"고 평가했다.
 
'영화언덕'에서 '키노키즈'로
 
 무크지 <키노키즈>

무크지 <키노키즈> ⓒ 이진이 제공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시네마테크와 제작 중심의 대구 영화운동은 다른 형태로도 확장된다. 초기 영화언덕의 주축이었던 이진이, 박은주, 최해만 등이 1998년 영화웹진 < 키노키즈 KinoKids >를 제작한 것이다.
 
이진이는 "박은주와 최해만 외에 계명대 영화동아리 햇살 출신 박은주의 친구와, 최해만의 후배 등 네 명이 내가 제안한 스터디에 참여해 활동을 이어가다가, 다시 잡지를 만들고 싶어져 <키노키즈>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매주 모여 영화를 보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모임 이름이 '키노키즈'였다.
 
대학 졸업 후 대구지역 영화축제 등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던 박은주는 매일신문(1999년 6월 11일 자) 인터뷰에서 "영화전문잡지를 만드는 것이 개인적인 꿈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키노키즈'는 영화토론 모임과 웹진으로 끝나지 않고 더 확장됐다. 당시 벤처기업 열풍이 불던 흐름 속에 이진이가 중심이 돼 1999년 영남이공대 창업보육센터에서 벤처기업으로 창업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진이는 "개봉영화의 지역 홍보와 이벤트를 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이고, 주류에서 벗어난 영화와 B급 영화, 독립영화, 조연배우 등을 조명하는 영화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영화가 개봉하면 서울과 지방이 별도로 홍보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키노키즈'는 2000년 2월 18일 <아메리칸 뷰티> 대구 개봉행사로 진행된 시사회를 주관했는데, 지금의 영화 홍보마케팅사 역할을 한 것이었다. 대구에서 최초로 등장한 영화엔터테인먼트 기업이었다.
 
 무비 엔터테인먼트 벤처기업 키노키즈

무비 엔터테인먼트 벤처기업 키노키즈 ⓒ 이진이 제공

 
하지만 이후 키노키즈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한국영화 데이버베이스를 목적으로 개설된 씨네디비넷(dbdbdb.com)에 합류한 것이다. 씨네디비넷은 최초의 민간 시네마테크 '영화공간1895'를 함께 운영했던 이언경(감독, 작고)과 이하영(전 시네마서비스 배급이사)이 만든 회사였다. 이들의 영입에는 이하영과 키노키즈의 인연이 작용했다.
 
1997년 2월 개봉한 <초록물고기> 기획실장으로 참여했던 이하영은 개봉 작업이 끝난 후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강우석 감독이 배급을 맡기면서 지방부터 배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지방의 영화배급이 달랐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의 복합상영관 중앙시네마타운이 개관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이하영은 "극장을 상대로 지방에서 배급업무를 익히면서 1997년 8월 2일 개봉된 <넘버3> 대구지역 홍보 과정에서 대구 매일신문 기자 김중기(영화평론가)와 가까워졌고, 김중기를 통해 이진이를 소개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중기 기자는 시네마테크 활동을 비롯해 대구의 크고 작은 영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취재해 보도하고 있었다.
 
디비디비디비닷컴(dbdbdb.com)이라고 불렸던 시네디비넷은 1999년 서울로 복귀한 이하영이 구상한 사업으로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 위한, 앞서나간 활동이었다. 이하영은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가 있기에 한국영화도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전 재산인 전세 보증금으로 회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하영은 시네마서비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언경에 대표를 맡긴 것이었고, 전담할 인력이 필요했기에 대구로 직접 찾아가 키노키즈에게 함께 일하자며 서울로 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하영은 "대구 키노키즈가 독특했다"며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영화에 해박하고, 모르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기에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가장 적합한 인재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진이는 "이언경과는 서로 시네마테크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이야기가 잘 통했고 마음도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
 
대구 영화운동의 연대

1999년에 접어들며 대구 영화운동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화운동을 하던 시네마테크 아메닉과 송의헌 감독 등 창작자 그룹, 모션앤픽쳐가 손을 맞잡고 연대 조직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대구독립영화협회의 태동이었다.
 
원승환은 "1997년 <욕망>이라는 작품으로 손영득 대표를 알게 됐고, 송의헌 감독은 1998년 삼성이 주최한 4회 서울단편영화제 당시 <동상이몽>이라는 영화로 본선에 왔을 때 처음 만나면서 대구에서 16mm 단편영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송의헌 감독 단편영화 <동상이몽>

송의헌 감독 단편영화 <동상이몽> ⓒ 송의헌(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는 1999년 후반부터 진행됐다. 1999년 11월 15일, 대구영화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목적으로 손영득 외 14명(조중현, 송의헌, 안유학, 양우석, 윤성근, 오한택, 황성원, 김경훈, 황철현, 김효선, 원승환, 배청식, 우영호)이 대구영화제작 연대 기구 결성을 발의했다. 11월 22일에는 손영득 외 6인(송의헌, 황성원, 김효선, 양우석, 오한택, 원승환)으로 대구영화제작 연대기구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발의자 중에 데뷔작 <변호인>(2015)으로 천만 감독이 된 양우석(감독)이 있었던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2000년 전후로 대구에서 창작된 작품이 늘어났는데, 양우석은 1999년 첫 작품으로 단편 <탄탈로스의 5월>을 제작했다. 양우석은 "일반적인 단편영화 형태 영상물이었다"며 "당시 대구 한 방송국 피디로 있던 시기에 만든 것으로, 방송국에 있었으나 목표는 영화 연출이었다"고 말했다.
 
손영득은 "양우석(감독)이 송의헌(감독)과 친분이 있었고, 대구방송(TBC)에 있으면서 대구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참여한 것이다"라고 기억했다.
 
송의헌은 "양우석 감독의 <탄탈로스의 5월> 제작이 마무리될 때 처음 만났고, 조언을 구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 과정에서 함께 했다"면서 "영화적 관점과 기술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양 감독은 디지털영화 제작시스템에 큰 관심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창립준비위원회는 1999년 12월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부산독립영화협회를 각각 방문해 지지와 연대를 요청했다. 발기인 서명 작업에 돌입하면서 대구지역 영상 관련 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2000년 1월 15일 국제기획이라 불렸던 국제리서치에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준비위원회 임시사무실을 개설했다. 처음에는 영화제작연대기구라는 이름을 쓰다가 독립영화협회로 구체화한 것이다.
 
이어 2000년 2월 9일 창립준비위원회를 확대 구성해 창립준비위원장으로 경북대 독문과 김창우 교수를 추대했다. 설립 발기인은 이준동을 포함해 모두 186명이었다.
 
당시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이 이준동(제작자. 전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창립준비위 임시사무실이 자리했던 국제기획(국제리서치)은 이준동이 대표인 회사였다. 손영득은 "국제기획 사무실은 대구독립영화협회의 요람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연극 활동을 했던 이준동은 2001년 <오아시스> 프로듀서를 맡아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서울과 부산 등을 오가며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준동은 "당시 대구 사무실이 100평 정도로 넓어서,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 준비 공간을 내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11년 10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영화인 희망버스'에 참가한 이준동 대표가 팔짱을 낀채 정지영 감독 등과 함께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20011년 10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영화인 희망버스'에 참가한 이준동 대표가 팔짱을 낀채 정지영 감독 등과 함께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유성호

 
원승환은 "당시 대구독립영화협회 외에 민예총 대구지부도 이준동 대표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 등 대구 문화예술운동 단체들의 사무공간이었다"며 "예술마당솔도 같은 건물 지하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준동의 공간이 대구 문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남태우(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는 "국제기획에 이준동 선배가 영화를 연구하기 비디오 기기를 갖춰 놓고 있었다"면서 "이후 영화제작을 위해 서울을 갔으나 독립영화 활동을 하다가 상업영화로 진출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준동은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제작관리로 참여하기도 했다.

송의헌(감독)은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되던 당시 이준동 대표가 큰 힘이 돼 주셨다"고 강조하면서, "<봉인된 시간>을 번역하신 김창우 교수, 자유극장 대표, 지역 변호사 등등 많은 분의 응원 속에 대구독립영화협회가 출발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매일신문은(2000년 2월 19일 자) 대구 독립영화협회 창립 소식을 전하며 "그동안 열악했던 지역의 영화 제작 활성화와 영상문화의 저변 확대를 목적으로 결성되는 비영리 단체. 영화의 제작 지원은 물론 각종 영화제를 통한 독립·단편 영화의 배급과 영화관련 정책 연구, 영화교육 등의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송의헌은 "대구 독립영화협회는 21세기 영상문화의 세기를 맞아 지역의 실질적인 영상 주체가 될 것이다"라며 "영화에 관심이 많은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발기인으로 참여해 전망이 밝다"고 자신했다.
 
원승환은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생긴 것은 독립영화 단체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탄압받던 독립영화인들이 제도권에 들어간 것이었다"며 "전국에 작업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은 지역별로 단체를 따로 만들 만큼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은 이름이고 공간이지.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 단체의 개인들이 다 모여서 한독협을 만들었으나, 1년 뒤인 1999년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서 부산독립영화인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걸 만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한국영화인협회 대구지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젊은 사람들이 영화단체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은 지역에서 있었고, 1999년도에 대구에서 영화단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젊은 독립영화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식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식 ⓒ 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는 2000년 3월 17일 대백프라자 11층 대백예술극장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적인 출범을 알렸다. 서울과 부산에 이은 세 번째 독립영화협회의 탄생이었다. 창립준비위원회는 이날 김삼력(감독)이 읽은 취지문을 통해 대구독립영화협회를 만드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창립취지문] 대구독립영화협회를 건설하며...
 
60년대 영화사 통폐합 조치 이후 대구의 영화제작은 맥이 끊겨왔다. 물론 그간에 대구영화제작을 위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노력들은 영화제작환경과 시장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하여 의도한 성과를 남기지 못하였거나, 개인적인 작업으로 그치고 말았다. 대구의 영화제작을 다시 활성화 시키는 일은 한두 편의 장편영화 제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구영화 제작문화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화려하고 일시적인 영화의 제작이 아니라 뿌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 인력의 생산과 생산된 영화 인력들에 의한 지속적인 영화제작일 것이다.
 
우리는 젊은 독립영화의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독립영화는 경제적 독립이나, 검열로부터의 독립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이듯이, 독립영화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혹은 영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스스로가 세운 그 무엇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영화다. 스스로의 필요성, 목적성에 의해 영화를 만들어갈 때, 그것은 단순히 오락적이지 않고 상업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안에서 영화는 제작자와 관객,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과정은 치열한 자기 정제의 과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며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독립영화다.
 
대구에는 영화를 만들어왔거나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 여기라는 전제 속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위한 연대다. 자신을 단련하며 서로에게 자극이 되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연대다. 대구독립영화협회는 충분히 여건이 갖추어진 속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건마저 함께 만들어가야 하며 오히려 이것을 만들어가기 위해 출발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함께 가고자 한다.
 
2000년 3월 17일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준비위원회
 
대구독립영화협회가 일성으로 강조한 것은 창작이었다. 지속적인 영화제작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에 방향성을 설정한 것이었다. 서울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보다 왕성했던 창작 욕구가 독립영화협회 결성의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송의헌은 "다른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지역 독립영화협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초대 대표는 손영득이었고, 사무국장은 원승환이었다. 손영득은 "회의를 한번 했었는데 대표를 정해야 했다. 누가 할래? 했더니 손영득 대표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 대표하셔야 한다고 해서 맡은 거였다"며 "나이순으로 하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송의헌은 "나이도 그렇고, 애니메이션은 하는 인원이 적은 데다 실사영화를 하는 우리는 현장을 왔다 갔다 해야 하기에 손영득 대표가 제일 적합했다"고 기억했다. 원승환은 "창립 준비할 때 경북대 재학 중이던 김삼력(감독)과 고등학생이었던 최태규도 열심히 참여했다"며, "최태규는 이후 김삼력 감독 작품에 출연도 하고,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고 말했다.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영화제 포스터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영화제 포스터 ⓒ 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는 출범과 함께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대백예술극장에서 창립영화제를 개최했다. 이어 다양한 상영회와 행사를 연이어 마련했다. 5월 17일∼19일까지 자유극장에서 개최한 '짧은영화 극장가다'는 한강 이남 최초의 개봉관 단편영화 상영이라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7월과 8월에는 대구영화포럼과 영화·애니메이션 아카데미를 열었다.

11월 8일~12일까지는 대구 달서구 푸른방송 문화센터에서 대구독립영화협회가 만든 첫 영화제를 개최했다. 대구지역 영화제의 대표가 된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의 출발이었다.
 
대구단편영화제 시작은 원승환 사무국장이 한국독립영화협회 배급팀장을 맡아 서울로 옮겨가기 전 대구시에 제안서를 낸 것이 계기가 됐다. 대구영상축제를 제안한 것이었는데, 1천만 원 예산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손영득은 "대구에서 영화행사를 하면 예산도 배정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제안한 것이었다"며 "처음에는 비용이 적게 드는 상영회로 하려다가 송의헌 감독이 영화제를 해야 한다고 해서 영화제로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송의헌은 "대구에서 만든 영화를 상영하거나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영화를 제작해도 영화제에 선정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를 상영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며 "지역 영화가 만들어지는 분위기였고, 대구 제작영화에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진다고 생각해 대구단편영화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두환 생가 방화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남태우(배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가 본격적으로 영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 직후부터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 활동을 위해 서울로 옮겨간 원승환의 뒤를 이어 2000년 8월부터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의 실무 준비를 책임진 것이다.
 
남태우는 "이런 쪽 일이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개인적 취향으로는 맡고 싶지 않았으나 손영득(감독)과 송의헌(감독)이 도와달라고 했다"라며 "그 전화를 받은 게 2000년 8월 14일이라 광복절 지나고 하루 생각해 보다가 8월 16일 응하게 됐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습이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이었던 김삼력 감독 <아스라이>(2007)에 동산동 국제기획에서 신문지 깔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나왔다"고 덧붙였다. <아스라이는 대구독립영화협회 활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였다.
  
 전두환 생각 방화 사건을 보도한 MBC 뉴스에 나온 남태우 이름

전두환 생각 방화 사건을 보도한 MBC 뉴스에 나온 남태우 이름 ⓒ MBC

 
남태우는 대학 시절인 1988년 11월 11일 광주학살의 원흉이었던 전두환의 합천 생가 방화 혐의로 구속됐을 정도로 학생운동의 전면에 섰던 운동권이었다. 당시 구속 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불구속 재판을 받았으나, 1989년 징역 2년 6개월 집유 3년을 선고받았다.

남태우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4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국제영화제가 준비될 때였다. 지인이었던 기자의 소개로 국제에버그린영화제 행정담당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김동호(강릉영화제 이사장)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위원장이 조직위원을 맡았던 영화제로 서울의 첫 국제영화제가 될 뻔했었다.
 
하지만 국제에버그린영화제는 무산됐는데, 주최 측은 영화 검열을 이유로 밝혔다. 이에 대해 남태우는 "초기 사전검열이 문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항의 끝에 국제영화제의 위상에 맞게 검열을 하지 않기로 조정됐었다"며 "행정담당으로 서울시 동아일보,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등을 만나고 다녔으나, 실질적으로는 준비 부족과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영화제가 무산된 것이었다고"고 말했다.
 
남태우는 이후 서울의 케이블 채널에 다니다가 1999년 8월 15일 시민단체 새대구경북시민회의가 대안 언론으로 창간한 인터넷신문 < JUST > 편집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2001년까지 인터넷신문과 대구독립영화협회 일과 병행했다고 말했다.
 
남태우가 대구독립영화협회결성 이후 주로 관심을 기울인 건 제작 외의 분야였다. 그는 "다수의 독립영화가 사장되는 안타까운 현실과 대중과의 소통이나 제작비가 회수되는 경우가 적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제작보다 독립영화를 지역 사회에 알리는 일에 주력해 배급과 상영, 정책 등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대구단편영화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실무 책임을 맡아 단편영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고, 2002년에는 대구경북시네마테크를 만들어 지역 내에서 영화문화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예술영화 기획 상영을 주도했다. 예술영화전용관이었던 동성아트홀의 탄생도 남태우의 작품이었다.
 
대구의 예술영화전용관은 2003년 대구 매일신문 영화담당 기자였던 김중기(영화평론가)가 씨네아시아-구 아세아극장 2관에 개관한 필름통이 최초였다. 하지만 1년 만에 중단되면서 남태우는 독립영화 상영을 잇기 위해 다른 극장을 찾아다녔고, 2004년 동성아트홀을 설득해 독립예술영화전용관으로 전환 시켰다.
 
남태우는 "필름통은 영화를 좋아해서 나선 김중기 기자와는 다르게 건물주는 지원금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좌석도 못 채웠고, 배급 상영에도 관심이 없어, 일부 배급사가 필름을 돌려받지 못하기도 했다"다며 "시네마테크 활동을 위해서는 극장을 계속 구해야 하고, 대구단편영화제도 극장을 구해야 했기에 안정적인 극장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 남태우 제공

 
남태우는 대구독립영화협회 활동에 대해 "2009년 말까지 10년간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았으나, 들어오는 수입은 없고 나가는 비용만 있던 어려운 환경이었다"며 "어떻게든 독립영화를 알려야겠다는 생각만 있었기에 상영과 배급을 비롯해 운영비를 감당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남태우는 상영과 배급 외에 독립영화 제작에도 나서 현종만 감독 < Memories:2.18 대구지하철참사 >(2004)와 김동현 감독 <상어>(2007)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대구지역에서 제작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독립영화의 활성화를 위해 영상미디어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구영상미디어센터의 설립에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6년 영상미디어센터 소장 선임 과정에서 지원자로 최고점을 받았음에도 탈락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영상미디어센터 위탁 법인인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 박광진 원장이 비민주적인 월권행위로 직권탈락시키면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운영위에 참여한 대구독립영화협회와 민예총 등에 소속된 운영위원들이 탈퇴하는 등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남태우는 "박광진 원장이 영상미디어센터의 독립적인 운영에 공감하고 있었고 소통이 잘 됐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며 "직권탈락시킨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 것은 아니나, 전후 상황을 볼 때 학생운동 전력과 전두환 생가 방화 사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제공

 
대구 영화운동에 학생운동 출신으로는 김상목(대구 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과 노조 활동가를 거쳐 2010년이 돼서 대구 독립영화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뒤늦은 합류였으나 대학과 노동운동에 현장에서의 꾸준한 활동성이 영화로 옮겨진 것이었다.
 
김상목은 "1995년 대학 재학시절 열린공간큐 등 지역의 민간 시네마테크를 드나들었고, 초기 부산영화제와 인권영화제 등에도 때마다 참여했다"며 "1998년 총학생회 활동 과정에서 학내 축제인 대동제 때 <킹덤>과 <해피투게더> 등을 상영하면서 독립예술영화의 잠재력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 졸업 후 2007년 노조 상급단체 전임자로 활동할 때 2007년 마이클 무어 감독 <식코> 상영회 실무 등을 맡으면서 영화비평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상목은 2010년 이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출범과 함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영화 칼럼니스트와 영화인문학 강좌 등의 교육 활동에도 나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중운동의 정신을 영화를 통해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 시대 민중을 향해 소리쳐야 했다"
 
대구 영화운동의 기점이었던 열린공간큐는 긴 시간 문화운동의 거점 구실을 톡톡히 해내며 12년을 버티다 2005년 5월 문을 닫았다. 대구의 문화혁명기지로 불렸을 만큼 김성익이 모든 재산을 투입해 민중문화와 독립영화,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기획하고 지원했던 소중한 공간은 기억으로만 남겨졌다.
 
돈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열린공간큐의 운영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성익이 안 좋은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것은 "돈 만드는 것도 기획력이었기에 돈이야기를 하기가 싫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도 없다 보니 열린공간큐를 담당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전기료를 대신 내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익은 영남일보(2008년 8월 8일) 인터뷰에서 1990년대 문화운동에 대해 "말 그대로 운동성을 빼고는 문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며 "사회·시대·민중을 향해 끊임없이 소리쳐야 했다"고 회상했다.
 
 열린공간큐 김성익 대표 절음 시절 모습

열린공간큐 김성익 대표 절음 시절 모습 ⓒ 김성익 제공

 
이진이(작가)는 "1990년대 대구 영화운동에서 열린공간큐와 김성익 대표의 활동과 도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했다. 서영지(영화자막가)도 "열린공간큐와 김성익 대표가 안 계셨다면 영화언덕이라는 단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대구 영화운동이 열린공간큐와 김성익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진이는 "필름통을 개관했던 매일신문 기자 출신 김중기(영화평론가)의 도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1990년대 대구의 시네마테크 활동에 깊은 관심으로 끊임없이 기사화해 외부에 알렸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벤처기업 키노키즈를 만들 때 사무실 보증금 100만 원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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