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휴가철입니다. 무더위까지 기승인데요. 산으로 바다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코로나19가 재유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계획마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이럴 때, 무더위와 여행에 대한 갈증을 동시에 해소시켜 줄 '나만의 휴양지'가 있다면 어떨까요?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추억 여행에 젖다 보면 답답함도, 무더위도 잠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속 추억이 담긴 '나만의 휴양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형, 이번 여행은 무조건 제주도로 가는 거야. 알겠지?"

지난 1999년 나는 연말 군입대를 앞두고 입대시기가 비슷했던 한 살 터울의 친한 동생과 '단기 아르바이트 후 여행'을 반복하며 견문을 넓히고 있었다. 이미 봄부터 목포와 진도를 시작으로 강릉, 속초, 부산, 대구, 영덕 등 전국 각지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한 우리는 여름 시즌을 맞아 서해안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서산과 군산, 전주 등 충남 및 전북 지역에서 미식여행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뜬금없이 제주도로 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만약 내가 기존의 여행코스를 고집할 경우 혼자라도 제주도에 가겠다고 강수를 던졌다. 그만큼 동생에게 제주여행은 꽤나 절실해 보였다. 마침 나 역시 초등학교 때 가족들과 제주도에 다녀온 후 10년 넘게 제주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못 이긴 척 제주여행을 수락했다. 아무리 남도에 맛있는 산해진미가 있더라도 입대를 앞두고 혼자 쓸쓸한 여행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동생을 만나 제주도에 가고 싶은 '진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동생의 입에서는 뜻밖의 영화 제목 한 편이 나왔다. 최근 짝사랑하는 여자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한 편을 봤는데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제주도가 계속 떠올랐다는 이야기였다. 동생이 이야기한 영화는 바로 '장고커플' 장동건과 고소영을 이어준 제주배경의 멜로영화 <연풍연가>였다.

편리한 비행기 놔두고 17시간 걸려 제주행
 
 서해안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우리가 갑자기 제주도로 장소를 바꾼건 오로지 이 영화 때문이었다.

서해안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우리가 갑자기 제주도로 장소를 바꾼건 오로지 이 영화 때문이었다. ⓒ 시네마 서비스

 
당시에도 제주행 성수기 비행기 티켓값은 꽤 부담스러웠지만 이륙 후 1시간 만에 제주에 도착한다는 편리함을 고려하면 비행기를 타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혈기로 똘똘 뭉쳐 있던 우리는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목포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제주까지 가는 미련한 코스를 선택했다.

돈도 아끼고 '낭만'도 즐긴다며 기차와 배를 이용한 제주행을 선택했지만 밤10시에 집에서 나와 다음날 오후 3시에 제주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기차와 배를 이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젊음의 열정이 끓어 오르던 우리는 17시간의 긴 여행으로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도 버스를 타고 중문관광단지로 이동해 호텔이라 부르기 다소 민망한 시설의 숙소에 짐을 풀고 제대로 된 첫 식사를 하면서 '제주입성'을 자축했다.

사실 나는 물론 동생 역시 제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자동차를 렌트할 수 있을 만큼 여행경비가 넉넉하지도 않았다(심지어 나는 장롱면허, 동생은 무면허였다). 결국 우리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를 통해 이름 있는 관광지를 중심으로 즉흥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 여미지식물원과 천지연폭포 등을 구경한 우리는 다음코스로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분화구인 산굼부리를 선택했다. 산굼부리는 영화 <연풍연가>에서 영서(고소영 분)와 태희(장동건 분)가 제주여행을 하면서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연인들이 많은 장소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짝사랑하던 여자와의 연애를 꿈꾸던 동생은 산굼부리에서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나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의외로 좋은 선택이었던 '제주도 택시투어'
 
 현지 택시기사님이 소개해준 로컬식당의 흑돼지는 제주도에서 만난 '최고의 맛'이었다.

현지 택시기사님이 소개해준 로컬식당의 흑돼지는 제주도에서 만난 '최고의 맛'이었다. ⓒ 양형석

 

그렇게 발품을 팔아가며 힘겹게 여행을 하던 당시 우리는 택시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버스 노선을 찾기 힘들어서 큰맘 먹고 탔던 택시에서 기사님이 일정금액을 지불하면 택시로 제주도 관광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물론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술일 수도 있지만 제주도에 올 기회가 많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꽤 솔깃한 제안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택시 기사님과 계약(?)을 체결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오후 내내 이어졌던 '제주도 택시투어'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육지사람(?)을 태웠다는 택시기사님은 이동하면서 제주도의 장점과 특징들을 조목조목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특히 <연풍연가>에도 나오는 도깨비도로에 갔을 때는 함께 차에서 내려 구비해 두었던 빈 캔을 오르막길에 굴려 보라며 직접 체험을 시켜주기도 했다.

기사님은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로컬 맛집'이라면서 어느 제주도 흑돼지 집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고 투어를 마쳤다. 사실 우리는 제주도를 찾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보다는 해산물이나 생선회 등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택시기사님의 강력추천은 꽤 성공적이었고, 실제로 우리는 제주 흑돼지에서 '최고의 맛'을 찾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지금보다 술을 더 잘 마셨던 20대 초반의 우리는 흑돼지의 쫄깃한 식감과 제주의 분위기에 취해 주량을 훨씬 뛰어넘는 많은 술을 마셨다. 결국 다음날 새벽에 가기로 계획했던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구경을 포기하고 숙소에서의 늦잠을 선택했다. 

오전이 거의 끝나고 숙취가 가실 무렵 동생은 <연풍연가>에서 두 주인공이 키스를 했던 마라도에 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마라도까지 다녀 오기엔 경비가 부족했다. 결국 우리는 제주에 내려올 때의 고생을 교훈 삼아 빠르고 편리한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연풍연가>하면 떠오르는 1999년 여름의 추억
 
 장동건(왼쪽)-고소영 커플이 만났던 <연풍연가>를 떠올리면 남자동생과의 제주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장동건(왼쪽)-고소영 커플이 만났던 <연풍연가>를 떠올리면 남자동생과의 제주 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 시네마 서비스

 
서울로 올라온 동생은 끝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 시절 동생과 함께 했던 여행의 추억을 뒤로하고 군에 입대했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연풍연가>를 보지 못했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비디오로 빌려 <연풍연가>를 봤고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연풍연가>를 본다. 그럴 때면 젊고 열정에 넘쳤던 23년 전 여름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의 혈기왕성하던 20대 초반의 청년은 어느덧 40대 중반이 됐고, 3년째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여행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 올해도 폭등하고 있는 물가와 경기침체, 그리고 코로나 확진자 수 증가 때문에 여행계획을 세우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올 여름 각자 시원한 곳에서 여행의 추억을 함께 나눈 사람과 함께 그때 그 시절의 영화를 보며 '방구석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그해 여름이 유난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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