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환혼>의 한 장면

tvN <환혼>의 한 장면 ⓒ tvN

 
tvN 판타지 사극 <환혼>은 무사 겸 술사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속의 이들은 무예를 연마하면서 술법도 함께 배운다. 그래서 꼭 검이 없더라도 상대방과의 대결에서 대단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
 
가상의 왕국인 대호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에는 한글이 등장한다. 한글로 적힌 문서나 간판이 자주 등장한다. 한글이 보급된 이후를 배경으로 가상의 왕국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무사 겸 술사들이 선비 이상의 대우를 누리며 동량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것은 1446년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의 한국에서는 무사가 문사에 비해 위축돼 있었다. <환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전 시대의 선배 무사 겸 술사들을 모범으로 삼지만, 고려와 조선의 실제 동량들은 공자나 맹자, 주자 같은 문인들을 인생의 준거로 삼았다.

그런 시대 분위기가 이순신 장군의 원래 전공에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무과가 아닌 문과생이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이순신 가문은 대체로 무신을 배출하다가 조선왕조가 들어설 즈음부터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에 이순신의 조상들은 성리학에 기반한 사대부 가문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문신보다는 무신에 어울림을 알려주는 조짐들이 있었다. 조카 이분(李芬)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1545년에 점 치는 사람이 "나이 50이 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이순신은 47세였다. 이때부터 계속 남방에서 활동했으니, 그가 북방에서 활동하리라는 예언은 적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장이 되리라는 부분은 적중했다.

소년 이순신이 붓보다 칼에 더 어울린다는 점은 놀이 습관에서도 나타났다. "어려서 놀 때도 언제나 여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놀았다"며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받들었다"고 행록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장수가 아닌 선비의 길을 걸었다. 문과에도 소질이 있기는 했지만 무예에 더욱 소질이 있었는데도 문과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儒學)을 공부했는데, 재기(才氣)가 있어서 그 길로 성공할 수도 있었으나 매번 붓을 내던지고 싶어 했다"고 조카 이분은 증언한다. 문과에도 소질이 있기는 했지만, 그 길로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항상 붓을 던지고 싶어 했다는 서술에서 그의 답답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tvN <환혼>의 한 장면

tvN <환혼>의 한 장면 ⓒ tvN

 
붓을 던지고 싶어 했지만 매번 마음뿐이었다. 붓을 던지지 못하게 하는 압력이 강했던 것이다. 그의 시대는 문인의 시대였다. 선비나 문과 급제자가 선망의 대상이 됐던 시절이다. 이런 분위기가 집안 어른들을 통해 그에게 압력을 미쳤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결국 자기 길을 가게 된 것은 가문을 벗어나면서부터였다. 데릴사위제의 유풍이 남아 있어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가는 것'이던 16세기 후반에 그는 결혼을 통해 친가의 영향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게 됐고, 이는 그가 장인의 권유에 따라 결혼 이듬해에 무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과(轉科)는 훗날 그가 나라를 구하는 출발점이 됐다.
 
이순신이 그런 우여곡절을 거친 것은 무인들이 대우받지 못하는 풍토와 무관치 않다. <환혼> 속의 무사들처럼 조선시대 무인들도 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면, 칼을 쥐어야 할 소년 이순신이 한동안 억지로 붓을 쥐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 무사의 지위는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나라 역사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 한국에서는 무인이 높은 대우를 받았다. 신라 역사를 주도한 화랑들도 기본적으로 무사였다. 인문학 공부도 당연히 겸했지만, 본질적 정체성은 무사에 있었다. 고구려의 동량인 조의선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문학적 소양을 갖춘 무사들이 고대 사회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랬던 분위기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천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4대 주상인 광종이 958년에 과거제를 시행하면서부터였다. 검보다는 책으로 연마하는 사람들이 군주의 중용을 받게 되면서 무인과 문인의 지위가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광종이 과거제를 시행한 것은 군사력을 보유한 지방 호족들을 약화시키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호족 자제들의 요직 독점을 견제하고 일반 사대부가 청년들의 관직 진출을 장려하며, 호족과의 연고가 옅은 그런 청년들을 앞세워 왕권을 견고히 할 목적에서였다.
 
약 2세기 뒤인 1170년에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세상을 뒤흔들었다. 무사들이 문신 체제에 대항해 일어났다는 것은, 광종의 목적이 사후에 실현돼 문신 지배체제가 구축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인들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차별 의식 속에는 복합적 측면이 담겨 있었다.
 
1170년 당시 무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이었다. 과거제가 정착하기 전만 해도 이들은 문사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 차별이 더욱더 참을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우리보다 낮았다고 하는 문인들이 지금 시대에 와서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는 인식이 무신 전체의 공분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tvN <환혼>의 한 장면

tvN <환혼>의 한 장면 ⓒ tvN

 
당나라는 907년에 멸망하고 신라는 936년에 멸망했다.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신라 멸망 연도가 935년으로 표기돼 있지만, <고려사> 태조세가(왕건 편)에 따르면 왕건이 경순왕의 항복을 받고 양국 통합을 선언한 날은 '음력으로 태조 18년 12월 11일'이다. 요즘 식으로 표기하면 '935년 음력 12월 11일'이다. '935년 음력 12월 1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그냥 '935년 12월 11일'로 표기하다 보니 신라가 935년에 멸망했다는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29년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 나라 멸망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지방에서 군사권을 가진 세력의 발호로 인해 왕조가 몰락했다는 점이다. 당나라에서는 지방 절도사들이 중앙의 권위에 도전했고, 신라에서는 지방 호족들이 그런 식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지방 무장세력의 발호로 동아시아가 혼란에 빠지는 이런 양상은, 왕실과 사회가 연합해 무인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부각했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고려와 송나라에서 귀족 가문이 아닌 일반 사대부 가문 자제들이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에 많이 진출한 것은 이런 시대적 공감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 속에서 광종은 과거제 시행을 통해 호족을 약화시키고 일반 사대부 가문을 강화시켰다. 이는 문인의 사회적 지위가 무인을 능가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환혼>과 정반대로 무사들이 차별을 받는 양상이 고려·조선시대에 일반화됐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다면, <환혼>이란 드라마가 훈민정음 보급 이후보다는 고려 광종 이전의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면 실제 역사와 좀 더 잘 어울렸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드라마는 동아시아 무인의 지위가 크게 추락한 시대를 배경으로 '무인들의 전성기'를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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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시사와 역사 채널).kimjongsung.com. 제15회 임종국상..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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