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월드컵 한국과의 최종예선에서 골을 넣었던 일본의 스트라이커 미우라 카즈요시(요코하마 FC)는 5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현역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야구에서는 1986년에 데뷔한 제이미 모이어가 2012년까지 8개 팀을 거치면서 만49세까지 25년 동안 빅리그에서 공을 던졌다. 물론 미우라와 모이어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고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빠르면 20대 초·중반, 늦어도 40대 전후로는 선수생활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느 종목 이상으로 거칠기로 소문난 프로레슬링의 경우는 유난히 선수생활이 긴 종목으로 꼽힌다.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지난 2월 만 73세가 된 1949년생 릭 플레어는 작년까지 WWE에서 현역 선수와 매니저로 활동했고 WWE를 나온 후에는 AAA라는 단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릭 플레어는 오는 31일(현지시간) '공식적인' 은퇴경기를 치르며 현역 생활을 마감할 예정이다.

프로레슬러들이 고령의 나이에도 꾸준히 링에 오르는 이유는 자신을 위한 음악이 흐르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관중들의 반응을 느낄 수 있는 입장 당시의 쾌감을 잊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0년대 최고의 섹시스타로 군림했던 미키 루크의 재기작이기도 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퇴물 레슬러가 링 위에서의 환희를 잊지 못하고 다시 링에 오르는 이야기를 다룬 스포츠 드라마다.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더 레슬러>는 제작비의 7배가 넘는 성적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더 레슬러>는 제작비의 7배가 넘는 성적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 (주)NEW

 
1980년대 섹시스타의 몰락과 극적인 재기스토리

학창 시절부터 복싱선수로 활약하며 아마추어 전적 20승 4패, 프로전적 6승 2패의 성적을 남긴 미키 루크는 197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 < 1941 >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범죄 스릴러 영화 <보디 히트>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주목 받기 시작한 루크는 1986년 <나인 하프 위크>, 1987년 <엔질 하트>를 통해 단숨에 1980년대 중반 최고의 섹시스타로 떠올랐다.

루크는 1988년 주연은 물론 직접 각본까지 쓴 권투영화 <홈보이>에 출연했는데 루크는 실제 복싱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앞두고 별도의 복싱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을 하다가 배우로 변신한 루크는 할리우드의 생리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지했고 이는 <플래툰>과 <레인맨> <양들의 침묵> 같이 루크의 배우인생을 바꿀 수 있었던 걸작영화들의 캐스팅 거절로 이어졌다.

문란한 사생활과 마약, 음주 등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 루크는 자기관리에 실패했고 오토바이 사고 후 지나친 성형으로 인해 전성기 때의 얼굴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결국 루크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B급 영화의 주연이나 조·단역을 전전하며 대중들에게 잊힌 배우가 됐다. 그나마 2005년 <씬 시티>의 마브 역을 통해 전성기 시절의 카리스마를 되찾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상승세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파이>와 <레퀴엠> 등을 연출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루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에 주목하며 그를 신작 <더 레슬러>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더 레슬러>에서 퇴물레슬러 랜디 더 램 로빈슨에 빙의한 듯한 명연기를 선보인 루크는 골든글러브와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더 레슬러>는 세계적으로 4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에도 성공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루크는 <더 레슬러> 이후 <아이언맨2>에서 러시아의 천재 물리학자이자 토니 스타크에게 원한을 가진 이반 반코, <익스펜더블>에서 문신업자로 생활중인 전직요원 툴을 연기하며 건재한 액션연기를 선보였다. 2014년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링에 올라 복싱경기를 하기도 했던 루크는 작년에도 세 편, 올해도 한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칠순이 넘은 고령에도 액션배우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프로레슬러들이 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미키 루크는 <더 레슬러>로 골든글러브를 비롯해 4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미키 루크는 <더 레슬러>로 골든글러브를 비롯해 4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 (주)NEW

 
사실 프로레슬링을 썩 좋아하지 않는 대중들은 헐크 호건과 더 락, 존 시나 등이 활동했던 WWE 정도 밖에 모르지만 사실 전 세계에는 많은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존재한다. 물론 국내에서는 한때 '프로레슬링은 쇼'라며 프로레슬링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적이 있지만 미국과 멕시코 등에서는 연극적인 재미와 스포츠의 박진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스포테인먼트'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여러 단체에서 수 많은 레슬러들이 활동하고 있다.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 분)은 1980년대 중·후반 뉴욕의 대형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의 메인이벤트를 장식할 정도로 잘 나가는 최고의 프로레슬러였다. 하지만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랜디는 퇴물레슬러로 전락해 식료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단체에서 근근이 레슬러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단골 스트립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트립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 랜디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많은 관객들이 <더 레슬러>의 랜디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랜디의 삶이 랜디를 연기한 배우 미키 루크의 실제 삶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랜디가 아야톨라(어니스트 밀러 분)와의 대결을 위해 심장질환을 무릅쓰고 다시 링에 오른 것처럼 루크 역시 변해버린 얼굴에도 용기 있게 <더 레슬러>에 출연해 열연을 펼치며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소규모 독립단체에서는 레슬러들이 무대 뒤에서 대기실을 함께 사용하는데 링 위에서 서로 죽일 듯 싸우는 레슬러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서로의 몸 상태를 걱정해 주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랜디의 마지막 상대였던 아야툴라는 경기 중간 랜디가 심장을 부여잡고 괴로워하자 랜디를 걱정하며 "여기서 경기를 끝내자"고 제안한다(하지만 랜디는 이를 거절하고 끝내 3단 로프에 올라가 자신의 피니시 기술인 '램 잼'을 시도했다).

<더 레슬러>의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1998년 장편데뷔작 <파이>로 선덴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이어 <레퀴엠>과 <천년을 흐르는 사랑>을 차례로 연출했다. <더 레슬러> 이후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이 돋보였던 <블랙스완>을 연출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2014년 <노아>로 3억 5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17년작 <마더!>는 제니퍼 로페즈 등 화려한 캐스팅에도 흥행에 실패했다.

<스파이더맨> 메이숙모가 스트립 댄서?
 
 <더 레슬러>에서 스트립 댄서 캐시디 역을 맡았던 마리사 토메이(오른쪽)는 2016년부터 MCU <스파이더맨>의 메이숙모로 변신했다.

<더 레슬러>에서 스트립 댄서 캐시디 역을 맡았던 마리사 토메이(오른쪽)는 2016년부터 MCU <스파이더맨>의 메이숙모로 변신했다. ⓒ (주)NEW

 
주중엔 식료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엔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던 랜디에게 스트리퍼 캐시디는 말동무이자 랜디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물론 랜디의 끈질긴 애정공세에는 '손님과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철칙을 내세우며 거리를 유지하지만 캐시디는 랜디의 유일한 혈육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 분)의 선물을 골라주고 함께 춤을 추다가 키스를 하는 등 랜디가 오해할 만한 행동도 많이 했다.

자신이 미혼모라는 사실 때문에 랜디와의 관계에서 선을 긋는 캐시디를 연기한 배우 마리사 토메이는 1992년 <나의 사촌 비니>에서 조 패시의 약혼녀 모나 리사 비토를 연기하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의 <스파이더맨>에서 나이가 지긋한 기존의 메이 숙모와 달리 젊고 섹시한 메이 숙모를 연기하며 해피 호건(존 파브로 분)을 비롯해 많은 남성 관객들을 설레게 했다.

랜디의 유일한 혈육인 스테파니 역은 드라마 <웨스트월드>에서 돌로레스를 연기하며 유명세를 탄 에반 레이첼 우드가 연기했다. 스테파니는 아버지와 어린 시절 함께 찾았던 공원에서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함께 식사를 하기로 약속한 전날 랜디가 마약에 취해 늦잠을 자면서 두 사람은 다시 멀어지고 말았다. 에반 레이첼 우드는 <겨울왕국2>에서 엘사와 안나의 엄마 이두나 왕비의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다.

랜디의 마지막 상대이자 은퇴 후 중고차 딜러로 변신한 이란 출신 반미주의자 기믹의 악역 레슬러 아야툴레 역은 실제 프로레슬러 출신 배우 어니스트 밀러가 연기했다. WCW와 WWE에서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로프를 이용한 날렵한 공중기를 선보였던 밀러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듯 몸이 크게 불은 상태로 <더 레슬러>에 출연했다(하지만 '더 램과 아야툴레, 20년 만의 재대결'이 영화 속 콘셉트였기 때문에 그의 불어난 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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