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말속에다가 진심의 농도(濃度)를 얼마만큼을 담아야 타인은 그 말에 반응하게 될까? 사실, 말과 표정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고이래 우리 사피엔스들은 결국, 행위나 사건의 결과를 통해 진심이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극한의 고통, 또는 죽음이나 살인과 같은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 말이다.
 
 <헤어질 결심>의 주연 배우, 탕웨이&박해일

<헤어질 결심>의 주연 배우, 탕웨이&박해일 ⓒ 모호필름

 
'마침내'로 맺은 인연

형사, 장해준은 첫눈에 피의자 송서래와 사랑에 빠진다. 서래도 마찬가지. 그런데 '첫눈에'라는 판단은 맞는 걸까? 

대부분의 남과 여는 영화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몽룡과 성춘향, 또, 올리버와 제니도 그랬다. 군 장성출신 인사가 여성 무기 로비스트에게 첫눈에 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첫 느낌은 정확하다. 장해준과 송서래에게는 형사와 피의자, 유부남과 유부녀 따위의 세속적 지위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랑을 멈추나요?"라는 송서래의 대사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알게 됐다. 이미 둘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호송 차량 뒷좌석에서 남자의 왼 손목과 여자의 오른손에 채워진 수갑이 예쁜 커플 팔찌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형사로서의 자부심을 박탈당하고 '붕괴(崩壞)'된 해준은 서래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여자에 미쳐서" 눈이 먼 해준은 단짝이던 후배 경찰의 조언을 무시하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듯 -不敢請固所願(불감청 고소원)-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사건을 종결해버리게 된다. 섣부른 종결은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었다. 뒤늦게 해준이 자신의 판단에 치명적 실수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이 너무 멀리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준은 팔로 자신의 목을 감고 얼굴을 맞댄 채 사랑을 호소하는 서래를 뿌리치고 떠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최선의 호의를 베푼다. 그것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상대방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조치다. 이것이 영화, <헤어질 결심>이 '비극'이 되는 결정적 씨앗이 된다. 관객은 해준과 서래 누구에게도 적의(敵意)를 갖기 어렵다. 

흠모하던 해준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래는 해준의 감정과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삶의 경로를 선택한다. 남편과 헤어진 이후 서래에게 의미 또는 가치가 있는 삶이란 해준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에...

내가 언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해준은 서래에게 "피야올량(예쁘다)"이라고 말했고,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도 발라줬다. 그리고 결정적 증거물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버리라"고 말한다. 다른 남편들은 서래를 소유하거나 이용하기에 급급했다. 서래가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고귀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행동과 말을 해준 남자는 해준뿐이다. 그러나 해준은 서래에게 직접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는 어리석게도 서래에게 자신의 속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서래도 어떤 다른 여자도 해준 적이 없을, 무언가를 해준에게 제공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것은 자신을 만나 '붕괴'된 해준을 그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증거물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하고 이 세상에 해준만 남겨놓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영원한 '미결(未決)'로 완성(?)한다.

후회없는 사랑에 대하여

영화를 보고나서, <말하는 보르헤스>라는 책에서 보르헤스가 인용한 레오폴드 루고네스의 시(詩)가 생각났다. 
 
"그날 오후가 반쯤 지나갔을 때
내가 일상적인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신을 버려둔다는 막연한 당혹감이
바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소."

보르헤스는 이 시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간통을 했다는 죄목으로 함께 살해되었는데, 프란체스카는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라고 말할 뿐 죽기 전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밀물이 밀려드는 해변에서 허청거리는 해준. 그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게 될까? 서래의 가없는 사랑을 확인한 순간 혼자가 되어 버린 해준에게는 바다와 파도와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리지는 않았을까.

서래가 아니라 오히려 해준만 지옥에 남게 된 것은 아닌지. 서래의 해준을 위한 선택이 외려 살아남은 자에게 지독한 형벌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의문은 계속된다. 그러나 영화는 짙은 여운을 남기며 스크린을 닫고, 스피커로는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를 내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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