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지시하는 추일승 감독

작전 지시하는 추일승 감독 ⓒ 대한민국농구협회

 
'희망'으로 시작하는 듯 했으나 또다른 '참사'로 막을 내렸다. 한국농구의 아시아 정상 도전이 또다시 좌절됐다.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상대에게 덜미를 잡혔기에 더욱 허무하고 아쉬운 결과였다.
 
추일승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남자농구대표팀은 2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022 FIBA 아시아컵 8강전'에서 뉴질랜드에게 78-88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추일승호 출범 이후 평가전을 포함하여 6경기만의 첫 패배였다. 종전 아시아선수권 시절을 포함해 한국이 8강에서 탈락한 것은 2009년 톈진 참사(7위)와 2015년 창사 참사(6위)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한국의 탈락으로 아시아 전통 강호들이 이번 대회에서 모두 '전멸'하는 초유의 이변이 완성됐다. 필리핀이 12강에서 일본에 패한 것(81-102)을 시작으로, 8강에서는 역대 최다우승팀 중국(16회)이 레바논(69-72)에게, 이란은 요르단(76-91)에게 각각 패해 탈락했다. 일본 역시 디펜딩챔피언 호주(85-99)에게 완패했다.
 
이로써 오세아니아의 호주를 제외하고는 한국(역대 4위)를 포함하여 FIBA 아시아컵 우승 경험이 있는 역대 1~5위팀이 모두 8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특히 아시아농구 전통의 강호로 꼽히던 한국-중국-이란 3팀 중 단 한 팀도 준결승 무대를 밟지 못한 것은 대회 역사상 최초였다. 아시아농구의 급격한 판도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대표팀에게 뉴질랜드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대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중국을 잡는 등 3연승을 내달리며 8강에 직행했다. 추일승 감독 특유의 포워드 농구를 앞세워 경기력에서 호평을 받으며 기대감이 높아졌고, 부담스러운 우승후보들을 피하여 8강에서 상대 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뉴질랜드를 만난 대진운도 나쁘지 않았다. 시리아와의 12강전을 거쳐 올라온 뉴질랜드에 비하여, 8강에 직행하며 나흘간의 휴식을 취하여 체력적인 면도 유리했다.
 
하지만 정작 단판승부였던 8강전에서의 추일승호는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추일승호를 흔든 결정적인 '삼중고'는 부상과 높이, 그리고 멘탈이었다.
 
뉴질랜드전을 앞두고 추일승호에는 잇단 비보가 전해졌다. 허웅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확진됐고, 허훈은 발목부상으로 각각 전열에서 이탈했다. 현 대표팀에서 유일한 정통슈터와 포인트가드의 이탈로 한국은 시작도 하기전에 백코트진에 큰 전력누수가 발생했다.

사실 한국은 이미 대회 시작 전부터 부상 불운에 시달렸다.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이번 대회에 출전했어야 할 김선형-이승현-전성현 등 주전급 멤버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장신포워드 여준석은 부상은 아니지만 미국 G리그 도전을 선언하며 중도에 대표팀을 자진 하차했다. 설상가상 라건아-최준용 등도 크고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출전은 했지만 정상적인 몸상태는 아니었다. 1.5군에도 못미친 선수 구성의 한국은 뉴질랜드를 상대로 최상의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국은 높이 싸움에서 뉴질랜드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뉴질랜드는 12강전까지 리바운드 전체 1위(51.3개)를 기록했고, 뛰어난 제공권을 바탕으로 외곽슛 시도도 가장 적극적인 팀이었다. 한국은 공격 리바운드+3점슛이라는 뉴질랜드의 패턴에 알고도 당했다.
 
한국은 리바운드 싸움에서 43-61로 크게 밀렸고, 공격 리바운드에서 12-24로 두 배의 격차를 드러냈다. 리바운드에서 크게 밀릴수록 한국은 수비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체력적인 부담도 커졌고 장기였던 트랜지션을 좀처럼 살릴 수 없었다. 조별리그에서 통했던 라건아의 포스트업과 스윙맨들의 돌파도 뉴질랜드의 장신숲에서는 그 위력이 반감되며 한국은 경기 내내 페인트존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뉴질랜드는 리바운드를 믿고 적극적인 외곽 공격을 시도하며 3점슛을 14개나 꽃아넣었다.
 
 돌파 시도하는 최준용

돌파 시도하는 최준용 ⓒ 대한농구협회

 
하지만 가장 치명타가 된 것은 바로 선수들의 잇단 평정심 상실이었다. 한국은 전반 뉴질랜드의 높이에 고전하면서도 3점슛 2방 포함 팀내 최다인 10점을 넣은 라건아의 분전, 최준용-송교창을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한 지역방어, 벤치에서 투입되어 활력소 역할을 해준 이우석의 활약 등으로 뉴질랜드에 역전하여 전반을 46-40으로 리드한 채로 마쳤다.
 
그런데 후반 팽팽한 접전 속에서 한국이 54-48로 근소하게 리드하던 3쿼터 종료 7분 26초를 남기고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주장 이대성이 수비자 파울에 항의하다가 두 번째 테크니컬 파울을 받으며 퇴장당하고 말았다. 이대성은 파울판정에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감싸 안았고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었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테크니컬 파울이 나비효과가 됐다. 이대성은 2쿼터 막바지에 상대 진영에서 스틸로 레이업슛을 성공한 뒤, 포효하며 뉴질랜드 선수에게 다가가 몸을 부딪치며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다. 심판은 곧바로 이대성에게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했다. 한국이 상승세를 타던 시점에서 전혀 불필요한 행동이었고, 이는 심판에게도 나쁜 인상을 주는 빌미가 됐다.
 
이대성의 무모한 행동이 더욱 아쉬웠던 이유는 그가 이날 경기에서 사실상 한국대표팀의 유일한 포인트가드였기 때문이다. 김선형도 허훈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은 이대성이 최대한 오랜 시간 코트를 안정적으로 지켜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대성이 3쿼터 이른 시간에 퇴장 당하면서, 한국은 포워드인 최준용과 경험이 부족한 이우석 등이 볼운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추일승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가드없이 빅맨과 포워드만 투입하는 변칙적인 빅 라인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메인 볼핸들러를 모두 잃은 한국은 남은 시간동안 공격 조립이 눈에 띄게 뻑뻑해지며 야투율이 폭락했다.
 
또한 이대성의 부재는 수비에서도 큰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뉴질랜드의 가드 플린 카메론은 이날 22점 9리바운드 8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쳤는데 이중 14점을 4쿼터에 몰아넣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카메론은 한국의 진영을 자유자재로 휘저으며 돌파, 외곽슛, 어시스트까지 원맨쇼를 펼쳤고, 가드진이 전멸한 한국은 카메론으 전담마크할 선수가 없었다. 추일승 감독도 결국 이대성의 퇴장을 이날 승부의 최대 전환점으로 꼽았을 정도다.
 
설상가상 4쿼터 종료 2분여를 남기고는 최준용까지 심판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최준용은 이날 이대성이 없는 백코트에서 가드 역할을 수행해야했고, 경기중 발목 부상을 당하는 악재 속에서도 코트로 돌아오며 책임감을 드러냈으나 퇴장 판정을 받자 분을 참지 못했다. 라커룸에 들어가면서 물병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대표팀 주장과 리그 MVP의 연이은 퇴장은, 한국으로서는 마지막 추격의 동력마저 상실하는 부메랑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이날 라건아가 19점 14리바운드로 더블-더블, 최준용이 11점 9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에 가깝게 분전했다. 추일승 감독 특유의 빅포워드 전술과 무한 로테이션 농구가 가능성도 보여줬지만, 한편으로 안정적인 볼핸들러와 외곽 해결사가 없다는 뼈아픈 한계 또한 확인한 결과였다.
 
한국농구는 1969년과 1997년 당시 아시아선수권 우승 이후 25년째 더 이상 정상과 인연을 맺지못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사실 현실적인 목표는 4강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뉴질랜드를 이겼더라도 4강에서 FIBA 랭킹 3위의 호주를 만나야하기에 한국의 우승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상대를 만나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을 다 살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퇴장한 것은 안타까운 결과다. 내년으로 연기된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약 1년간 이렇다할 A매치가 없는 한국으로서는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추일승호의 첫 도전이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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